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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박사의 생애와 신앙(上)
작성일 : 2018/11/30 14:10 / 조회 : 17 / 추천 : 2


독립의 기반 -“내 몸 바쳐 남을 위해 일하는 것”

1. 머리말

이승만 박사(1875.3.26.-1965.7.19)의 독립투쟁과 일생은 개화기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일제하 독립투쟁과 해방, 남북분단과 대한민국 건국과 초대 대통령으로 거국 내각 정부수립, 6·25전쟁과 4·19, 하야와 망명 등 그의 90평생은 한국 근 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정치 사회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생애인 것이다. 이제 이승만 박사의 독립투쟁과 신앙생활을 살펴 보려한다. 이 글은 “이승만 박사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이 그 인격형성 뿐 아니라 생활, 그의 모든 활동 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란 물음을 가지고 살펴 보려한다.


2. 기독교와의 첫 만남

이승만 박사는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고, 3세 때 서울로 이사하여 서당에서 과거급제를 목표로 통감桶鑑, 사서四書 등 유학에 열중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그 해 11월에 서당동료 신긍우(申肯雨, 신흥우의 형)의 권고와 소개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문부에 적을 두었다.
그의 첫 영어선생은 노블(W.A. Noble) 선교사였고 영어실력 향상을 인정받아, 제중원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여의사 죠지아나 화이팅(Georgina Whiting)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배재학당 영어선생으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첫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노블 선교사가 “학생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해야 된다”며 권고하기에 참여한 것이다. 이때 아펜젤러의 설교를 처음 들었다. 설교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내용이었으나 이승만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가풍과 유학의 선비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외면케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첫 예배에서 “어떻게 1900여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한단 말인가?”라고 조소하였고, 이러한 어리석은 교리를 믿는 선교사들도 미련하게 보았다. 이러한 교리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이지 학식을 지닌 선비들에게는 가당치도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월 20불을 받았으며, 이 돈을 어머님께 드리며 배재학당에 입학한 사실을 말할 때, “얘야, 너는 굶어 죽더라도 천주학쟁이는 되지 마라”는 간곡한 당부도 있었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를 배우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하며, “어머니,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나 총명합니다. 염려마세요”하고 안심시켜 드리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1896년1월에 귀국한 서재필 박사의 강연에 도전 받았으며 ‘독립신문’에 참여하였다. 또한 배재학당에 ‘협성회’란 학생 단체를 조직하고 ‘협성회보’를 발간했다. 이승만은 주필로 활약하며 토론회, 강연회를 통해 정부의 부패를 공격하고 정치개혁, 외세배제, 민족계몽, 자주의식을 고취하였다. 정치적 간섭으로 협성회가 폐지되면서, 1898년 4월 9일부터 협성회보를 ‘매일신문’으로 개칭 창간하고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제국신문’ 창간에도 참여하는 등 언론과 토론, 공개 강연으로 활동하였다.
이승만은 외세를 배격하자는 ‘만민공동회’ 등 민족자주 애국구국운동에 몰두하다가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가 해산 되고 지도자들이 체포될 때, 1899년 1월 9일 함께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정치범 사형수로 서소문 형무소에 목에 칼을 쓰고 캄캄한 흙바닥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승만은 1904년 8월 7일 사형수에서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6년 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바로 이 감옥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평생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게 되었고 독립의지를 더욱 굳건히 펼쳐 나가게 되었다.


3. 감옥에서의 신앙체험과 독립의 기반 확립

이승만의 옥중에서 모진 고문으로 늘어진 육체에 발이 묶여 있고, 목에는 칼이 씌어 있어서 서지도 눕지도 못하는 고통과 죽음의 위협 수감생활이었다. 칼을 쓰고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나?”였다. 사형수로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심각하게 직면해 온 것이다. 여기에서 배재학당 예배시간에 아펜젤러 목사의 설교가 생생하게 기억 속에 떠올라왔다.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지금이라도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기억 속에 살아 오르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때 처음으로 기도하였다. 목에 칼을 쓰고 “하나님이시여,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나의 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중에 그는 십자가 위에 고난 받으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위로와 용기, 힘을 받게 되었다. 이승만은 성경을 보기 원하였고, 선교사를 통해 신약성경이 주어졌으며, 아펜젤러와 벙커 선교사 등의 활동으로 성경책 뿐 아니라 기독교 서적, 교양서적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새벽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경 읽고 기도하며 마음에 평온을 찾았다. 한 사람은 망을 보게 하고 한 사람은 칼 위에 성경을 펼치게 하여 책장을 넘기며 소리 내어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이 일을 통해 감옥 생활에도 평온을 느끼게 되며 예배와 전도도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나는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을 알게 되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6년 동안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서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고 고백하였다.
이승만은 무기수로 종신형을 받고 이감 되어 수갑과 형틀에서 벗어나 잡범들과 함께 옥중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아펜젤러와 벙커 선교사 등의 협조와 간수장 김영선 씨와 차장 이충진 씨의 호의로 옥중문고를 설치하여 옥중 독서실을 운영하였고, 어린이반, 장년반으로 옥중학교로 감옥을 교육장으로 만들었으며,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드리는 옥중교회도 인도하였다. 옥중에서 미국의 ‘전망’(Outlook)지와 같은 잡지도 구독하여서 세계동향과 민권사상과 자유사상 등의 지식도 습득할 수 있게 되어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란 책도 저술하였다.
이승만은 당시의 신앙과 감옥 전도활동을 한국감리교회에서 발행된 한국최초 신학잡지인 ‘신학월보’(광무7년, 1899년 3월)에 하나님 은혜 감사하며 게재한 일도 있다. 그가 고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험한 옥중에서 이 험한 질곡을 격으며 무사히 부지하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하였을 바이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은 감화시키시는 힘을 나에게 주시지 아니하였다면 이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세상 죄인들을 감화시키시는 교가 아니면 불소한 재정(財政)으로 서적실을 졸지에 설치할 수 없을지라. 이것이 나의 이른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이니 이 깨달음과 감사함으로 나날이 힘쓰면 오늘 심는 겨자씨에서 가지가 생겨 공중에 나는 새가 깃들이게 될 줄 믿겠나이다.”
이승만의 신앙은 단순한 “머리의 신앙”이 아니요 뜨거운 “가슴의 신앙”이며, “체험적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얻은 신앙과 그 체험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또한 감옥에 오고 가는 많은 죄수들의 삶을 통해 서민, 민중의 삶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아펜젤러의 순직(1902년 6월 11일) 소식을 듣고 하루 반을 내리 울며 단식하였다.
또한 감옥에서 이상재 선생 등 독립 운동가들과 민족지도자들을 더 깊이 사귀게 되었고 이들도 대부분 출옥 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승만의 옥중생활은 번역과 저술, ‘제국신문’에 27개월 동안(1901-1903) 논설을 집필하는 등 왕성한 활동기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자주 독립정신을 돈독케 하고, 생명의 존귀함과 자유의 소중함을 절실히 체험하였으며, 서민 위주의 독립운동, 정치형태를 기본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3·1독립선언 보다 15년 앞서, 옥중에서 ‘독립정신’(1904년)을 탈고하였고, 미국에서 출판하였다.(1910년) 마지막 결론을 보면, 독립정신의 기반은,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 사람들 위하여 나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일 함에 있다”고 굳은 결단으로 마치고 있다.
즉, “저 순한 인민이 다 죄가 있어 멸망에 들어감이 어지신 하나님의 슬피 여기심이 않으리오. 이에 구원할 길을 열어 주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천도의 오묘한 이치를 들어내고 평생에 남의 곤욕과 곤란을 받다가 필경은 세상인민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샤 千萬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돌아와서 죄를 자복하고 다시는 악에 빠지지 말아서 용서를 얻고 복을 받게 하셨나니 순전히 사랑함이 아니면 어찌 남을 위하여 몸을 버리시기에 이르리오…이 은혜는 다른 것으로 값을 수 없고 다만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 사람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일할 뿐이라. 천하에 의롭고 사랑하고 어진 것이 이에 더 지난 것이 어디에 있으리오…지금 우리나라의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오고자 할진대 이 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요, 신학문을 힘써도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요, 외교를 힘써도 깊은 정의를 얻지 못할 것이요, 국가 권을 중히 여겨도 참  동등대 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요, 의리를 숭상하여도 한결 같을 수 없을 것이요, 자유 권리를 중히 하여도 평균한 방향을 알지 못할지니라.
우리는 마땅히 이 교로써 萬사에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게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같이 만납시다.”(건국 4237년 6월 29일. 독립정신 p234-235)


노종해 목사(CM리서치)


출처. 기독교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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