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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
작성일 : 2008/02/04 23:53 / 조회 :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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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

 

차 상 철 (충남대 사학과 교수)

 

 

1. ‘외교가’ 이승만의 등장과 성장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은 분명 한국현대사의 거목(巨木)이다. 모든 나무가 거목이 될 수 없듯이,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역사적’ 인물이 될 수는 없다. 탁월한 지도자는 대체로 일생을 바쳐도 좋을만한 뚜렷한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투철한 신념과 사명감을 지니고, 닥쳐올 미래의 주역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자신을 철저하게 준비시키고, 관리해 온 인물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승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 확장을 위한 각축장이었다.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에서의 중국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는 한국의 독립 보전(保全)과 정치적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곧이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반도를 에워싼 동북아시아의 급변하는 정세는 청년 이승만으로 하여금 ‘역사적’ 인물의 길을 걷게 만든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20세(1895)가 되던 해,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특별히 그의 영어실력은 뛰어났다. 22세(1898)에 배재학당 을 졸업할 때, 이승만은 영어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배재학당은 “유생(儒生) 이승만을 서구지향의 근대적 개혁가-혁명아로 개조시켜 놓은 용광로”였다. 1899년 1월 이승만은 고종(高宗)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혁신정부를 수립하여,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한성감옥(漢城監獄)에 투옥되어 5년 7개월이라는 짧지 않는 옥살이를 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감옥생활은 시련과 좌절의 세월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적’ 인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소양을 축적하는 소중한 기회로 이용되었다.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 보전과 각종 개혁방안을 모색하면서, 미국․일본․중국․러시아의 역사와 법률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국제관계와 외교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컸다. 1904년 8월 특사(特赦)로 한성감옥에서 석방될 당시 29세의 청년 이승만은 이미 개화기(開化期) 한국의 ‘최고’의 지식인 중의 한사람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승만은 11월 초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 휘말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운명이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롭던 시점에 그가 한국의 독립보존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05년 8월 4일 ‘영어 잘하는’ 이승만은 시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면담했다. 이승만은 루스벨트에게 1882년에 체결한 ‘한미약조’에 따라 미국이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는 이승만의 청원이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외교통로를 통해 미국정부에 제출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루스벨트의 답변은 의례적인 ‘레토릭’(rhetoric)의 수준을 넘어선 ‘기만’(欺瞞)행위였다. 이승만의 루스벨트 면담은 불행하게도 때늦은, 그리고 불필요한, 만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루스벨트를 만나기 불과 며칠 전인 7월 31일,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일본 수상 카츠라 타로(桂太郞)은 미국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인정해준 소위 ‘태프트-카츠라’ 밀약(密約)을 이미 체결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은 이 ‘밀약’의 존재와 내용을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1924년 ‘밀약’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이승만이 받았을 엄청난 충격과 허탈감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외교’의 행태와 실상을 이승만은 온몸으로 체험했고, 나아가 그것은 ‘역사적’ 인물로 성장해 간 이승만에게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1905년 ‘불쌍한’ 처지에 놓인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배신행위’를 이승만은 평생동안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후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신생독립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담보하기 위한 최선의 현실적인 처방책인 ‘한미군사동맹’의 체결을 위한 험난했던 대미(對美) 협상과정에서, 반세기 전의 미국의 ‘배신’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집요하게 강요했고, 끝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데 성공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성공’은 치열했던 냉전의 시기에 누구보다도 미국의 생리와 처지를 꿰뚫고 있었던 1급의 ‘미국전문가’인 ‘외교가’ 이승만의 탁월한 협상능력의 산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약 5년 반 동안의 미국 유학과 33년 간의 미국 망명생활은 이승만을 당대 최고의 ‘미국전문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The George Washington Universuty)에서 2년 반 동안 수학하고, 1907년 만 32세의 나이에 학사학위를 획득했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위치한 대학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는 미국정치의 ‘내막’을 읽을 수 있는 ‘안목’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하바드(Havard)대와 프린스턴(Princeton)대에서 2년 반 동안 수학하면서, 각각 석사와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그는 국제법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미국역사와 철학사를 선택했다.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었다. 이 논문은 1912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될 정도로 우수한 학문적 평가를 받은 연구였다. 미국 유학생활은 결국 이승만으로 하여금 서양의 역사, 특히 미국사와 정치학․철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학문적 기반 위에 국제법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정치학자’로 만들었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이승만 박사는 빼앗긴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기를 주문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역할을 스스로도 자임하고 나섰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이승만은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1919)되어, 한국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했고, 한성정부(韓城政府)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의 권한으로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설치(1919)했으며, ‘워싱턴 군비축소회의’(The Washington Naval Disarmament Conference[1921. 11. 12-1922. 2. 6], 일명: 태평양 군축회의)와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파견될 한국대표단 전권대사로 각각 임명(1921, 1932)되었고, 중경(重慶) 임정으로부터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대미외교의 전권을 위임(1941)받았다.

 

이승만은 임정의 대표성을 지니는 화려한 직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을 얻기 위한 그의 외교적 노력은 궁극적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워싱턴 군축회의’가 개막되기 직전, 이승만 전권대사는 워렌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 대통령에게 한국 대표단의 회의 참가 허용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보냈지만, 미국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과 주장을 고려해야만 하는 미국으로서는 ‘무반응’과 ‘무시’가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워싱턴회의’ 참가 실패가 일차적으로 한국대표단의 준비부족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설령 철저히 사전 준비를 했더라도, 임정을 승인하지 않고 있는 미국의 정책 때문에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행정부를 상대로 임정을 승인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임정’이 한국민의 대표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실제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안하여 조셉 스탈린(Joseph V. Stalin)과 윈스턴 처칠(Winston S. Churchill)이 동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의 전후(戰後) 실시 방침을 미국이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에 대한 승인 획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었던 기나긴 세월 동안 한국의 조속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이승만의 분주했던 외교행각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회한(悔恨)의 여정(旅程)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로서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이승만에게 있어서, 거듭된 실패와 좌절도 내일의 성공과 재기(再起)를 위한 거름과 보약(補藥)으로 작용되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대미외교 실패는 ‘대통령’ 이승만의 대미외교 성공을 위한 소중한 교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해방된 조국은 국내외에서 명망이 높은 이승만의 조기 귀국을 재촉했고, 그 또한 조국의 부름에 한 걸음으로 달려가 건국의 주역으로서의 막중한 사명을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의지도 강렬했을 것이다. 멀고도 먼 이국(異國) 땅에서 길고도 긴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운 고국 땅으로 돌아오는 고희(古稀)의 노정객(老政客) 이승만의 귀국 길에도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1945년 10월 16일. 마침내 이승만은 한국을 떠난 지 33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한반도가 38선에 의해 분단되고, 남북한이 미국과 소련의 군대에 의해 분할 점령되고 있으며, 게다가 좌익과 우익의 적대적인 이념대결로 동족간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조국의 불행한 현실은 하루속히 군정(軍政)을 종식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철저한 ‘반공․반소’주의자 이승만의 의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태어날 신생 독립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커다란 야망을 품어온 이승만은 맹목적인 ‘친미’(親美)주의자는 결코 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미국 유학과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저질렀던 ‘배신행위’와 ‘기만’ 그리고 ‘무관심’으로 이승만이 겪어야만 했던 쓰라린 경험들은 그로 하여금 맹목적 ‘친미’주의자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와 외교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철저한 ‘지미’(知美)주의자로 만들었다. 나아가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처럼 자행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이승만은 초강대국인 미국이 지닌 힘과 영향력의 위력을 너무나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생존의 확보를 위해 미국을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굳게 믿었던 철저한 ‘용미’(用美)주의자였다.

 

군정(1945-1948)이 실시된 3년 동안 ‘한반도 신탁통치안’과 ‘단독정부 수립안’을 둘러싸고, 이승만은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존 하지(John Reed Hodge) 남한주둔 미 점령군 사령관뿐만 아니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와 심각한 마찰과 갈등을 빚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주장대로, 비록 분단국가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신생독립 주권국가로서 ‘대한민국’은 탄생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드디어 이승만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국가 최고 지도자라는 막중한 자리인 대통령에 취임했다. 적대적인 이념대결로 치열했던 냉전의 시대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국가안보를 책임져야만 하는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의 ‘생존확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가치’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국의 생존과 안보는 ‘좋으나, 싫으나’ 미국의 의지와 정책에 달려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준비된’ 수완과 능력은 신생국 한국외교가 집중할 수밖에 없는 대미외교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2. 이승만의 대미․대일 인식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의 반공사상은 해방 후 미 군정 시기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좌우익의 이념투쟁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수십 년에 걸친 망명생활 동안 반러․반소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소련의 팽창주의와 결탁된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고 말하면서, “콜레라와의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46년 6월 3일 소위 ‘정읍(井邑) 발언’에서 야기된 이승만의 남한단독 정부수립론 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고도의 정치적 승부수였다는 점도 물론 고려해야 되겠지만,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우려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현실주의적인 국제정치적 감각과 인식이 초래한 차선책이었을 것이란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승만은 소련의 지배 하에 북한의 공산화가 기정사실화 되어 가는 엄연한 현실에서, 통일민족국가 건설론은 민족적 당위론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주장이라고 믿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장에서 행한 그의 연설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는 건국의 기초 조건으로서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를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승만의 반공사상이 반러․반소주의적 인식에 근거했다면, 그의 미국인식도 오랜 세월에 걸친 망명생활을 통하여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주의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결과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맹목적인 친미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휴전협정의 체결을 눈앞에 두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은 자신의 일기에 이승만의 성향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승만]이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나아가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들을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기 위해 시도하

는 것은 불가능하다. . . . 이[승만]은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

에 들지 않는 동맹자(an unsatisfactory ally)였기 때문에 그

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

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성사를 위한 험난한 협상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한미관계의 역사에서 미국이 저질렀던 ‘커다란 실책’(blunder)과 ‘배신행위’(betrayal)를 아이젠하워와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을 비롯한 고위 정책 수립가들에게 자주 상기시켰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하루 전날인 1953년 7월 26일 덜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당신이 알다시피, 과거 우리들[한국과 미국]의 상호관계에서 심각하고도 불행한 오점은 나의 정부가 우리[한국]의 지위와 장래에 관하여 한번도 사전협의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들을 방위조약의 체결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한한 월터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극동문제담당 국무차관보에게 분명하게 제시했다.

 

미국에 대한 우리[한국]의 확고부동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우리

는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과 1945년 한반도의 양분(bisection)

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두 번씩이나 [미국에 의하여] 배신당

했다. 지금의 사태진전은 또 다른 배신(sellout)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의 정치적 해결에 극렬하게 반발했다. 한반도의 재분단을 의미하는 휴전(休戰)을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영장’(the death warrant of Korea)이라고 규정한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에게 한국이 휴전협정을 수락하는 것은 마치 ‘아무런 항의도 없이 사형선고’(a death sentence without protest)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휴전의 성립을 끝까지 막을 수만은 없다는 현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진 대통령 이승만은 휴전 이후의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친일적인’ 미국으로부터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식문서 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 최선의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믿었다.

 

이승만의 그와 같은 현실적이고, 확실한 처방책은 이미 오래 전에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제시된 바 있었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던 1952년 3월 초, 그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과 미국이 ‘상호방위조약’(a mutual security pact)을 체결하는 것만이 한국민이 휴전을 수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만약 그러한 안보조약이 없으면 미국은 한국을 ‘포기’할 것이라는 불안이 한국인들 사이에 만연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8월 초 이승만은 방한 중이던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우리[한국] 민족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그것[한미상호방위조약]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고,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미국은 한국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임을 솔직하게 토로하기도 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철저한 ‘지미’․‘용미’주의자였다. 동시에 그는 철저한 ‘반일’(反日)주의자이기도 했다. 이승만이 미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속한 체결을 집요하게 요구한 배경에는 단순히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뿐만 아니라 팽창주의적인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에 대한 그의 심각한 경계와 우려가 항상 깔려 있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2년 동안 항상 일본의 한반도 침략 가능성을 심히 우려했다. 반(半)세기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를 통하여 드러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일본이 패전한 이후에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더욱이 이승만은 패전국 일본에 대한 대규모의 경제원조를 제공하여 일본의 안정과 번영을 달성하겠다는 미국의 일본재건정책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편파적인 친일정책은 전통적인 일본의 팽창주의의 부활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도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1949년 12월 이승만은 주미한국대사인 장면(張勉)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미국은 ‘태프트-카츠라 밀약’과 일본의 한국합병에서 보았듯이 또다시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만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서 과거 일본의 ‘오래된 야심’(age-long ambition)이 재발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이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52년 10월 초 이승만은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미국이 오스트랠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일본과는 동맹조약이나 안보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왜 유독 한국과는 그러한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트루먼 행정부 내의 친일인사들은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분히 재무장되면 “한국은 일본에게 또다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노골적으로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1954년 3월 초 양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이승만은 미국이 언젠가는 일본을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같은 해 4월과 11월에 이승만은 한표욱(韓豹頊) 주미공사에게도 “덜레스는 일본을 증강시키기로 작심한 인물”이며, “덜레스는 일본 때문에 우리[한국]의 군대를 증강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의 전통적인 팽창주의적 야욕과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리차드 닉슨(Richard M. Nixon)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 1953년 11월 중순 방한한 닉슨에게 이승만은 아시아인들은 소련과 일본의 결탁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너무 강하게’ 만들지 말 것을 주문했다.

 

1954년 2월 초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일본을 군사․경제적으로 ‘재건’(rebuilding)시킨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 후, 미국은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충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대신 오히려 일본 편만을 들어 왔다고 주장했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이승만의 항의와 비판은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정당하고도, 동등한 기준’에 따라 대우하고 있지 않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한국]가 미국과의 협력을 계속하다간 우리도 또 다른 중국(another China)이 되던가,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40년 전 한국의 모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적들 [공산측과 일본]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 팔려질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오히려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이승만의 ‘미국불신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일본경계론’도 단순히 한국인의 배타적인 반일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친일적’인 미국의 엄청난 경제․군사적 지원을 통하여 ‘재건된’ 일본이 또다시 한반도에 대한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미국에게 그토록 줄기차게, 그리고 강력하게 요구했던 배경에는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과 침략에 대한 사전봉쇄와 신속한 대응이 신생국 대한민국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위협 못지 않게 이승만에게 크게 작용한 또 다른 요소는 일본 팽창주의의 위협에 대한 자신의 현실적 인식이었다. 외교정책의 유일한 결정권자인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일본 팽창주의의 위협이라는 두 가지 위협으로부터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안보를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기 하루 전인 1953년 6월17일 이승만은 엘리스 브릭스(Ellis O. Briggs) 주한미국대사와의 회담에서, 방위조약 체결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한국은 오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방위조약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

기 위하여 그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궁극적인 지배라는 야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

 

 

3. 이승만과 한미동맹

 

외교란 한 국가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공식․비공식적 행위이며, 외교정책은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외교적 행위는 주워진 현실적 여건과 상황을 치밀하게 분석․검토하여 최대한의 실리를 확보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외교정책의 가변성과 상대성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현실 환경을 철저하고, 냉철하게 고려 내지 이용하는 바탕 위에서 실리를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반소․반공의 보루’(堡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건국 초기부터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절실히 원했다. 이승만은 분단된 한반도에 두 개의 적대적인 정권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약소국이 가장 확실하게 생존과 안보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초강대국인 미국과 법적․도덕적 의무를 지는 ‘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의 ‘간절한’ 희망을 외면했다. 오히려 트루먼 행정부는 불과 수백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둔 채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미국은 대규모의 전투병력을 파병했고, 뒤이어 있은 중국의 군사적 개입은 결국 트루먼 행정부로 하여금 전쟁을 군사적 승리가 아닌 정치적 해결로 종식시킨다는 정책결정을 내렸다.

 

북진무력통일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이승만은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하는 ‘휴전’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의 ‘결사적인’ 휴전반대는 메아리 없는 고독한 외침일 뿐 미국의 의지나 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트루먼 행정부도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환상’이라고 일축했다. ‘휴전’을 끝까지 막을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을 이승만도 물론 인정했고,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진통일과 휴전반대를 위한 범국민적 운동을 더욱 거세게 밀고 나갔다. 나아가 이승만은 만약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중국군대가 압록강 이남에 계속 주둔한다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회수하여,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도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자신의 결의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통고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행동과 ‘협박’은 모두 휴전 이후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담보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현실적인 처방책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휴전이 성립되기 전에 미국이 조속히 수용하라는 압력이었고, 또한 ‘계산된’ 전략이기도 했다. 물론 미국도 이승만의 의중을 잘 읽고 있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에 여전히 소극적 반응을 보였다.

 

이에 이승만은 반공포로에 대한 일방적인 석방을 암시했고, 만약 미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내일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위협하면서, 한국은 그렇게 되더라도 ‘독자적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발언을 ‘허세’(bluff)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요구를 무조건 무시할 수 없다는 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이처럼 중대한 시기에 한미간의 ‘이별’를 생각하는 자체가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에 두 나라는 반드시 단결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젠하워의 이승만 ‘달래기’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의 ‘비극적인 이별’을 강제적으로라도 막기 위해 이승만은 최후의 수단으로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953년 6월 18일 그는 반공포로들을 직권으로 석방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휴전협정의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이러한 결단은 미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재촉하는 이승만의 유일한 승부수로서의 ‘벼랑끝’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벼랑끝’ 전략은 결코 ‘이판새판’식의 무모한 전략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주워진 상황과 상대의 의중을 냉정하게 고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과감한’ 행동을 ‘약속파괴’라고 비난했고, 덜레스 국무장관도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은 ‘끔직한 재앙’만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승만을 ‘제거’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승만의 승부수는 휴전협정을 하루라도 빨리 체결하기를 원하는 미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수용을 현실적으로 강요했다. 이승만의 일격(一擊)은 미국의 최대 약점을 노린 결정타로 작용했다. 그가 동원한 ‘벼랑끝’ 전략이 유효할 수 있었던 요인도 거기에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이승만을 상대했던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는 “그[이승만]는 우리[미국]를 궁지로 몰아 넣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후일 술회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조치 직후 아이젠하워는 각료회의에서,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절대 퇴장해서는 안되며,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결코 방치해서도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는 서로 심히 갈등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몹시 필요로 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의 정치적 해결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의 협조가 절실했고, 반면에 이승만은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미국의 공식적 약속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간의 갈등과 대치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타협점이자, 처방책이었다. 그들은 로버트슨 특사를 매개로 하여 상호타협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개시했다. 철저한 ‘지미’(知美)․‘용미’(用美)주의자인 이승만의 승부수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조약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체결의 시기였다. 대미협상에 임하는 이승만의 결의와 전략도 당연히 치밀할 수밖에 없었다.

 

로버트슨은 1953년 6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서울에 체류했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노련한 정치인을 상대해야만 하는 로버트슨의 심리적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이 수십 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통해 미국정치의 생리에 누구보다도 정통한 ‘미국 전문가’이며, 동시에 ‘유별나게 영리한’(remarkably astute)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과의 회담을 통하여 로버트슨은 이승만이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shrewd, resourceful) 인물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로버트슨과의 회담에서, 이승만은 상호방위조약의 ‘즉각적인’ 체결과 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의 증강을 요구했고, 또한 군사적 승리만이 한국이 ‘제2의 중국’(a second China)이 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에 대해 로버트슨은 미국은 군사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통일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상호방위조약도 한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아가 아이젠하워는 한국이 휴전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은 군사․경제적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승만의 고집을 꺾기 위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서, 그 고집은 ‘국가적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로버트슨은 이승만에게 한미 양국이 상호협력의 길로 나갈 것인 가,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인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당신[이승만]에게 달려 있다”고 전제한 후, 만약 한국문제로부터 미국이 손을 떼기를 원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로버트슨은 자신의 말이 결코 ‘위압’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최후통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한 한국은 생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 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약속도 ‘구두약속’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만약 상원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확실한 보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최소한 ‘일본 내와 그 부근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한 미일안보조약과 같은 조약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반면에 미국은 무엇보다도 한국이 ‘성급한’ 모험을 결코 시도하지 않는 ‘신뢰할 수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이승만이 보장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밀고 당기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마침내 미국은 이승만으로부터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반면에,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한국 내와 그 부근에’ 미군의 주둔 약속과 ‘신속한’ 비준 약속을 받아 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정부의 불참 속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곧이어 8월 8일 서울에서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그리고 10월 1일 양국 대표는 워싱턴에서 이 조약에 공식적으로 조인했고, 1954년 1월 15일 한국 국회가, 1월 26일 미국 상원이 비준하여, 11월 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한국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위협을 봉쇄함과 동시에 이승만의 단독 북진무력 통일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봉쇄(dual containment)의 효과를 기대했으며, 반면에 이승만은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지닌 법적 장치를 확보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가 보장되기를 기대했다.

 

미국은 휴전의 성립으로 한국전쟁이 종식되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서 휴전은 다만 전쟁행위의 일시적 중단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북진무력 통일론을 계속 주창해 갔다. 휴전 이후의 한미관계도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휴전의 대가로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만으로 한국의 안보가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한국군의 증강과 현대화가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의 군사적 단독행위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그의 요구에 냉담했다. 오히려 그에게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강력히 주문하고 나섰다. 미국의 주문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도 냉담했다. 오히려 그는 미국의 지나친 친일정책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54년 12월 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이 궁극적으로 아시아 전체에 미칠 심각한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은 공산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일본의 위협도 받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아시아의 안정과 반공태세의 확립에 기여하고, 나아가 상호 우호관계의 증진을 위하여 한․미․일 3국이 ‘불가침조약’(non-aggression pact)을 먼저 체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제안’은 말 그대로 제안으로 끝났다. 물론 미국의 중재에 의한 한일 간의 정상화에도 진전이 없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상대로 한 이승만의 ‘일본경계론’은 더욱 강화되었다.

 

휴전 이후 한미간의 또 다른 중요한 현안인 한국군의 규모와 현대화 문제에 대해서도 이승만과 아이젠하워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미국은 이승만이 전쟁의 재개(再開)를 위한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고 해도, 결코 가담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군사적 단독행위라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지도 모르는 이승만의 한국군 증강 요구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아이젠하워는 1953년 11월 한국을 방문하는 닉슨 부통령을 통하여 이승만에게, 미국이 휴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전쟁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며, 만약 한국이 단독으로 북한을 공격할 경우 한국군은 ‘참담한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아이젠하워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속한 비준과 한국에 대한 군사․경제원조 법안의 의회통과를 위해서라도 단독 군사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이승만의 ‘분명한’ 확답을 촉구했다.

 

수세에 몰린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만약 모든 일이 한국민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전개될 경우에는 ‘일방적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럴 경우 미국에 ‘사전통보’를 하겠다고 말하면서 한발 물러섰다. 이승만의 ‘단독북진’ 위협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반대는 이승만의 ‘사전통보’라는 전략적 후퇴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이 자신의 ‘북진무력통일론’을 포기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의 ‘북진통일론’은 실천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한국의 대미협상과 미국의 대공산권 협상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전략’인 측면이 강했다. 이승만은 서울에 온 닉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단독행동에 관한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

이었다. . . .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

하는 순간에 당신은 당신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과

연]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20여년이 지난 후에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닉슨은 ‘외교가’ 이승만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할 때,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것

(being unpredictable)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에 대

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에도 내가 여행을 하면 할수록. . .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을 어떻게 상대하고, 효과적으로 제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승만의 ‘강의’는 야심에 찬 40세의 젊은 정치가 닉슨 부통령의 뇌리에 일생동안 영원히 잊지 못할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실제로 닉슨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에 저명한 언론이었던 톰 위커(Tom Wicker)가 명명한 소위 외교정책의 ‘불확실성의 원칙’(principle of uncertainty)이 지닌 효율성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기도 했다.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를 다룰 제네바 회의(Geneva Conference)가 개최되기 직전인 1954년 4월 닉슨은 미국 기자들에게 이승만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음모자(conspirator)인 동시에 미국의 지원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아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지닌 복잡한(complex) 인물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행동을 두려워하는 한, 그들은 제네바 회의의 [협상] 테이블에서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53년 12월 하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의 ‘사전통보’ 약속과 이승만이 무모한 일방적인 행동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닉슨의 견해에 따라 주한미군 2개 사단의 조기철수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미국에게 한국군의 대폭적인 강화를 요구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친일’적인 미국이 ‘언젠가 적당한 때’가 오기만 하면, 일본의 이익을 위하여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고 여전히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승만의 ‘즉각적인’ 군사력 증강요구는 3월 28일로 예정되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미국이 연기함으로서 법적 효력발생을 지연시킨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954년 6월 제네바 회의가 이승만의 예상대로 실패로 끝나자, 그는 휴전협정의 무효화와 전쟁의 재개를 통한 북진무력 통일론을 또 다시 들고 나왔다. 이는 한국군의 대폭강화를 위해 미국의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계산된 ‘레토릭’인 측면이 강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단념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고, 반면에 이승만은 한국의 안보를 자체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한미간의 현안이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된 이승만의 미국방문 기간 동안에 집중 논의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다루기 힘든 까다로운 협상의 상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였기 때문에 그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만나기 직전에 측근인 제임스 해거티(James C. Hagerty) 공보비서에게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나는 그 노인[이승만]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통일시키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

여 그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허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완고한 노인이

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언제까지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을지의

여부를 알지 못한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또 다시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이승만은 전쟁의 재개를 통한 한반도의 통일을 주장했고,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한국을 포함한 분단국가들의 통일을 위하여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고의적인 전쟁재개는 미소간의 핵전쟁으로 이어지며, 그 결과는 인류문명 전체를 파괴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북진통일의지를 결국 단념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착잡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요즘 나는 행동의 자유가 전혀 없는 우리 안에 갇힌 곰과 같은 신세이다.” 비록 가련한 곰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도 포효하는 ‘자유’는 있었다.

7월 28일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승만은 제네바 회의가 실패했기 때문에 휴전의 종결을 선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한국군과 대만군, 그리고 미국의 해군과 공군을 동원한 연합공격으로 중공군을 격퇴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한반도의 통일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충격적인 연설은 오히려 미국의 여론을 악화시켰다. 이승만도 그 연설이 자신의 생애에서 행한 ‘최악의 실수’(the worst mistake)라고 후회했다. 여론에 민감한 미국정치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미국전문가’ 이승만의 뼈아픈 실책이요, 악수(惡手)였다.

 

이승만의 미국방문으로 한미간의 현안이 해결되지는 못했다. 이승만은 15개 전투사단의 신설을 포함한 한국군의 증강과 현대화를 계속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이 타결되어, 마침내 11월 17일 미국이 한국에게 1955년 회계 연도에 7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경제원조를 제공하고, 10개 예비사단의 신설을 포함한 해군과 공군력의 증강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한국은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 하에 두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한미합의의사록’(Agreed Minutes of Understanding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Korea)에 양국은 정식 조인했다. 같은 날 한미상호방위조약도 비준서의 상호교환으로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이승만의 노력은 나름대로 결실을 보았다. 동시에 그 대가로 자신의 ‘북진무력통일’의 꿈을 현실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미국도 이승만의 일방적인 군사행동으로 인한 전쟁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대폭 감소되었다는 점에 나름대로 위안과 성과를 거두었다.

 

‘북진통일’이 현실적으로 어렵게되자,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평화공존’ 정책을 ‘평화지상주의’(peace-at-any-cost)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일찍이 공산주의를 ‘콜레라’와 같다고 규정했던 이승만은 1955년 8월 로버트슨 국무차관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희망’인 미국이 소련, 중공, 인도, 그리고 일본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것을 한국민은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국은 ‘좋으나, 싫으나’ 스스로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슬픈’ 처지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승만은 미국이 평화공존정책을 유지하는 한, 한국의 생존보장과 한국이 일본의 제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국민은 자신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승만이 미국의 원조중단을 자초하는 ‘단독북진’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고, 그와 같은 판단은 그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승만의 단독북진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미국은 대규모의 한국군을 유지하는 것이 한미 양국의 재정부담을 가중시킨다고 판단하고 한국군의 감축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너무나 비대한’ 군대의 유지를 고집한다고 비판했다. 1957년 6월 아이젠하워는 주한미군의 ‘현대화’와 한국공군의 전투력을 증강하는 조건으로 이승만 정부와 한국군 감축을 위한 협상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제안에 대해, 이승만은 만약 현재의 군사력이 ‘새로 개발된’(newly developed) 무기의 도입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병력의 감축을 신중히 고려하겠지만, 미국의 ‘현대화 계획’과 한국군에 대한 신무기 배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때까지는 공산주의 세력과 ‘점증하는’ 일본 팽창주의의 위협 때문에 현재의 병력수준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는 신무기의 한국배치와 연계된 한국군 감축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히 대립했다. 대미협상에서 자신이 지닌 특유의 장기를 발휘할 기회가 이승만에게 또다시 찾아왔다. 이승만은 미국이 상대하기에는 참으로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그가 ‘속임수의 달인’이기 때문에 한국군 감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한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미국은 한국 육군 4개 사단 감축을 계속 주장했고, 한국정부는 육군 2개 사단과 해병대 1개 대대를 감축하는 조건으로 한국군의 장비현대화를 요구했다. 거의 2년에 걸친 협상 끝에 한미 양국은 1958년 11월 말 한국군의 감축에 관한 최종 합의서에 서명했다. 협상의 결과는 이승만에게 결코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의 4개 사단 감축요구를 주한미군 2개 사단의 ‘무기한’ 주둔과 한국군의 장비현대화를 미국이 확약하는 조건으로 육군 2개 사단만을 감축하는데 성공했으며, 또한 한국군에 대한 핵무기 배치요구를 미국이 거부한 것을 한국군의 현대화와 감축규모의 축소를 위한 지렛대로 적절히 활용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의 ‘이유있는’ 완강한 고집으로 인하여 한일관계의 정상화와 한국군의 대폭 감축문제에 관한 원래의 의도와 계획을 상당부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이승만 외교의 역사적 평가

 

이승만은 한국현대사의 거목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강점 이전부터 그는 자신이 ‘역사적’ 인물임을 자각했고, 나아가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자임했으며, 끝내는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냉전의 시기에 분단국가의 생존을 책임진 대통령으로서 11년 반 동안 통치했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하야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고, 노정객(老政客)은 지친 노구(老軀)를 이끌고,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이역만리 이국 땅 하와이로 또다시 기약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자신의 죽음을 고국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이승만의 간절한 소망을 대한민국 정부는 차갑게 외면했다. 1965년 7월 19일 ‘역사적’ 인물 이승만은 파란만장했던 90년의 생애를 쓸쓸히 마감했다.

 

이승만을 빼놓고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을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미국도 20세기 한국민의 정치적 운명과 역사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오늘과 내일에도 미국은 ‘좋으나, 싫으나’ 여전히 중요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승만은 1급의 ‘미국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고, 그 후 독립운동가로서 오랜 세월 동안 미국정부를 상대하면서 겪었던 적지 않은 배신감과 좌절은 그로 하여금 ‘외교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교훈과 토양이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가의 운명을 책임져야만 하는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보장받기 위하여 미국을 상대로 끈질긴 협상을 해야만 했다. 결국 ‘외교가’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성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논문은 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과 한국민에게 미친 공헌을 너무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근거’ 있는 비판이 금방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치가’ 이승만에게도 씻지 못할 많은 허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의 허물을 의도적으로 덮거나, 희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위한 작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30여년 전 한국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천관우(千寬宇)의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인물이 많지 않은 형편에서, 어떤 인물

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피했으면 좋겠어요. 한 인물에 대해

서 조그만 흠이라도 찾아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로 말하면,

성하게 남아날 사람이 우리 역사상에 몇 있을 것 같지 않습니

다. 되도록 이면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

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

습니다. 요즘도 그저 깎아 내려서 인물들을 죽이는 풍조가 심

한 것 같지 않습니까 ?

 

1950년대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양대 진영의 이념적 대결이 심화․확산되어 냉전의 ‘군사화’(militarization)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였다. 또한 1950년대는 미국이 전초기지로 간주한 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시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가들도 그들의 정치적 운명을 독자적으로 개척하고, 미국과 소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전환의 시기이기도 했다. 열전과 냉전의 시기인 1950년대의 한미관계는 대립과 갈등, 그리고 궁극적 타협으로 점철된 긴장의 시기였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는 서로 갈등했지만, 동시에 상대방을 몹시 필요로 했다. 양국의 최고 지도자는 모두 현안의 해결을 위해 양보와 타협이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이외의 다른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이승만은 치열한 냉전구도에서 한국민의 ‘생존과 운명’은 한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미국의 의지와 정책에 달려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 심하게 대립했지만, 영원히 ‘이별’할 수는 없었다. 냉전의 심화가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에게 상호의존적 동반자 관계의 유지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간의 대치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타협점이자, 처방책이었다. 방위조약을 매개로,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위협을 봉쇄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북진무력 통일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기대했으며, 반면에 이승만은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기대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인들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무력으로 탄압했던 1950년대의 세계정세를 감안할 때, 이승만의 일본경계론은 일본제국주의의 부활과 미․일간의 급속한 결속에 대한 자신의 심각한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방위조약을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담보할 수 있는 최선의 제도적 장치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반일주의자였다. 동시에 그는 철저한 지미(知美)․용미(用美)주의자였다. 한미동맹의 상징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의 생존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이승만의 투철한 신념과 끈질긴 대미협상전략의 값진 열매였다. 그는 휴전이 초래할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구도 속에서 미국만이 한국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임을 인정했다. 따라서 그는 미국에게 군사동맹의 결성을 ‘강요’했고, 결국 미국은 정책적 ‘유연성’(flexibility)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이승만 외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정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벼랑끝’ 전략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벼랑끝’ 전략에는 상황적 필요에 따라 엄포나 협박, 그리고 최후통첩과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의 안전보장과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그가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이승만은 대미협상에서 때로는 ‘칼 물고 뜀뛰기’와 같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내포한 ‘벼랑끝’ 전략을 구사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그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험과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국제정치의 생리에도 밝은 현실주의자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더 이상의 양보를 얻어내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무모한 ‘자폭행위’를 결코 범하지 않았다. 대미협상에서 발휘된 이승만의 역할은, 저명한 미국의 외교사가가 적절히 비유한대로, 체스(chess) 판의 단순한 ‘졸’(卒)이 아니라 ‘성장(城將)격의 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협상 파트너였던 로버트슨이 후일 회고한대로, 이승만은 “우리[미국]를 궁지로 몰아 넣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쉽게 다룰 수 없는 까다로운 존재였다.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열전과 냉전이 공존한 195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서, 반공주의의 ‘상징’인 이승만을 강압적으로 굴복 내지 제거시키는 정책적 결정을 쉽게 내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정치적 해결을 결정함으로서 이승만의 협조가 절실했던 미국으로서는 그의 방위조약 체결요구를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미외교 나아가 한국외교는 대통령 이승만의 전유물이었다. 외교전문가로 자임(自任)했던 그는 외교 문제 전반을 직접 관장하고, 꼼꼼하게 챙겼다. 행정부 내의 외교관련 부서들, 특히 외무부와 국방부가 중요한 외교정책의 결정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 외무부장관과 주미한국대사는 이승만의 지시와 정책을 단순히 집행하는 기관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승만 외교’의 특징은 지나치게 ‘개인외교’(personal diplomacy)에 의존했다는 점일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역사에서, ‘개인외교’에 치중한 대통령으로 시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대표적으로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서 청년 이승만에게 박사학위증서를 직접 수여한 윌슨의 외교 스타일과 이승만의 그것을 비교할 때 흥미로운 점이 많다.

 

두 사람은 모두 젊은 시절부터 ‘역사적’ 인물임을 자처했고, 또한 누구보다도 지적으로 뛰어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권력을 향한 정치적 야망도 매우 높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만(自慢)과 독선(獨善)이 강한 인물이었다. ‘윌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아서 린크(Arthur S. Link) 교수에 의하면, “윌슨은 대부분의 중요한 외교문서들을 자신의 타자기로 직접 썼고, 자신의 대리인을 내세움으로서 국무부를 무시했으며, 국무장관들도 모르게 막후에서 중요한 외교협상들을 벌림으로서 그들을 무시했고, 나아가 전반적인 일 처리에 있어 마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믿는 군주처럼 행동했다.”

 

윌슨과는 달리, 이승만은 외무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자신의 측근을 대리인으로 내세울 필요와 이유도 없었다. 외교문제에 관한 한 전문가인 자신이 모든 사안을 관장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대한 정책과 협상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안들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구체적인 지침과 전략 등을 주미한국대사와 공사에게 지시했다. 이승만의 ‘개인외교’ 스타일은 그의 독선적 엘리트 의식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외교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외교정책에 관한 그의 사고(思考)나 외교가로서의 그의 수완보다는 그가 이룩한 외교적 업적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의 생존이 걸린 정녕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를 결심한 직후 한국민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도 ‘동맹국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당부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상징되는 한미동맹은 실제로 지금까지 한반도에 전쟁의 재발을 억제하고, 한국의 생존과 안보를 확보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온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전쟁이 종식된 이후 오늘날까지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긴장 속의 평화’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적 안보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확신했던 이승만의 투철한 신념과 예리한 판단, 그리고 과감한 결정에 크게 기인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들이 그늘 덕을 본다”는 외국 속담이 있다. 이승만은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믿었고, 마침내 그것을 심는데 성공했다. 한국민은 그 ‘나무’의 그늘 덕을 아직까지 보고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따른 ‘동맹’의 결성과 강화는 국가적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의 하나이다. 불행하게도 2004년이 저물어 가는 지금의 한미동맹은 심각한 균열증상을 보이고 있다. 한미동맹의 ‘위기’는 곧 대한민국의 ‘위기’ 초래를 의미한다는 냉철한 현실인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총참모장 겸 육해공 3군 총사령관과 1960년대 초반에 주미한국대사를 역임했던 정일권(丁一權)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탁월한 외교정략가’로서 “미국에 대하여 말할 것은 당당히 주장하고 따질 것은 철저히 따지면서, 국가의 위상을 지켜낸” 뛰어난 지도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일권의 평가가 다소 과장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버드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었고, 외국태생으로는 최초로 미 국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외교적 해결을 통한 베트남전쟁의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는 1975년 1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교수로 있었을 때 나는, 역사는 비인간적 요인들(impersonal forces)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실제로 들여다보면, 개인들의 역할에 따라 [역사의 전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자신의 소회를 피력한 바 있다. 국제관계는 개인의 역할을 무시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들]은 전쟁의 원인이나 동맹의 형태 등을 포함한 국제관계를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국가의 목표를 규정하고,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대통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를 보위(保衛)해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는 그야말로 막중한 직책이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책임졌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의 임무 수행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작업에서 ‘외교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공헌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승만: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에 당신은 당신이 가진 가장 효과

적인 협상수단을 잃게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는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될 것이다. 내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

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1953)

 

닉슨: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

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을 상

대할 때,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

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에도 내가 여행을 하면 할수록. . .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1978)

 

정일권: “한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은] 투철한 반공지도자

이자, 탁월한 외교정략가로서의 업적은 올바르게

평가받아야 할 것으로 안다. . . . 미국에 대하여

말할 것은 당당히 주장하고 따질 것은 철저히 따

지면서, 국가의 위상을 지켜낸 정략가로서의 모습

은 참으로 훌륭하기만 했다.”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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