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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기의 ‘이승만 외교’
작성일 : 2008/02/04 23:56 / 조회 :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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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기의 ‘이승만 외교’ (1939-1945)

 

김남균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I. 외교가 이승만의 등장

 

이승만은 우리에게 '초대 대통령' 혹은 4.19로 '하야 한 대통령'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독립운동 외교가로서의 이승만은 별로 알려져 있는 것 같지 않다.

 

이승만이 처음 외교의 일선에 나선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직전인 1904년이었다. 당시 30세였던 이승만은 민영익과 한규설의 요청에 따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미국에 밀사로 파견된 이유는 영어에 능통하다는 명성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부터 영어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24세부터 29세까지 한성감옥에 있던 5년 7개월 동안에도 영어실력을 꾸준히 닦았다.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루즈벨트를 면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1882년에 체결한 조미우호통상조약에 기초하여 한국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요구는 거절당했다. 루즈벨트는 이승만에게 정식 절차를 통하여 요청하라고 말했으나, 일본이 한국의 목을 조이고 있던 상태에서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에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루즈벨트를 만나기 며칠 전인 1905년 7월 31일, 미국은 이미 일본과 태프트-카츠라 밀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일본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뒤였다. 미국 대통령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도움을 청하러 온 약소국 청년 이승만을 기만했던 셈이다.

 

미국의 지원을 얻는데 실패한 이승만은 귀국을 미루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5년 동안 조지 워싱턴, 하버드 그리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학사부터 박사학위까지 모두 마쳤다. 1910년에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한 이승만은 YMCA 학감으로 있으면서 기독교신앙과 신교육을 기초로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 대상이던 이승만은 1912년 일제의 체포를 피하여 다시 미국행을 택했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교회활동과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이 시절 이승만은 주간지 「태평양주보」를 냈고, 또한 「청일전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1918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려고 했으나 미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이루지 못했다. 한편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터졌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20년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승만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했으나, 1921년 워싱턴에서 미국 국무장관 찰스 휴즈(Charles Evans Hughes)가 주역을 담당한 워싱턴 군축회의 (Washington Conference)가 열리자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표 단장을 맡고, 서재필이 부대표, 정한경이 서기, 그리고 미국인 프레드 돌프(Fred A. Dolph)가 고문직을 맡았다.

1921년 말부터 1922년 초까지 열린 워싱턴 군축회의에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워싱턴 군축회의는 전함의 건조비율을 정함으로써 태평양에서의 새로운 군비질서를 구축했다. 그러나 미국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는 점이다. 일본도 강대국의 하나로 참여하였으나, 전함의 보유를 미국이나 영국과 비교해 5대 3의 비율로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일본 대표는 귀국할 때 군중들의 거친 항의를 받았다. 워싱턴 회의 결과에 실망한 임시정부는 결국 1925년 이승만을 면직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있어 이승만의 외교적 역할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중요하고 필요해졌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이듬해 국제연맹 회의가 제네바에서 개최되자 이승만은 1933년 1월 상해 임시정부의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제네바로 가서 한국의 독립을 언론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던 임시정부 대표인지라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국제연맹에 실망한 이승만은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이 독립의 기회가 왔다고 느낀 것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9년 유럽에서 2차 대전이 터지면서 부터였다.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는 순간이라고 오래 전부터 믿고 있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의하여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책임자로 임명되어 독립 외교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미국의 대일정책이 변해야 한다고 믿은 이승만은 1941년 여름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 간 전쟁의 불가피성을 경고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단호한 대일 압박정책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이승만의 경고가 진실임이 입증되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갈라진 틈을 타 독립의 기회를 잡기를 원했다. 그는 미국정부에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편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군사적으로 미국과 협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광복군과 한국인을 미군에 편입시키는 군사협력 방안을 추진하였다. 종전을 앞 둔 1945년 봄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개최되자, 이승만은 전후 강대국 간의 거래에 의하여 한국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이 글에서는 태평양 전쟁기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대한 연구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진척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승만의 태평양 전쟁기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하되 그의 핵심적인 외교 상대였던 미국의 대외정책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이승만의 대미외교에 대한 평가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II. 태평양 전쟁 전 미국의 대일정책과 이승만의 인식

 

이승만은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1941년에 출판한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에서 이승만은 일본의 침략주의 때문에 미일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예상되는 미일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이 대일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일본에 대해 강력한 압박정책을 가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주의 노선을 억제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은 태평양을 자신의 ‘호수(Japan's Lake)'나 혹은 ‘후원(Japans' backyard)’으로 생각하는 일본판 먼로 독트린을 선언하여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신질서를 구축할 것이며, 미국은 이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승만의 경고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사실로 드러났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충돌 조짐은 이미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때부터 있었다. 만주는 미국이 19세 말 이후 문호개방 정책을 통하여 보호하려던 지역에 속해 있었다. 만주 침략에 대해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은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일본 영토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불인정(nonrecognition)선언, 소위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 발표 이외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미국은 법적 절차에 따라 국제연맹이 나서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저지해 주기를 원했다.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을 보내 사실을 파악하고 일본의 도발행위에 매우 애매모호한 보고서를 제출하였을 뿐 실효성 있는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중국을 침략하였을 때도 미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단지 무력점령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스팀슨 독트린을 확인하는 정도로, 그것도 매우 소극적인 표현에 그쳤다. 이와 같이 미국이 일본의 대륙침략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1920년대 이후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고립주의 때문이었다. 미국은 1차 대전 이후 해외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윌슨이 주도하였던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1차 대전에 참전하였던 민주당 정부는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공화당에게 참패를 당했다. 그 후 19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당선되기까지 민주당은 공화당에게 선거마다 패배했다.

 

미국의 고립주의 노선은 1930년대 들어서 더욱 굳어졌다. 193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의 민주당 정권이 출현하자, 공화당 고립주의자들은 루즈벨트가 미국을 전쟁으로 몰고 가지 못하도록 1935년 중립법(Neutrality Act)을 제정해 행정부를 옭아매었다. 중립법은 1937년에 다시 제정되어 루즈벨트 행정부를 완전히 묶어 놓았다. 고립주의 분위기가 고조된 국내 상황에서 루즈벨트 행정부가 일본에 압박정책을 실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립주의자들은 일본의 기습이 있던 순간까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루즈벨트가 고의로 일본의 기습을 유도하였다는 주장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고립주의자 혹은 평화주의자들을 “제5열(fifth columnists)"이라며 그들의 비현실적인 일본인식을 비판했다.

 

그러나 고립주의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일본은 침략주의 노선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1936년부터 독일 및 이태리와 3국 동맹을 맺어 추축국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은 1940년 중일전쟁의 전선을 인도차이나 북부로 확대했다.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나, 프랑스의 독일 괴뢰 정권이었던 비시(Vicy)정권과 협상하여 진격할 수 있었다. 침략의 구실은 중국에 대한 효율적인 공격이었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일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미국 국무부의 아시아 정책을 총괄하고 있던 스탠리 혼벡(Stanley Hornbeck)을 비롯한 미국 관리들은 일본이 중국을 넘어서 인도차이나로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으로 판단했다. 국무부는 먼저 경제적 압박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9월부터 미국은 철을 비롯한 군사 관련 물품의 일본수출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러나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석유와 고철의 수출은 계속되었다.

 

미국의 경제적 제재조치에 일본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1년 4월 일본 외상 마츠오카 요스케(Matsuoka Yosuke)는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과 일-소중립조약을 맺고 돌아왔다. 북쪽으로부터 소련의 침공을 방지한 다음 동남아시아로 진격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1941년 6월 유럽에서는 독일이 1939년에 맺었던 독-소불가침 조약을 무시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전쟁이 악화되어 가자 루즈벨트 행정부도 좀 더 적극적으로 2차 대전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1941년 3월 루즈벨트는 의회를 설득하여 무기대여법(Lend Lease Act)을 통과시켰고, 미국은 연합국에 대한 무기 공급지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전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의회는 첫 원조금으로 7억 달러를 통과시켰다. 외교사학자 토마스 베일리는 무기대여의 시작을 “비공식 선전포고”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압박정책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일본은 이를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하늘이 준” “황금의 기회”로 이용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일본이 시베리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군대를 모두 철수시켜 기존의 군대와 합친 다음 남태평양으로 진격하든가, 아니면 시베리아로 진격하여 우랄산맥 동쪽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할 것으로 보았다. 이 두 가지 침략 경로 중 일본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내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가 있는 남진이 더 욕심이 나겠지만,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위험 부담이 더 크기 때문에 아마 북진을 선택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일본이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독-소전쟁의 결과와 미국이 일본의 팽창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 의 끝부분에서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시일 안에 세계의 민주세력들이 일본을 섬으로 다시 몰아넣고 태평양에 평화가 다시 오게 될 것”이라면서, “그날 한국은 자유의 대열에 참여하고 한국은 다시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희망을 적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얻기 위하여 루즈벨트 행정부에 주문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승만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의 주장은 불가피해 보이는 전쟁을 예방하기 위하여 미국이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실효성 있는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저술 의도를 적었다:

 

첫머리에 나는 이 책을 출판하는 의도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함임을 말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나는 자주 오해를 받고 있다. 어떤 친구들은 동양의 문제를 논의하는 경우 종종 나에게 “당신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기를 원합니까?”하고 묻는다. 아니다. 오히려 나는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피하길 원한다. 그리고 나는 미국이 전쟁을 하지 않고 지금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이 저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본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평화주의자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평화주의자이다.

 

이승만이 루즈벨트 행정부에 제안한 것을 요약하면, 미국의 해군력을 증강하고, 미국 언론에 실리는 일본의 거짓 선전을 금지시키고, 중국과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울 수 있도록 군사적인 지원을 하며, 일본에 대해 직접적이고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이 한국과 중국에 대해 군사적 지원을 해준다면 2천 3백만 한국인과 4억 5천만 중국인들이 일본을 몰아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전쟁무기와 물자의 충분한 공급”이며, 이와 같이 거대한 인력을 무장하여 활용하는 것이 “적어도 태평양에서 미국이 전쟁을 면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만약 “일본이 무력으로 이웃 국가로부터 탈취한 모든 것을 내놓을 때까지 일본에 대해 경제제재, 무역금지, 혹은 전국적인 불매운동을 실시할 수 없다면, 적어도 미국은 일본을 공공의 적으로 알려진 범인들을 다루듯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조치를 “지금 당장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은 새로운 대일정책이 시급하다는 것을 그의 서문에서부터 거듭 강조하고 있다.

 

1941년 여름을 지나면서 미일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1941년 7월부터 미국은 일본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여 일본으로 수출하던 비행기 기름의 수출을 중단했고, 9월에는 납, 알루미늄, 구리와 고철 등에 대한 군수 관련 제품의 전면 수출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미국의 경제적 압박조치에 대항해 일본은 1941년 7월 24일 인도차이나 남부지역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미국은 미국 내 일본은행 예치금을 비롯한 모든 재산에 대한 동결조치를 취했다. 상황이 급하게 되자 일본은 미국 정부에 대하여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헐은 주미대사 노무라(Nomura Kichisaburo)에게 정상회담을 위한 선행조건을 요구하였다. 요구 조건의 핵심은 일본이 1931년 이후 점령한 지역에서 전면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일본은 전쟁에 박차를 가하면서 협상을 계속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다. 1941년 11월 헐과 노무라 사이의 최종 협상이 결렬되자, 1941년 12월 7일(하와이 시간)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과 전쟁을 하는 “자살행위”를 선택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충돌(conflict)을 피하거나 혹은 더 오래 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본 이승만의 예측이 맞았던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의 Japan Inside Out은 매진되었다.

 

III. 태평양 전쟁 중 이승만의 외교활동

 

1. 임시정부 승인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독립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일본이 미국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의 마음이 밝지만은 않았다. 과거에도 한국과 관련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있었지만, 전쟁에 이긴 쪽이 한국을 차지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었다. 그렇다면 태평양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 민주주의 성격상 미국이 한국을 식민지로 차지할 것이란 예상은 하기 어려웠으나, 1905년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넘긴 역사를 직접 경험한 이승만으로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전쟁 후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는 일이 필요했다. 이승만은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국무부의 생각은 달랐다. 1942년 2월 7일자 답변서에서 국무부는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혔다. 첫째 현 시점에서 한국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살 것이고, 둘째 소련이 아직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은 시점에서 소련과 한국문제를 상의할 수도 없겠지만 소련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과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시점에 미국 국무부 관리들은 한국의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깊이 논의했다. 1942년 2월 17일 국무부 차관보 아돌프 벌(Adolph Berle)은 태평양 전쟁으로 곧 폭발할 한국인들의 저항을 대일전에 이용하기 위하여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고려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미국이 대일전에 이용할 수 있는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것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벌의 비판에 대해 국무부 극동국(Far Eastern Division) 관리들과 혼벡은 미국 내 한국인들의 활동과 국무부의 정책에 대해 무지하고 또 판단력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혹평을 가했다. 혼벡에 의하면 한국의 대대적 저항이 임박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국무부가 한국인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 때 극동국은 한국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비밀 보고서(memorandum)를 작성해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태평양 전쟁 전에 일본과 만주에서 여러 해 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던 극동국 관리 윌리엄 랭든 (William Langdon)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랭든은 한국인들이 “37 년간” 일본의 지배 하에서 정치적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치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적어도 1세대 동안 한국은 강대국의 보호와 지도, 그리고 원조가 필요하며 그 후에야 완전한 독립이 주어져야 한다고 했다.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외국에 있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먼저 단합해야 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기준에 따라 한국임시정부는 승인하지 말아야하며, 전쟁 중 미국은 한국의 어떤 단체와도 사실적 관계(de facto relationship)를 맺어서도 안 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어떤 공식적인 지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조급하고 일방적인 행동을 반대하고 연합국과 협의할 것을 강조했고 중국과 소련을 협의국가로 지목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의 중국군 지원 하에 있는 광복군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주로 일본군의 앞잡이들(rascal and running dogs)"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랭든의 보고서는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보다는 국무부 내의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국무장관 헐의 입장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이 또 다른 친소정부를 만들어 승인함으로써 문제가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예측했다. 주중 미국 대사였던 클러랜스 고오스(Clarence Gauss)는 한국의 독립은 인도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의 독립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대한 독립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한국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것을 권했다.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동맹인 영국이 최대의 식민지 국가라는 점도 한국임시정부 승인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영국은 식민지를 모두 해방시킬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중국 정부는 한국의 임시정부 승인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에 부딪힌 중국은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내기 위하여 미국 국무부에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승인불허라는 미국의 확고한 입장은 태평양 전쟁기간 동안 전혀 변화가 없었다. 1943년, 1944년에도 수차에 걸쳐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제기하였으나, 2차 대전이 종식될 때까지 국무부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종전을 앞둔 1945년 7월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지금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결국에는 소련과 한국간의 우호적 관계를 해치게 될 전후에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간의 내란을 없게 해주고 공동의 적인 일본에 대한 대규모적 전쟁을 한국인들이 분담하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이승만의 노력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은 두 국가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2. 광복군 지원

 

태평양 전쟁 중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미국 첩보당국과 협력하여 광복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애썼다. 미국 정부 역시 임시정부 승인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지만, 대일전에 한국인을 이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승만이 접촉한 기관은 미국 정보조정국(Coordinator of Information: 이하 COI))의 중국관련 특별고문이었던 에슨 게일(Esson M. Gale)이었다. 당시 COI는 윌리엄 도노반(William J. Donovan)이 책임자였는데 그는 동아시아지역에 대해서는 게일에 의존했다. 게일은 중국 전문가로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고 이승만을 한국의 손문이라 비유하며 높이 평가했다.

 

1942년 이승만은 게일을 통하여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이하 OSS)의 부국장인 엠 프레스톤 굿펠로우(M. Preston Goodfellow)를 만났다. 두 사람은 미국 내 한인들을 모집하여 특수훈련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1942년 7월 17일자 이승만의 비밀서신에 따르면, 모집인원은 군복무를 원하는 한인 50명으로 하고, 나이는 20세 이상 44세 이하로 했다. 50명 중 10명은 무선통신 훈련, 다른 10명은 해상전술 훈련을 받고, 나머지 30명은 여러 가지 중요 작전을 지도 조직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지원자들이 관계서류를 작성하여 주미외교부로 보내면 외교부에서 선별하여 관계당국에 추천하는 형식을 취했다. 2개월 정도 훈련을 받은 후 미국, 중국, 혹은 한국에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다. 1942년 10월 이승만은 50명의 명단을 OSS에 주었고, 그 중 12명이 선발되어 12월 4일부터 군사훈련을 받았다.

 

1942년 10월 10일 이승만은 굿펠로우에게 “미국 군사당국에 한인 군사지원 제공(Offer of Korean Military Resources to U.S. Military Authorities)"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재미 한인을 훈련시켜 단위부대로 미군에 배속시키거나 독자적인 ‘자유한인부대(Free Korean Legion)'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그는 극동에 있는 한인 병력 25,000명을 미군의 지휘체계로 이관시키자고 제안했다. 이관된 한인의 통솔은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인에게 맡기려는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굿펠로우에게 자신의 계획(Korean Project)을 합동참모부의 소관 위원회에서 토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청했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Korean Project의 실현을 위하여 A와 B로 된 2개의 “비밀각서”도 제출했다. 각서 A는 극동에서 미군 지휘 하로 이관된 한인 게릴라 25,000명에게 필요한 물품과 군사장비 품목에 관한 것이었고, 각서 B는 미국에서 구성될 대대급 ‘한인군사파견단(Korean Military Mission)’의 모병에 필요한 경비 내역이었다. 이승만은 매월 필요한 예산을 3,940달러로 계산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육군장관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냈고 또 무기대여청(Lend-Lease Administration)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국무부가 특정단체와 물질적, 재정적, 정신적 지원을 제공하고 대일작전의 수행을 위임하는 것은 해당 단체에게 배타적인 정치적 권위나 독점적 권리를 인정한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고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대신 국무부는 OSS가 직접 한인들을 개별적으로 모집하여 고용하고 훈련시켜 활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권고하였다. 그 후 실제로 OSS는 한인들을 개별적으로 모집하여 직접 훈련시키는 납코계획(Napko Project)과 독수리계획(Eagle Project)을 수립하고 훈련까지 하였으나, 종전으로 군사작전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았다. 약 70명 정도가 훈련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제한적이지만 이승만 외교의 성공한 부분이다.

 

미국이 대일전에 한인을 투입하는 계획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한반도가 대일전을 치르는데 요충지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체스터 니밋츠(Chester Nimitz)장군 지휘 하에 중앙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공격루트와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장군 지휘 하에 남태평양에서 뉴기니와 필리핀을 거쳐 오키나와를 공격하는 루트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가 일본 본토 공격루트에서 빠져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만주와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것은 인명 피해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피하길 원했다. 따라서 아시아 대륙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군이 담당해주길 원하고 있었다. 이것이 미국이 대일전에 소련이 참전할 것을 계속 종용한 배경이었다. 고정휴 교수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한국인들이 미군과 협력하는 문제에 대해 견제적 입장을 취하며 협조하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장애요인이었다.

 

3. 미국의 대한정책과 이승만의 얄타 밀약설

 

한국임시정부 승인을 거부한 미국 국무부는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 대한 정책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면 한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둘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미국의 입장은 한국을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독립시킬 계획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미국의 복안은 무엇이었던가?

 

1942년 여름 전후대외정책 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Postwar Foreign Policy)의 안보소위원회(Security Subcommittee)는 한국문제로 회의를 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당시 회의록은 “한국문제 처리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은 독립이 되고, 중국의 연맹의 일부나 혹은 신탁통치 아래 두는 가능성들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무부 관리들 중에는 한국의 독립보다는 강대국의 신탁통치 안에 더 무게를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예로 혼벡은 전쟁 기간 중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대해 공개적으로 약속하는 것은 한국의 독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동아시아 문제에 미국을 옭아맬 것으로 걱정했다. 그는 한국문제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더 큰 문제들이 정리된 다음에 해결할 문제로 파악했다. 혼벡이 생각하던 더 큰 문제는 1942년 10월 국무부 위원회가 실험적으로 마련한 “북태평양지역위원회”의 구성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중국, 소련, 그리고 미국이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종식되면 북태평양위원회는 독립하기 전의 한국을 관리할 것이고 또 해당 지역에 있는 다른 영토에 대해서도 유사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1943년이 되자 한국에 대한 국제적 감시업무를 담당할 북태평양위원회안은 미국 정부의 안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1943년 2월 22일 국무장관 헐, 차관 웰즈, 그리고 국무부관리들과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해 회의하는 자리에서 루즈벨트는 타이완과 만주는 중국에게 반환될 것이지만, 한국은 신탁통치가 실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루즈벨트의 한국 신탁통치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었다. 몇 달 후 영국 외상 앤소니 이든(Anthony Eden)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루즈벨트는 한국에 신탁통치가 실시될 경우 중국, 미국, 그리고 한 두 나라가 더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자 이든은 이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루즈벨트의 정책 방향을 확인한 국무부는 한국 신탁통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1943년 5월 안보기술위원회(Security Technical Committee) 회의에서 휴 보튼(Hugh Borton)은 한국에 대한 국무부의 계획 및 방향과 범위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전후 한국을 소련이나 중국 중 어느 한쪽이 지배하면 다른 쪽의 반대가 심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일방적인 지배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943년 5월 보튼이 작성한 영토문제소위원회(Territorial Subcommittee)의 보고서는 1942년 봄에 작성되었던 랭든의 보고서보다 한국 문제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보튼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대신 전쟁이 종식되면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권리는 인정하되 실질적인 독립은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거친 다음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국무부는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탁통치라고 믿게 되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은 처음으로 전후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회담에 참석하였던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국의 장카이섹(張介石)은 한국을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에 따라 독립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미국 군함 <아이와>를 타고 카이로로 향하기 이전에 국무부는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계획이 ‘적절한 절차’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카이로 회담의 결과가 알려지자 한국인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적절한 절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승만도 이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이승만은 “적절한 절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부에 묻는 서신을 보냈으나 회신은 없었다.

 

미국이 과연 한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만은 미국의 확실한 입장 표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미국은 전후 한국문제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다. 종전이 멀지 않았던 1945년 2월 전후 문제와 대일전에 대한 소련의 참전을 논의하기 위하여 루즈벨트, 처칠, 그리고 스탈린이 얄타에 모였을 때도 강대국들은 전후 한국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후 한국의 운명에 대해 더욱 불안해졌다. 한국이 또 다시 강대국간 거래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이승만은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 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보장 받기 원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전후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새로운 국제기구인 국제연합(United Nations-이하 UN)을 만들기 위해 미국의 주도 하에 50여 개 국가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였다. 미국은 1차 대전 후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UN 창설에는 처음부터 매우 적극적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6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회의 결과로 UN 조직이 마련되었다.

 

이승만은 2월 23일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한국대표단을 구성했다. 이승만을 단장으로 김호, 한시대, 김원용, 전경무, 황사용, 이살음, 변주호, 송헌주, 윤병구 등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은 3월 8일 국무부에 한국대표단의 옵서버 참가 승인을 요청했으나 국무부는 1945년 3월 1일 현재 UN 가입국만이 참가 자격이 있다면서 한국대표단의 참가 승인을 거절했다.

 

5월 초 샌프란시스코회의 참석을 거절당한 이승만에게 한 러시아인이 찾아와 얄타회담에서 한국을 소련에게 넘겨주기로 했다는 비밀협약 내용을 전했다. 이승만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즉시 이승만은 전달받은 얄타회담 밀약문을 오웬 브루스터(Owen Brewster)와 월터 조지(Walter George) 상원과 클레어 호프만(Clare Hoffman) 하원의원에게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다. 다급해진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열어 비밀거래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밀약설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익재미너(San Francisco Examiner)』지는 이승만의 밀약설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대한 ‘외교적 폭발물’이 될 것이라고 논평했다. 사태가 심각하게 번지자 국무장관 대리였던 조셉 그루(Joseph Grew)는 6월 8일 성명을 발표하여 밀약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승만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동안 미국 정부가 이승만 에게 보여준 소극적인 태도와 미국의 친소정책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19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서신을 보내 소련에 대한 경각심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는 서신에서 “40년 전 미국이 그렇게 우려하던 극동에서의 소련의 팽창 위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승만의 반소사상은 그의 저서 Japan Inside Out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세계를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로 파악하고, 전체주의에 나치즘,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를 모두 포함시켰다. 독일이나 이태리뿐 아니라 소련도 파괴적이며 침략적인 국가로 파악했다. 소련과 미국은 전쟁이 끝나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오월동주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이승만은 패전한 일본이 한국에서 나간 후 그 공백을 미국이나 소련, 중국과 같은 승전국들이 차지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19세기 이후 민족사의 비극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었다. 내전에 시달리는 중국보다 공산국가 소련이 더 걱정이었다. 소련은 한국을 차지하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까지 한 경험이 있으며 게다 지리적으로 한국에 들어 올 가능성은 미국보다도 훨씬 높았다. 밀약설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우선 밀약설을 제기함으로써 강대국의 밀거래를 차단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밀약설은 나중에 공개된 얄타협상 회의록에 의하여 사실이 아님이 밝혀짐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결론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IV. 이승만 외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승만의 외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바쳤다. 특히 1945년 이전 일본에 국권이 침탈되어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어찌 외교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나라가 있어도 강대국들과 외교적 협상이 어렵다는 것은 최근 한미 FTA 재협상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런데 이승만은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1인 외교를 수행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기의 이승만 외교는 목표했던 성과를 다 거두지는 못했다.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했고, 전시 무기대여와 관련된 군사원조도 받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설득하여 한국인이 미군 작전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놓았고 그 길을 통하여 한국인 청년들이 대일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법적 한국인이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이미 한국인들이 먼저 미국의 대일전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한미군사동맹의 뿌리는 한국전쟁이전 2차 대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승만의 외교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미국의 대외정책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한국임시정부 승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던 것은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기존의 외세를 정리하기 위한 전략에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2차 대전이란 전시상황과 오랫동안 강대국 간 이해관계가 얽힌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였더라면 한반도의 분단은 없었을 것이고 또한 한국전쟁에서 수만 명의 미군이 생명을 잃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미국의 한국임시정부 승인불허 정책은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임시정부 승인과 관련된 외교문제는 이승만의 실패가 아니라 미국의 실패였다.

 

한 가지 더 짚고 갈 것은 얄타 밀약설 제기에 대한 비판론이다.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얄타 밀약설을 제기함으로써 한국임시정부의 신뢰도를 추락시켰으며 그 결과 임시정부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소련까지 등을 돌렸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소련이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가는 판에 소련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였을 리도 없고, 또한 1943년 이후 미국의 입장이 이미 신탁통치로 굳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대표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당시의 상태에서 이승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이 대일전에 참가였더라면 전후 한국 독립의 가능성은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승인받았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일전 참전은 미미했고, 임시정부 승인은 실패했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이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할 것인가? 의심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던 소련의 지배를 저지할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때에 밀약에 대한 첩보가 있다면 누구나 그것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밀약설이 틀리는 경우에 당사자 개인의 신뢰는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나라를 찾기도 전에 또 다시 잃어버리는 일이 아닌가! 강대국의 모략은 어떤 방법으로든 막아야 했을 것이다. 밀약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밀약설이 나오게 된 책임을 굳이 따진다면 미국이 그 원인 제공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승만에게 미국에 대한 불신을 심어 준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태프트-카츠라조약과 루즈벨트와의 면담이 그러했다. 이승만은 이것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었다.

 

미국의 대한정책의 문제점은 신탁통치 안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한국문제를 결정하면서 정작 한국 사람은 그 결정에서 빠져 있었다. 만약 신탁통치가 최선의 정책이었다면 비공식적으로라도 사전에 한국 대표와 상의했어야 옳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 미국의 해방 후 대한정책은 계속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미국 외교의 전통인 일방주의의 문제점이다. 이승만 외교의 실패의 바탕에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의 뿌리 깊은 일방주의(unilateralism)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의 외교활동은 절망과의 투쟁이었다. 외교활동을 뒷받침해 줄 조국은 식민지 상태였고 그가 대표하는 임시정부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절망의 시대에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자 노력한 신념의 투사 외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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