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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 1919년 임시정부 첫 대통령도 이승만이다!
작성일 : 2018/08/06 07:29 / 조회 : 38 / 추천 : 5


건국절 논란? 1919년 임시정부 첫 대통령도 이승만이다!


이승만 사업회 `건국 70주년 기념 전북 포럼`... " 1919년이든 1948년이든 `건국 대통령`은 이승만"



▲ 12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구에서 `사단법인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전북 포럼`이 열렸다. 신철식 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의 美특사 시절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뉴데일리

"하와이의 한 요양원, 이발비 5불 아끼던 백발의 노인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본관, 전북 전주(全州)시에서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강연이 열렸다.

12일 오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모처의 한 중식당에서 `사단법인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전북 지회가 출범식을 가진 것이다.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역사 바로 알기`를 주제로 신철식 기념사업회 회장이 연사를 맡았다. 강연은 크게 △이승만 박사 성장기 △청년기 및 유학기 △하와이 독립투쟁기 △임시 정부 활동기 △대통령 취임 후 등 5개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신철식 회장은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연고가 있던 부분도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가 너무나도 왜곡돼있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 회장은 "전세계 꼴등에 가깝던 국력의 우리가 60여년만에 세계 top 10안에 들게 됐다. 역사상 유례없는 기적 앞에 해외 경제발전사 연구자들은 `미스터리` 혹은 `이승만`, 이 단 두 마디로 표현한다. 단언컨대 청년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 몰락한 폐족 이승만, 고종의 美특사가 되다

1875년생 이승만 대통령은 태종 이방원의 맏아들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양녕대군은 왕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를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은 이방원의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이다. 

쫓겨난 왕족들에게 벼슬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승만 박사 집안은 대대로 빈민 생활을 면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박사는 한양 도동서당(현 남대문 힐튼호텔 일대)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지만 `폐족`이라는 이유로 번번히 과거시험에 낙방한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이승만 박사가 어떻게 미국 최고의 대학 전 과정을 단 5년 만에 수료할 수 있었을까. 그는 조지 워싱턴대를 2년 반만에, 하버드대 입학 및 프린스턴 대학 박사 과정을 3년만에 마친 것으로 유명하다.

신 회장은 "과거에서 수차례 떨어진 이승만 박사는 조선 최초 서양식 4년제 학교 배재학당에서 서양 문물을 접했고, 그것이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대한제국이 탄생하며 조선의 과거제도는 사라진다. 이승만 박사는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영어와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여기에 1896년 미국인 의사 신분으로 조선에 귀국한 서재필의 영향에 맞물려 이 박사는 언론인과 계몽운동가로서 활동,  `입헌군주제` 등을 공부하며 전제군주정에 도전했고 `역적 모의`로 감옥에 투옥되는 등 옥고를 치른다. 

신 회장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은 이승만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지만,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로 특사 파견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남아 `대한제국 외교 특사` 신분으로 조선에서 공부했던 학점을 인정받아 학업을 이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박사는 5년의 유학생활 동안 170여회의 조선독립 강연도 병행했다.

신철식 회장은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날, 조선은 나라를 빼앗긴다"며 "서른살의 프린스턴대 박사에겐 미국에 남아 개인 영달을 챙길 기회가 있었으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계몽운동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이승만 박사는 1919년 9월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된다. 사진은 1920년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 상해를 찾아 임시정부 요원들과 환영식을 가지는 모습.ⓒ네이버 블로그 화면 캡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프린스턴 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박사는 일제식민지가 된 조선으로 돌아와 YMCA 활동으로 학생 계몽 운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곧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으로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그는 하와이로 망명해 1919년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당시 조선 문맹률은 81%, 하와이에서 교육, 언론, 종교, 저술 활동을 이어가던 이승만 박사는 1919년 3.1절 운동 직후 생겨난 중국 내 6곳 임시 정부에 통치자로 소속됐다. 그리고 그 해 9월 통합 임시 정부에서 공식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흔히들 평화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리는 간디 운동보다 앞선 것이 3.1운동이다. 당시 우리 국민 1,729만명 중 체포된 사람만 83만에 달하는데 이는 전세계 역사연구가들이 재평가중인 계몽운동사이다."

신철식 회장에 따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로 향한다. 당시 일본은 이승만의 목숨에 당시로선 엄청난 금액인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이 대통령은 관에 담긴 중국인 시체로 위장해 석달 만에 중국 상해로 밀입국한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으로 뭉쳤던 임시정부도 곧 분열되기 시작한다. 노선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 당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성공으로 대륙에서 공산주의가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상해 임시정부 역시 민주주의-공산주의를 놓고, 외교투쟁-무장투쟁 사이에서 끝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신철식 회장은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만큼은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논설에서도 이 박사는 공산당의 헛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했다.

"20세기 초반 일본이 전세계 3대 강국 중 하나였다는 점, 8천만의 국민 중 700만의 군인이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이승만 박사는 당시 무장투쟁으로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유아적 발상으로 봤다. 조선광복군이 가장 번성했을 때가 4,600여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며 조선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국내로 귀국한다. 당시 임시정부 주석을 맡고 있던 인물은 김구. 이로 인해 `임시정부 수장=김구`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신 회장은 이 점 역시 지적했다. 최근 불거지는 `1919 대 1948` 건국설이 안고 있는 오류를 꼬집는 대목이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무장투쟁 중요성을 강조했던 인물은 김구 선생으로 그는 1921년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임정에 합류하기 전인 1919년 9월 이미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맡고 있었다." 

▲ 1941년 발간한 이승만 박사의 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네이버 블로그 화면 캡처

△일본과 소련 꿰뚫어본 이승만, 미국 여론을 쥐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외교투쟁론은 어떻게 빛을 발했을까. 신 회장은 "일제와 소련의 야욕을 뚫어본 이승만 박사가 미국 및 세계 지도층의 여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이승만 박사는 1941년 일본의 역사 및 종교, 습성 등을 분석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발간해 일본의 미국 공격이 임박했음을 주장했다. 

"일본은 1910년 한국, 1932년 만주, 1936년 중국 본토를 삼켰다. 오늘날 대동아공영 기치를 내걸어 동남아 일대를 일제히 침략하고 있다. 일본의 다음 타겟은 미국, 장소는 알래스카 아니면 하와이가 될 것이다."    -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중

실제로 저서 발간 5개월 후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이승만 박사의 예상 적중에 따라 미국 조야는 발칵 뒤집히고 美지도층 내에는 한국 독립에 우호적 여론이 형성된다. 결국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조선 독립을 약속했다.

신철식 회장은 "우리는 이 덕분에 적성국 명단에서 제외됐고, 미국의 신설 첩보기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CIA의 전신)에 미국 한인 유학생 20명이 채용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2차대전 후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거론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외교 덕분"이라며 "특히 당시 미국이 소련을 연합군이라 생각해 좌우합작 정부를 종용한 것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거세게 저항, 미국으로 건너가 `공산국가 소련의 실체`를 밝히는 노력을 이어간다"고 했다.

신 회장의 설명처럼 소련은 2차 대전 종료 후 동유럽 및 동아시아 지역 국가를 대상으로 계획적인 공산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승만 박사의 주장처럼 소련의 야욕이 현실화되자 미국은 1947년 3월 노선을 대(對)소 강경정책으로 전환한다. `트루먼 독트린`이다. 

`공산주의 확대 저지`를 선언한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소 냉전이 본격화된 후 한반도 문제는 UN으로 이관된다. 38선 이남에는 남한총선거 실시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UN의 공식 승인을 얻어낸다. 
▲ 신철식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뉴데일리DB
△농지개혁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다
신철식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 후 5가지 공으로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 도입 △농지개혁 △교육개혁 △한미동맹 △경제부흥 기반 구축을 들었다. 

그는 "전세계 여성 참정권이 정리되기 한참 이전인 1948년 남한은 최초 보통선거를 실시해 5천만 년 한반도의 첫 국민 주권행사를 이뤄냈다"며 "이는 프랑스(1946), 스위스(1971)보다도 앞선다"고 했다.

농지개혁과 관련해서는 "당시 국회의원 전원이 반대했다. 내전에 가까운 저항을 뚫고 이승만 대통령은 농민들과 손을 잡아 결국 농지개혁을 단행, 농민들에게 토지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강조했다. 

당시 전 국민 90% 이상은 농민이었고 그 중 96%가 소작농이었다. 아무리 국회의원들이 지주계층이라 할지언정, 이미 참정권을 지니고 있던 농민, 즉 국민 대다수에 함부로 등질 수 없던 이유다.

농지개혁법이 공포된 후 세 달 뒤 북한은 기습적으로 6.25 남침을 강행한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걱정말라. 남침 후 3일만에 남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우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일성의 예상은 빗나갔다. 한국 내 농민들의 동요는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6.25 발발 직전 5월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배포했기 때문인데 이는 결국 농지개혁이 공산화를 막아낸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증명한 셈이다.

이외에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에도 주력한다. 1949년 6년제 의무교육제를 도입해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직후 19개교(8천여명)에 불과했던 대학은 1960년 63개교(10만여명)를 넘어선다. 2만 여명의 해외 유학생도 파견했다. 그 결과 1945년 78%에 달했던 문맹률은 1959년 22%로 떨어진다.

신철식 회장은 농지개혁 외 한미상호방위 조약을 두고도 "대단한 외교와 협상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당시 3년간 지속된 6.25로 미군은 5만명의 사망자와 10만명의 부상자를 냈다. 트루먼 美대통령의 인기는 급락했고 "한국전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쟁이 진행중인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위기가 닥친 것이다.

북진 통일론을 고집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게 피곤한 존재였다. 미국은 1953년 휴전협정을 맺고 철수 시도를 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한 방어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한다. 기습조치로 휴전이 지연되자 미국은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대로 1953년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조인한다. 

신철식 회장은 "이로 인해 대한민국이 20개 사단, 60만 병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며 "한미상호방위 조약이 없었다면 전쟁위험 때문에 누가 한국에 자본을 투자하겠나. 이것이 최약소국 한국 대통령이 미국 뉴욕시 브로드웨이 카퍼레이드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평했다.


△감성적 민족주의는 자살골

신철식 회장은 "4.19를 명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당시 3.15 부정선거가 대통령이 아닌 부통령 선거였다는 점이다. 당시 이 대통령의 나이는 86세였다.

신 회장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단일 후보였고 부정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라며 "관리 차원의 책임은 당연할 수 있지만, 일각에서 비난하는 `이승만 부정선거` 프레임은 사실관계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스스로 하야한다. 4.19 이후 혼란 속에서 건국 대통령 내외는 결국 하와이 망명을 떠나게 되고 현지에서 이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만 9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신 회장은 "이 대통령에는 독재자의 공통 특성이 단 하나도 없다"며 "광화문 운구행렬을 보고도 그를 단순 독재자라고 치부할 수 있나. 공과(功過)를 공평히 평가해야한다. 세상에 그 어떤 나라도 건국 대통령을 이토록 왜곡하진 않는다"고 호소했다.

그는 오늘날 이념대립 현상을 두고는 "이념대결은 이미 지난 100년 간의 전쟁에서 끝난 것"이라며 "철 지난 이념 논쟁을 불러들고와서 민족을 운운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며 민족은 결코 국가를 앞설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강대한 소련 연방이 무너지며 자유민주 시장경제 미국은 세계최대 강국이 됐다는 점, 공산과 자유 대립 결과가 불러온 오늘날 한반도 남북 현 주소를 꼬집은 대목이다. 

"미국이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민족을 초월해서 이민자를 받고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나라의 문제에 있어서는 민족보다 이념이 우선이라는 점을 전세계가 증명했다. 세계경제대국 독일도 통일 후 20년을 허덕였다. 통일 비용, 체제전환비용 등의 현실을 덮어놓고 민족만 운운하는 것은 자살골을 넣는 행위다" 

끝으로 신 회장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국제정세를 짚었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이해를 높이다 보면 오늘날의 문제 해결이 보일 것"이라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의 기적같았던 건국이 자긍심이 되는, 또 그런 건강한 정신을 심을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당부했다.


출처. 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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