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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박사의 생애와 신앙(下)
작성일 : 2018/11/30 14:12 / 조회 : 15 / 추천 : 2


체험적 신앙습관, 기도와 성경읽기로 하루를 시작


4. 해외망명 독립운동과 그의 신앙

이승만은 1904년 8월에 출옥되었지만 민영익, 한규설의 계획에 의해, 한미수호조약 중 상호방위의 조문을 미국이 지켜 일본의 계책을 막아 주기를 청원하는 고종황제의 밀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는 임무를 받고 1904년 11월 4일 도미했다. 이때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유학생 신분의 비자를 받았으며, 미국 고관들과 상하의원들 및 유력한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지만 일본의 모략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체험한 이승만은 1905년 4월 25일 부활주일에 루이스 T, 햄린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죠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프린스톤 대학에서 국제정치 외교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10년) 이때 한국에서 YMCA학감으로 초청을 받아 귀국하여 전국 순회전도 집회로 강연하였으나 한일합방으로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일본 총독부가 기독교 민족 지도자들을 제거키 위해 음모를 조작하여 ‘105인 사건’을 날조하고 검거선풍을 일으킬 때임으로, 1912년 세계감리교 총회 대표로 미국으로 다시 출국하여 해외망명 독립투쟁활동이 시작 되었다.
이승만은 워싱턴 파운드리 감리교회의 등록 교인으로서 교회조직을 통하여 ‘외교를 통한 한국 독립운동’에 착수하였다. 특히 하와이 한인교포 지도들의 초청 받았고, 초교파 연합으로 호놀룰루에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직한다. 또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여 교육과 신앙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자주의식을 고취시키며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대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지들을 결합하여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착수하였다.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선 ‘한성임시정부’(4·23)가 조직 되어 이승만을 집정총재(대통령)로 선출하였고, 국외의 상해임시정부(4·11)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노령 임시정부(3·17) 등이 조직 되었다. 이들이 하나로 통합해 9월 6일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상해에 두어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집무실을 옮겨 미국정부로 하여금 한미상호 보호조약을 지켜 불법 점령한 일본의 강압 통치에서 한국을 독립하게 해달라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승만은 이미 국제동향을 예견하며, 1940년부터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영문으로 집필하여 1941년 초에 출판, 곧 매진되었다. 그는 일본침략 전쟁을 방지키 위해 일본을 제재해야 함을 주장하고, 한국 독립의 긴요성을 갈파하였으며, 그의 예견대로 일본은 결국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을 침략하였다.
이승만은 일제말기 태평양전쟁에는 한국도 참전하도록 특전용사를 훈련하여 대기하였으며, 일제와 러시아의 음흉한 계략을 지적하였으나, 미국은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을 항복시켰다. 소련을 참전시켜 한국독립을 미루고 배제한 채 남북분단 점령의 길에 들어섰다.


5. 해방 이후 건국, 정부수립과 그의 신앙생활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남북은 분단 점령 되어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군정이 3·8선을 경계로 분단하여 통치하였다. 소련은 이미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으며, 한국은 독립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
미 군정은 임정요인들과 이승만 등의 귀국을 미루어 오다가 10월 말 개인자격으로 입국케 하였다. 남한 미 군정은 치안대를 조직하여 부일협력자들로 활동케 하였고, 소련과 협력하는 정책으로 이승만을 경계하고 배제시키려 하였다.
이승만은 우후죽순으로 일어난 정당 사회단체들의 혼란 속에 공산화를 막고,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교묘하고 지리한 미·소 공동회의 정책 대립과 국내 좌우의 격렬한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미국은 1947년 9월 23일 한국문제를 유엔(UN) 총회에 상정해 한국독립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으며, 유엔 총회는 11월 14일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가결했다. 그러나 소련의 공산화 정책으로 북한이 참여하지 않아 UN 감시 속에 남한만의 총선이 실시되었고 유엔이 승인한 “한국의 유일한 정부”로 ‘대한민국’을 건국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의원 198명을 선출하고,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한다. 이 헌법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 되어, 국제연합(UN)이 승인한 “한국의 유일한 한국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켰으며, 초대 국무위원은 거국 내각 형식으로 출범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역사는 모두가 잘 아는 그대로다. 북한의 남침에 의한 한국전쟁이 있었고 이승만은 3선 개헌과 3·15부정 선거로 몰락의 길을 걸어 결국 4·19혁명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된다.
이승만의 일생은 이처럼 공과가 뚜렷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민족독립과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활은 아침기도와 성경읽기로 하루의 일을 시작하였다 한다. 이는 감옥에서 얻어진 체험적 신앙의 습관이었다. 식사기도는 “우리에게 주신 음식을 우리 동포들도 다 먹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았다. 어려운 일, 복잡한 일을 당할 때, 특히 6·25전쟁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 말하며 용기를 주었다 한다.
1950년 12월 25일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역전되고 난관에 처해 있을 때 이승만 박사 내외는 교회를 찾아 나왔다. 당시 상황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비망록에 쓰고 있다.
“성탄일을 맞아 우리는 예배드리러 상오 11시 정동교회로 갔다. 성탄절을 맞는 예배당 안이 아무런 장식도 없이 너무나 쓸쓸하고 황량하며 난로도 하나 없이 썰렁했다. 손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추운 이 넓은 예배당 안에는 손으로 꼽아 약 20명의 교인이 모여 있었는데 목회를 인도할 사람이 없어 평신도 중 한 사람이 예배순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신도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고 교인들이나 대통령은 함께 예배를 보게 되어 모두 기뻐하였다. 그 신도는 성경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봉독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울었다. 대통령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니 아무리 강한 적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기어이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했다. 이 예배는 지금껏 우리가 참석해 온 예배 중 가장 감명 깊게 우리 기억에 새겨질 감동적인 예배의 하나였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1·4후퇴 5일 전에도 아무도 없는 텅 빈 교회에 나와 기도하였다 한다.
이승만은 후일 4·19 당시에도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라 했고, 총에 맞아 부상당한 학생들을 병원으로 친히 방문하여 “내가 맞아야할 총을 학생들이 맞았다”고 비통해 했으며 3·15부정선거를 취소하고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대통령직 하야를 결정한 뒤에도 민간인의 신분으로는 관용차를 탈 수 없다며 경무대에서 이화장까지 걸어가려 한 일화를 보면 그의 성품 속에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1965년 7월 19일 별세한지 53년이 지난 오늘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재물을 모으지 않았던 이임을 밝혀졌는데 이 또한 기독교 신앙에서 온 생활 성품이 아니겠는가.
이승만 박사가 가장 가슴에 깊이 새기고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이다. 즐겨 부른 찬송은 494장,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와 387장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또한 335장 “십자가 군병들아”였다고 한다.
이승만 박사는 자신의 감옥 생활의 고통을 늘 기억하고 감옥 전도제도를 만들었고, 종군 전도제(군목제도)를 만들었다.


6. 맺는말: 역사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

이원순 선생은 이승만 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그의 전기를 마치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정의와 신의 동정(同情)을 깨닫고 기도 가운데서 위대한 힘의 원천을 발견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소리 내어 성서의 구절을 읽고는 부인과 함께 식탁에 앉곤 했다. 그가 가끔 혼자서 올리는 기도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보다도 그의 신앙이 더욱 굳건해지도록 채찍질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떠한 비평이나 비난을 받아도 자기의 정책을 경건한 기도 속에서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옳다고 깨달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갔다. 1945년 귀국 이래 그가 교회의 예배를 거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승만 박사는 한 시대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특히 해방 이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정세 속에서의 한국 국내 상황과 건국을 결별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아직도 남과 북은 분단되어 있고,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이란 과제를 안고 있는 이때에 이승만 박사는 오해와 비난, 친일파 옹호와 반공, 독재와 고집불통, 매국노와 역적이란 오명과 낙인으로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다.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가는 혼탁한 국내외 정세와 그 시대의 원초적인 사료와 증언, 다방면의 심층적 연구, 편향적이지 않은 객관적인 종합 분석연구와 재평가가 있어야할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생애는 우리에게 “신앙과 민족”에 대한 깊이 생각게 해주는 준거가 될 것이다. 신앙인의 오늘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굳세게 서서 자유를 지켜 나가는 신앙인, 민족의 과제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의 정의와 자유,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참여해 나가는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끝>


노종해 목사(CM리서치)


출처. 기독교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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