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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호국 과정에서의 ‘이승만 외교’(1945~1954)
작성일 : 2008/02/05 00:14 / 조회 :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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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호국 과정에서의 ‘이승만 외교’(1945~1954)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정성화 (명지대 사학과 교수)

 

1.귀국과 건국을 위한 외교적 포석

 

일본이 항복한 후 이승만 박사는 서둘러 귀국하려 했으나 그의 귀국은 매우 어렵게 이루어졌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 지도자가 미국이 점령한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했다. 미국 정부가 이 박사의 귀국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를 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종전 무렵 미국 국무부의 극동문제 담당 관리들은 이 박사를 사실상 기피인물로 취급했다. 미국무부가 이 박사를 기피인물처럼 취급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의 이유는 이 박사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정부의 승인을 끈질기게 요구하면서 국무부의 관리들을 귀찮게 했다는 점이다. 미국무부는 이러 저러한 이유를 대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마저 제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는 반복해서 국무부를 찾아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국무부 극동문제 담당 관리들 가운데 친소경향의 인사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훗날 소련 간첩 혹은 공산주의 동조자로 드러난 히스(Alger Hiss), 카터(John Vincent Carter), 한슨(Haldore Hanson), 서비스(John Stewart Service), 클럽(Oliver Edmond Clubb)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극동지역의 문제에 대해 소련과 협조하여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승만의 확고한 반소성향이 장차 미․소협조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이승만을 멀리했다.

 

당시 이 박사가 귀국하려면 국무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고,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전쟁지역 여행허가증을 확보해야만 했다. 국무부여권국은 이 박사의 여권을 발급해주었고, 맥아더사령부도 합동참모부의 스위니(Sweeney) 대령의 요청에 따라 이 박사의 전쟁지역 여행허가증을 발급해주었다. 그리고 국무부의 매닝(Manning)이란 관리는 이 박사의 귀국을 위한 교통편을 주선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던 일이 꼬이게 된 것은 국무장관실이 맥아더사령부가 발급한 전쟁지역 여행허가증에 기재된 High Commissioner from Korea to the United States(이 박사는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을 그렇게 영역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이 박사의 영문 직함을 트집 잡아 여권을 취소하라고 여권국에 지시하면서부터이다. 이 박사는 합동참모부의 스위니 대령을 찾아가 High Commissioner라는 직함을 뺀 새로운 전쟁지역 여행허가증을 확보한 다음 교통편 확보를 위해 매닝을 찾아갔다.

그 동안 이 박사의 교통편을 주선해오던 국무부의 매닝은 국무부가 이 박사의 귀국을 위한 교통편 주선을 도와주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면서, 이 박사가 귀국하려면 맥아더사령부로부터 이 박사에게 허가된 일본 내의 여행지가 오끼나와와 도쿄 중 어디인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새로운 허가증과 이 박사를 군용기편으로 한국에 귀국시켜주겠다는 보증서를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이 박사는 합동참모부의 스위니 대령을 찾아가 맥아더사령부로부터 그 같은 새로운 허가증 및 군용기 제공 보증서를 발급받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스위니 대령은 자기가 그런 주선을 해주는 데 대한 국무부로부터의 승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 박사는 다시 국무부 여권국장을 찾아가 그러한 승인을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여권국장은 국무부는 이 박사를 위해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다고 답변하면서 그러한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이 박사가 High Commissioner라는 직함을 사용한 것이 타당한지 여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비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미국정부가 시비 삼을 사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가 그러한 타당치 않은 이유를 들어 이 박사의 여권을 취소하려 하고, 또 맥아더사령부의 새로운 여행허가증을 요구하며 이 박사로 하여금 국무부와 합동참모부를 왔다갔다 헛수고 하게 만든 것은 이 박사의 귀국을 지체시키려는 미국 관리들의 ‘뺑뺑이 돌리기’가 분명하다.

 

이 박사가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는지에 관해서는 이 박사가 맥아더에 로비를 해서 난관을 돌파했다는 설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자기의 상관인 맥아더에게 이승만의 귀국을 요청한 것에 힘입어 돌파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두 가지가 다 작용하여 이 박사가 미국무부의 귀국방해를 돌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박사는 미국정부 관리들의 ‘뺑뺑이 돌리기’를 극복하고 도쿄로 가서 맥아더의 환대를 받았고, 1946년 10월 16일 맥아더가 제공한 미군 군용기를 타고 단신으로 귀국했다.

 

이 박사는 이렇게 어렵게 귀국하면서도 장차 자신이 추진할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중요한 외교적 포석을 해놓았다. 그것은 바로 맥아더와의 돈독한 인간적 유대를 형성해놓은 것이다. 맥아더는 미군 태평양지구최고사령관으로서 일본을 점령통치하는 최고 지휘관인 동시에 남한을 점령통치하는 남한주둔미군사령관 하지의 직속상관이었다. 그러한 맥아더와 인간적 유대를 구축해놓은 것은 이 박사가 장차 대한민국 건국운동을 주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이 박사가 귀국길에 맥아더를 만나고 그와 돈독한 인간적 신뢰관계를 형성하게 된 데는 이 박사와 맥아더 간의 사상적 및 국제정세관의 공통성과 이전부터 있었던 상대방에 대한 우호적 정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박사와 맥아더는 다 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다. 이 박사와 맥아더는 소련이 아시아의 가능한 많은 지역을 공산화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도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박사와 맥아더는 이전부터 간접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축된다.

 

맥아더의 측근 보좌관 중에는 로물로(Carlos P. Romulo) 대령(훗날 유엔총회의장 및 필리핀 외상이 된 인물)이라는 필리핀인이 있었는데, 그는 2차 대전 기간 중 미국에서 개최된 이 박사의 한국독립홍보 파티에 참석하기도 하면서 이 박사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이 박사와 로물로와의 관계로 인해 이 박사와 맥아더는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갖게 되었을 것이며, 그것이 이 박사와 맥아더 간의 돈독한 인간적 유대형성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처럼 귀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방해를 돌파하는 와중에서도 이 박사는 중요한 외교적 자산을 확보하는 지혜를 발휘했으며, 이 박사가 확보한 맥아더와의 신뢰관계는 이 박사의 건국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맥아더 덕분에 이 박사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로부터 극히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맥아더는 도쿄에 온 하지에게 이 박사를 소개하면서 ‘모국에 돌아 온 민족의 영웅’으로 영접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하지는 맥아더의 그러한 당부에 따라 이 박사를 매우 우호적으로 대우했으며, 자신의 정치고문에 이 박사의 미국인 친구인 굿펠로(Preston Goodfellow) 대령을 기용했다. 하지의 후대와 굿펠로의 미군정 고문 취임으로 인해 귀국 직후부터 1946년 2월까지 이 박사는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자기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건국운동의 국내 포석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이 박사가 귀국길에 확보한 맥아더와의 유대형성이라는 외교적 자산은 훗날 이 박사의 미국방문 외교활동 때나 6․25전쟁 극복과정에서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2. 중국, 유엔과 접촉

 

이승만 박사는 한국의 독립 및 통일에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의 독립 및 통일과 관련된 모든 것을 미국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박사는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다른 어떤 지역을 양보받기 위해서 한국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항상 버리지 않았다. 이 박사는 그의 오랜 미국인 친구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에 대한 자신의 의심을 다음과 같이 실토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문제는 그 자체로서 볼 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넌지시 말합니다. 소련과의 폭넓은 관계 속에 세계적으로 보다 광범위한 각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소련으로부터 다른 어떤 지역을 양보받기 위해서, 미국이 아무리 싫어도 한국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만일에 미국이 우선 다른 지역에서 이익을 위해서, 장사 속으로 다루는 흥정거리처럼 한국을 다루게 될 경우 한국이 걸어갈 길은 명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강제로 물 한 가운데서 말을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연유에서 이 박사는 미국의 지원을 공고히 확보하도록 하면서도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로부터도 지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1945년~48년의 국제정세 속에서 이 박사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지원을 확보할 수 있는 미국 이외의 대상은 장개석 총통이 통치하는 중국과, 다수의 국가들이 참여하여 만든 국제기구인 유엔뿐이었다. 이 박사는 중국과 유엔으로부터 지원을 얻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박사가 당시 중국의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어떤 루트로 어떤 노력을 전개했는지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이제껏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이 박사가 중국으로부터 상당히 강한 지원약속을 받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국 측의 자료들이 있다. 중국 측의 자료들 중에는 이 박사가 장개석 총통에게 보낸 20만 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전보(1946년 2월), 남한의 정세를 보고하고 중국이 20만 달러의 자금을 제공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는 서한(1946년 12월), 자신의 중국방문 때 장개석총통이 베푼 후의에 감사하면서 다시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서한(1947년 10월) 등이 있다.

 

이러한 자료들, 그리고 이 박사가 1947년 4월 미국에서의 방문외교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중국을 방문하여 장개석의 환대를 받은 후 장개석이 제공한 중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귀국했던 사실, 1948년 유엔조선위원단의 방한 활동과정에서 위원단의 일원이었던 중국 대표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등에 비추어볼 때 이 박사가 중국정부 및 장개석 총통으로부터 상당히 강한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박사가 획득한 중국 정부 및 장개석의 외교적 지원과 재정적 지원은 이 박사가 미국 조야를 상대로 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외교활동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 획득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박사는 유엔에 대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유엔의 주요 회원국 대표들을 접촉해서 그들로부터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유엔회원국들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은 임영신을 통해 전개했다. 임영신은 이 박사가 의장이던 남조선대표 민주의원의 유엔대표자격으로 유엔본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 민주의원은 남한의 정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주의원의 대표라는 자격이 유엔에서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영신은 동아일보의 미국특파원자격으로 유엔 본부를 출입하면서 회원국 대표들과 접촉했다. 이 박사는 임영신에게 유엔회원국 대표들을 설득하여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면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규정하고 있는 모스크바협정이 자동적으로 무효화될 것이며, 한반도문제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장사 속’ 흥정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영신의 활동을 통한 이 박사의 유엔 외교는 인적 및 재정적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당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엔 상대 외교활동은 이 박사가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에 대해서도 외교활동을 전개하려는 의지를 가졌음을 확인해준다.

이 박사는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할 때도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한 활동과 더불어 유엔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었다. 이러한 유엔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한 이 박사 진영의 외교활동은 훗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게 하고 유엔의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가 이 박사의 건국노선에 부합하도록 하는 데, 그리고 건국된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건국 후 1950년대의 이 박사의 외교정책을 두고 대미일변도 외교(對美一邊倒外交)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이는 이 박사의 자주외교 의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국가의 상황이 대미외교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국가의 재정이 다변적 외교를 전개하기에 크게 미흡하여 불가피하게 대미일변도의 양상을 보인 것이지 자주적 다변외교의 필요성에 대한 이 박사의 인식이 결여되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3. 미국의 대한정책변화 유도

 

1946년 가을 이후 이승만 박사와 남한의 우익진영은 이미 북한에 소련의 조종을 받는 단독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상황에서 모스크바협정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주장하면서, 모스크바협정에 따른 신탁통치계획을 철회할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남한에서 민족의 자주의지에 따른 자율정부를 수립하여 미군정으로부터 조속히 벗어나려는 투쟁을 전개했다. 미군정은 우익진영의 그러한 요구 및 노력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미군정은 미국무부의 지시에 따라, 남한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미․소합의에 입각한 한반도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에 동조할 정치세력을 양성하고, 그들과 협조하여 모스크바협정의 틀 속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그러한 방침에 따라 미군정은 1946년 여름부터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구성된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하여 그 위원회의를 구심점으로 하여 중도파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1946년 가을에는 중도파가 남한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고 그 기구의 의원에 중도파인사들을 대거 임명했다.

 

미군정은 이 박사의 추종자들이 당선된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우익진영의 두 지도자인 이 박사와 김구를 과도입법의원 구성에서 배제했다. 나아가서 중도파의 김규식을 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만들고, 중도파의 안재홍을 미군정의 한국인 관리의 최고책임자인 민정장관에 임명했다. 이 박사와 우익진영은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에 대해 항의했으나 하지와 미군정은 이 박사와 우익진영을 완전히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박사를 탄압했다. 미군정은 이 박사에 연결된 정치자금 줄과 정보망을 차단하여 이 박사를 고립시키려 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으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낀 이 박사와 우익진영은 하지나 미군정을 상대로 해서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을 변경시킬 수 없다고 판단, 이 박사가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정부의 고위관리들과 담판해서 미국의 대한정책 변경을 유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김구도 동참했다.

 

당시 미국 정계에서는 이 박사에게 유리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친소경향의 사회주의자인 월러스(Henry Wallace)를 상무장관에서 해임시킨 것을 계기로 선임 대통령 루즈벨트의 우산 하에서 결합되어 있던 민주당 행정부 내 좌우파간에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월러스의 해임은 반공성향이 강한 우파인 트루먼이 자기 행정부 내에서 친소적 좌파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었다. 트루먼의 그러한 노력이 강화된다면 한반도정책을 소련과 합의에 의해서만 해결하려는 국무부 내 친소파의 영향력도 제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그해 가을의 중간선거에서 반공성향이 상대적으로 더 강한 공화당이 약진했다. 의회에서의 공화당의 약진은 미국 정계가 전체적으로 우경화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러한 의회의 동향은 미국행정부의 외교정책 전반 및 대한정책에서 우경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이 박사는 미국 정계의 이러한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자기가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행정부 고위관리 및 의회 지도자들을 설득하면 미국의 대한정책이 남한 우익진영이 희망하는 방향으로 변경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당연히 이 박사의 미국행을 방해했다. 당시 남한에는 미국의 민간여객기가 취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박사가 출국하려면 주한미군의 군용기를 이용해야만 했다. 미국무부의 지시에 따라 하지는 이 박사의 미군 군용기 이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박사는 도쿄의 맥아더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맥아더는 자기 휘하 군용기를 보내서 이 박사를 일본으로 오게 했다. 이 박사는 도쿄에서 맥아더와 회담을 갖고 한반도문제를 협의했다.

 

맥아더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가는 이 박사의 여행에 자기 휘하의 군용기를 제공하려 했으나 미국무부가 이 박사의 군용기 이용을 승인하지 않아서 자기의 개인 영향력으로 민간항공사의 여객기 이용을 주선하여 이 박사의 미국행을 도와주었다. 맥아더는 이처럼 이 박사를 일본으로 떠나올 수 있게 하고, 미국행 여객기 편을 주선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는 미국무부의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힐드링(John R. Hildring)으로 하여금 장차 이 박사의 면담요청이 있을 경우 그 요청을 들어주도록 주선해주기도 했다.

 

맥아더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도착한 이 박사는 곧장 미국정부와 언론매체들을 상대로 하여 강력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미국무부에 남한지역에 과도정부를 선거에 의해 수립할 것, 그 과도정부가 한국문제에 대한 미-소의 협의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유엔에 가입되어야 하며 한반도의 중요문제들에 대해 미․소와 직적 협상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남한주둔 미군은 북한주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주둔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건의서를 국무부에 제출했다.

 

그와 병행하여 “한국인의 독립열망이 즉시 실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미국무부 내에는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일부 인사들이 있어 이들이 한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의 공약 이행을 방해하고 있다”, “남한주둔미군 사령관 하지는 좌익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남한의 미군정은 공산당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는 이승만과 미국의 공동의 적이다”는 등의 매우 자극적인 성명과 발언을 쏟아냈다. 이 박사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면 크게 보도해주는 언론매체의 속성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박사는 이처럼 선전활동은 마음대로 했고, 의회의 반공성향 의원들과 많이 만날 수 있었지만 행정부의 고위관리들은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장관들도 만날 수 없었다. 미국무부가 각 부처에 대해 이 박사의 면담요청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주문해놓았기 때문이다. 미국방문 기간 중 이 박사가 만날 수 있었던 행정부의 고위관리는 국무부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힐드링 뿐이었다. 그가 힐드링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이 박사는 비록 미국 행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체류하는 기간 중에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외교정책기조를 변경했다. 그 변경을 확인해주는 것이 1947년 3월 12일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이다.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소련에 대한 유화-협력노선으로부터 강경-봉쇄노선으로 전환될 것임을 선언했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직후 미국무장관 마셜(George C. Marshal)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비협조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미국은 남한에 독자적인 계획을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천명했으며, AP통신은 그 ‘독자적 계획’이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트루먼 독트린이나 마셜의 발언은 이 박사의 방미외교활동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트루먼 행정부 내의 우경화기류 및 미국 정계의 전반적인 우경화 기류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실정을 모르는 남한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박사가 미국을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벌이는 기간에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박사의 방미외교가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방미외교활동은 방미기간 중에 일어났던 미국의 대외정책기조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지만, 훗날 미국 행정부와 의회로 하여금 한국문제에 대한 정책변화를 초래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도전에 대한 강경한 대응노선을 밝힌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후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낸 것으로 그의 방미외교의 주요활동을 마무리했다. 이 박사가 트루먼에 보낸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하는 전 세계의 자유애호 인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어왔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이러한 용기 있는 자세를 취함에 있어서 주한미군정 당국에 각하의 정책을 따를 것과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간의 연합과 협력을 초래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줄 것을 지시해주기 바랍니다.…한국의 애국자들은 각하의 감동적 메시지로 인해 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미군점령 지역에 과도적 독립정부를 즉각 수립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진격을 저지하는 보루를 구축할 것이며 남북한의 통일을 초래할 것입니다.”

 

 

4. 유엔조선위원단의 지지 확보

 

유엔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남북한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구성을 결의하고, 그 위원단의 구성국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등 9개국을 선정했다. 그 중 우크라이나는 한국문제 유엔결의에 대한 소련의 보이콧 방침에 따라 유엔한국위원단 불참을 선언했다. 그 결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나머지 8개국으로 구성되었다.

 

소련의 보이콧으로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지역에서의 선거실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유엔위원단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유엔위원단의 보고 여하에 따라 남한지역에서의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실시될 수도 있고 연기될 수도 있었다. 요컨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대한민국의 건국이 제때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여부가 유엔위원단의 결정 여하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위원단 구성국의 성향을 보면 중립국인 인도와 시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대체로 친미성향의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당시 좌경적 정부가 집권하고 있어서 그 나라 출신 유엔 대표들이 미국의 노선에 쉽게 호응하지 않았다. 남한지역에서의 선거실시에 대해 확고한 지지 입장을 취해줄 위원들은 중국 프랑스 필리핀 3개국의 대표뿐이었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유엔위원단의 강한 영향력과 그 구성원들의 경향을 파악하고, 유엔위원단으로 하여금 남한지역 총선실시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 위원단에 참여하고 있는 각 위원들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유엔위원단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대상은 인도 대표 메논(K. P. S. Menon)이었다. 인도는 당시 중립국이면서도 다소 친소적인 외교노선을 취하고 있는 국가인데다가 인도 대표 메논은 위원단의 의장이기도 했다. 메논의 향배에 따라 위원단의 입장이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박사는 메논을 ‘포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한 노력에는 영문학 전공의 여류시인 모윤숙도 동원되었다. 문학에 관한 담론이 매개가 되어 모윤숙과 메논은 돈독한 우정을 쌓게 되었으며, 그러한 우정은 메논으로 하여금 남한 총선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유엔위원단의 활동은 남한 총선 실시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며, 메논은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남한 총선을 거부한 김구에게 남한 총선 참여를 설득할 정도로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적으로 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한국에서 선거실시가 가능한 지역(즉 남한)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을 결의하면서 유엔한국위원단에 그 선거가 자유롭게 공명하게 이루어지는 지 여부를 감시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메논을 비롯한 유엔위원단은 미군정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 실시를 신속하게 추진했고, 48년 5월 10일 투표가 실시되고 그 결과가 발표되기까지 선거의 모든 과정을 면밀히 감시했다. 위원단 가운데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리아 등의 대표들은 5․10선거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감시활동을 전개했다.

 

5․10선거는 선거를 방해하려는 좌익과 남북협상파의 치열한 선전공세, 좌익세력의 폭동 파업 방화 시설파괴 등 폭력적 투쟁 속에서 실시되었다. 무장폭동으로 인해 선거가 실시될 수 없었던 제주도의 2개 선거구를 제외한 나머지 전 지역에서 투표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유권자들은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대파들의 치열한 저지투쟁을 극복하고 이처럼 투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데 감동된 유엔위원단은 5․10선거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평가를 발표했다. 위원단 의장대리 무길(Yushin Mughir) 시리아대표는 5월 11일 “5월 10일의 선거는 성공이었다. 나는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하였으나 이번 선거는 극히 양호한 선거이다.”라고 논평했다. 메논과 교체된 신임 인도 대표 싱(Bahadur Singh)은 “(이번 선거는) 세계 어느 나라의 선거에도 떨어지지 않는 선거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분위기가 완전히 보장된 것을 확인하는 바이다.”라고 논평했다.

 

이러한 위원들의 개별적 논평과는 별도로 유엔위원단은 5․10선거감시 최종보고서를 유엔총회에 제출했다. 그 보고서의 최종결론은 다음과 같다.

 

“위원단은 (5․10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얻었다. (A)선거준비기간과 선서실시 당일에 있어서 남조선에는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등의 민주주의적 제권리가 인정 및 존중된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가 존재하였었다. (B)재조선미주둔군 및 남조선과도정부는 선거수속에 관한 위원단의 건의에 응하였으며, 선거실시는 일반적으로 선거법 및 선거규정에 부합되었다. (C)선거는 조선독립재건에의 일단계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선거인들 앞에 제시된 유일한, 본질적인 문제였으며 등록과 투표의 양면에 있어서 우수한 성적을 얻게 된 원인이었다. (D)선거감시반의 보고서도 고려하고 또 조선국민의 전통적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1948년 5월 10일 선거투표의 결과는 조선의 (선거가) 가능한 부분이며 조선인구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있어서의 선거인의 유효한 자유의사의 표현이며 그들의 자유의사를 정확히 표시한 것이다.”

 

 

5. 유엔승인 획득 외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가까스로 건국되었지만, 대한민국의 앞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기는 했으나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토대와 군방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공산정권과 남한사회의 내부의 적이 대한민국을 살해하기 위해 안팎으로부터 협공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렵게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생존해나가자면 외부로부터 매우 많은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획득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대한민국에게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획득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유엔총회의 결의에 의해 건국된 국가이기 때문에 유엔총회가 건국의 정당성을 승인해주어야만 온전한 국가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가 정당하고도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1947년 가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선거실시를 결의할 때의 유엔총회에서의 미국의 영향력과 대한민국 승인문제를 다룰 1948년 가을의 유엔총회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이 처해 있던 국내외 상황은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낙관 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

 

우선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파가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5․10선거 무효화투쟁을 전개하면서 유엔총회가 개최되는 파리에 통촉의 대표단을 파견하여 유엔에 대해 대한민국 승인을 거부하도록 촉구할 계획을 세웠다. 남북협상파는 5․10선거 및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을 감시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된 유엔한국위원단을 상대로 대한민국 건국의 무효화를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국제적으로는 유엔한국위원단에 참여한 8개국 가운데 3개국(호주, 캐나다, 인도)의 대표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계산에 따르면, 호주․캐나다․인도의 영향을 받아 영국도 대한민국 승인에 반대태도를 취할 공산이 있고, 자칫하면 프랑스와 중동지역 국가들 및 북유럽지역 국가들도 승인반대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승인을 유엔의 승인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이 박사의 추측에는 한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위해 미국이 전력투구를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이 박사의 계산이 이러했기 때문에 이 박사는 매우 절박한 심정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 획득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노력을 전개했다. 이 박사는 유엔의 승인 획득 외교를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3 방면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제1방면은 미국에 있는 구미위원회 멤버들 및 미국인 친구들을 동원하여 미국무성을 공략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유엔의 한국승인을 위해 보다 열심히 노력해주도록 유도하는 활동이었다. 제2방면은 장면을 수석대표로 하는 유엔대표단을 파리에 파견하여 각국의 유엔대표들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하는 활동이었다. 장면을 유엔대표단의 수석대표로 선임한 이유는 유엔한국위원단이 장면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고, 장면이 가톨릭 교도인 것을 이용하여 카톨릭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제3방면은 조병옥을 대통령 특사로 임명하여 주요 국가들을 순방하여 그들 국가들로 하여금 유엔의 한국 승인에 대해 주도적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하는 활동이었다.

 

이러한 3개 방면에서의 활동은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미국도 이 박사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한국을 위한 득표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유엔총회가 개최되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 대한민국의 유엔승인 획득외교에 재를 뿌리는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여 전망을 다소 어둡게 했다.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여 국제사회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존속능력을 회의하게 했으며, 국회에서는 반정부 의원들이 제출한 미군철수결의안을 둘러싸고 정치적 소란이 일어나 한국이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통촉의 김구는 미․소군이 철수한 후 새로이 선거를 해서 한반도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런 내용이 담긴 서한을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냈다.

 

유엔의 한국승인문제는 총회폐막이 임박한 12월 6일에야 정치위원회에서 토론되기 시작했다. 정치윈원회는 장시간의 토론 끝에 12월 8일 한국문제를 총회에 상정키로 결정했다. 총회의 한국문제에 관한 토론은 그해 유엔총회의 마지막 날인 11일에 시작되었으나, 공산권 국가들의 필리버스터전술로 인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총회는 일요일인 12일 새벽까지 한국문제로 토론을 벌인 후 일단 정회에 들어갔다가 오후 3시에 회의를 재개하여 표결에 들어갔다. 표결결과 대한민국 승인 안은 찬성 40 대 반대 6의 압도적 다수로 통과되었다.

 

 

6. 국가생존력 확보를 위한 외교

 

유엔의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은 한국민족을 대표하는 국가로서의 정당성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받았지만, 국가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인 국민을 먹이고 국가를 지키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분단으로 인해 산업구조가 왜곡된 데다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가 크게 부족했고, 해외동포들이 남한지역으로만 귀국한데 더하여 북한으로부터 공산화에 반대하는 피난민들이 대거 월남한 바람에 대한민국에는 인구가 급증했다. 남한에는 일자리와 주택과 식량은 부족한데 인구는 넘쳐났다. 많은 인구가 실업자였고, 노숙자였으며, 굶주리고 있었다. 남한의 1인당 소득은 약 35달러 수준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심각한 지역은 수도 서울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프라에 적정한 인구는 50만 명이었는데 실제로 서울에 사는 인구는 1백50만 명 이상이었다.

 

이처럼 심각한 경제난으로 인해, 대한민국에게는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만해도 힘에 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경제난을 극복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국가를 지키는 일이었다.

 

북한은 국토완정(남한까지 인민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외치며, 그것을 군사력으로 실천하기 위해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했다. 소련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북한에 대규모 군사력을 양성해놓고 신형무기로 그들을 무장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그들로부터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받았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국방의 어려움과 경제난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신생 대한민국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해결하려면 외부의 원조가 시급했고, 한국에 그런 원조를 해줄 수 있는 국가는 오로지 미국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원조제공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경제원조 제공에도 인색했지만, 군사원조 제공에는 더욱 인색한 태도를 취했다.

 

이 박사는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얻어내기 위해 우선 미군정을 마치고 한국에서 철수하는 미군 병력이 보유했던 군사장비들을 양도받으려 했다. 이 박사는 미군들의 군사장비만이라도 양도받으면 한국군의 군사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미군정의 권한과 기능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하기 위한 미군과 한국정부간의 협정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면서까지 미군의 무기를 많이 양도받으려고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이 사용하던 무기를 양도하는데 극히 인색했다. 미국은 혹시라도 한국군이 강력해지면 통일을 위해 북침을 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군에 철저히 방어용무기만을 양도했다. 심지어 미국은 병사들의 기본무기인 소총마저도 북한군의 소총과 대등한 성능의 것으로 교체하는 일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한미군이 사용할 목적으로 한국에 반입되었던 많은 잉여물자들을 일본 등 외국으로 빼돌렸다.

 

주한미군의 군사 장비를 얻는데 성공하지 못한 이 박사는 미군이 철수한 후에는 미국정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무기제공을 호소했다. 이 박사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는 요구하지 않겠으나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필요한 무기만은 효과적인 무기를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한국정부는 탱크 전투기 등 효율적인 무기들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탱크는 한국지형에 맞지 않다’, ‘일본에 있는 미국 비행기들이 지체 없이 날아올 것이므로 한국에는 전투기가 필요 없다’는 등의 구실을 내걸면서 그런 무기들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 박사는 국내에서 미국을 상대로 “무기를 달라”고 외치는 군중시위를 대규모로 조직하여 미국을 압박했다. 그리고 1949년 3월 미군정 3년간 미 군정청 경무부장을 역임한 탓에 미국인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있는 조병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미국 관리들과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협상을 전개했다. 협상결과 미국은 한미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고 중․경무기를 포함 1억3천만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군사원조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에 무기를 지원하는데 소극적인 자세를 지속했다.

 

미국은 한국이 간절하게 요구하는 성능 좋은 무기를 제공하는 대신에 50년 1월 애치슨라인을 선물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애치슨은 한 연설에서 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열도-일본-유구-필리핀으로 연결되는 선(애치슨라인)이라고 발표했다. 이 애치슨라인에는 한국이 빠져 있어서 미국이 마치 한국의 방어를 포기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애치슨라인에 한국이 빠져 있다고 해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애치슨라인은 그 안에 들어있는 국가에 대한 침략은 미국이 단독으로라도 방어에 나선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며, 애치슨라인 밖에 위치한 국가에 대한 침략은 유엔의 틀 속에서 미국이 방어에 나선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애치슨라인이 풍기는 미국의 한국포기 인상은 한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한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온 자들을 고무했다.

 

미국이 한국의 적극적이고도 간절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해 무기도 제공하지도 않고 확고한 방어약속도 하지 않은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미국 군부의 전략가들과 대외정책 담당 고위관리들 사이에서는 ‘한반도는 소련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나 미국에는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미국의 국가이익에 중요한 지역이 아닌 한국에서 미국이 전쟁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조만간 공산화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미국의 전략가 및 관리들의 그러한 생각을 반영하여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미국이 남한지역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도록 도운 것은 임시방편적인 조치이며, 미국은 장차 대한민국을 소련에 포기할 것이라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미국이 한국의 방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도 한국의 방어에 필요한 지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이 태평양동맹결성 추진으로 나타났다. 이 박사는 필리핀․대만․한국 등 서태평양의 반공국가들과 미국이 참여하는 동맹체를 결성하면 한국의 방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대만의 장개석과 필리핀 대통령 퀴리노를 부추겨서 그것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되었다. 이 박사는 무기도 안주고 태평양동맹도 결성하지 않으려면 문서상으로라도 미국의 한국방어의지를 천명하는 한미방위협정을 체결해달라고 미국에 호소했지만, 미국은 그러한 호소도 외면했다.

 

이 박사는 북한공산군의 남침 가능성에 대비하여 대한민국의 방어력을 강화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외교적 노력을 치열하게 전개했으나 대한민국의 방어력강화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 전란극복 및 국가안전 보장 외교

 

이 박사가 우려했던 대로 북한공산군은 남침을 감행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 박사는 북한군이 남침해오면 반격을 가하여 쉽게 북진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런 호언장담은 북한의 남침의지를 꺾기 위한 블러핑에 불과했다. 이 박사는 내심으로 북한군이 남침해오면 한국군이 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이 박사가 그의 미국인 고문에게 전쟁이 날 경우 우리 육군은 ‘3일 간을 지탱할 탄약밖에 가진 것이 없다’고 실토한 데서 쉽게 확인된다.

 

북한공산군이 남침을 하자 다행스럽게도 미국은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북한군의 남침이 있기 전에는 한국의 방어를 위한 군사원조제공에 소극적인 미국이 북한군의 남침이 있자 한국방어에 신속하게 나온 까닭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공세에 대한 미국정계의 고조된 우려와 반공분위기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산군의 침략을 당한 한국을 구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나섰지만 미국 단독으로 나서지 않고 앞서 정한 방침대로 유엔의 틀을 이용하여 나섰다. 미국이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고 유엔의 틀을 통해서 행동하는 바람에 미군의 한국파견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늦고 규모가 작았다.

 

어쨌든 미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대한민국은 국토의 90%를 적에게 상실한 거의 다 죽은 목숨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다 죽어가는 대한민국을 살리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달성해줄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에 밀려서 후퇴한 이후 미국은 많은 미군 희생자를 내고 있는 6․25전쟁을 조속히 휴전시키려는 데만 집중하고, 한민족의 소원인 통일의 달성이나 미래에 있어서의 대한민국의 안전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미국이 휴전에 집중하면서부터 이 박사는 미래에 있어서의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격렬한 외교전을 전개했다. 이 박사는 휴전에 반대하면서 독자적으로 북진통일을 추진하겠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휴전반대 군중시위를 전개하여 미국에 압박을 가하면서 휴전을 하려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치들을 먼저 취해달라고 미국에 요구했다.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이 취해야 할 조치로서 이 박사가 생각하는 것은 한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대규모 군사원조, 그리고 미군의 지속적인 한국주둔 등이었다.

 

미국은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은 한국에 구조적으로 장기간 얽매이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박사의 그러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 박사의 생각에는 미래에 있어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미국이며,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해온 이상,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일본 등과는 동맹조약이나 안보조약을 체결한 이상, 한국과 그런 조약의 체결을 거부할 도덕적인 명분이 없다고 보았다. 이 박사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휴전협상을 담보로 잡는 전술을 취했다. 이 박사는 미국이 그러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으면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휴전협정이 체결되더라도 그것을 무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다 죽어가던 대한민국이 미국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된 처지에서 휴전을 담보로 잡고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대한민국이 또다시 공산군의 침략을 당하는 일을 막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염치’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 박사는 미국이 조속히 휴전을 성사시키고 싶어 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런 전술을 취한 것이다.

 

이 박사가 이처럼 휴전을 담보로 잡고 떼를 쓰자 미국은 이 박사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 박사가 휴전에 반대하면서 국회를 장악한 정적들과 싸우면서 정적들을 탄압하기 위해 위헌적인 조치들을 취하자 그것을 이용하여 이 박사를 제거하려 했다.

 

1952년 5월에서 6월 사이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은 이종찬 등의 한국군 지휘부가 주도하는 쿠데타를 통해 이 박사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놀랍게도 이런 쿠데타 음모에는 이 박사가 가징 신뢰하던 이기붕도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이 박사는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려 했다가 그런 조치를 취하지 말라는 미국의 경고를 받고 국회해산을 하지 않았으며, 국회도 이 박사의 협박 속에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한국의 정치적 위기가 진정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도 이승만 제거 쿠데타 계획을 중단했다.

 

이 박사는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대한민국과 사전협의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공산 측과의 휴전협상만을 진전시키자 더욱 강경하게 휴전협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 박사는 휴전협상에 참여해온 한국대표를 철수시키는가 하면 한국군을 유엔군으로부터 탈퇴시키겠으며,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환수하여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공산군과 싸우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미국은 1953년 4월에서 5월 사이에 이 박사를 제거하려고 했다. 미국은 휴전을 극력 반대하는 이 박사를 제거하고 유엔군 지휘하의 군사정권을 수립한다는 계획(암호명 Everready계획)을 수립했다.

 

미국이 그런 계획의 실행을 준비하고 있는 시기에 이 박사는 입장을 다소 완화하여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면 휴전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으며, 미국은 이 박사의 그런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로 하고 이 박사 제거 쿠데타 계획을 일시 중단했다. 미국은 이 박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실천하는 대신에 한국이 휴전에 협조한다면 한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담긴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전달 받은 후 이 박사는 그에 즉각 호응하지 않고 다시 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한국군의 20개 사단 규모 증강, 한국의 공군과 해군 증강, 즉각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방위조약체결 후 휴전협정체결) 등을 주장하며 휴전반대입장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거의 성사단계에 접어든 휴전협정의 체결을 방해하기 위해 1953년 6월 18일 한국군을 동원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격분한 미국은 또다시 이 박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실천하려 했다. 이번에는 이 박사를 제거한 후 군사정권이 아닌 미국에 순종적인 민간정권을 들어앉힐 구상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런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에 미국의회의 일부 의원들이 이 박사의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하는 등 미국정계의 반공분위가 고조되고 있는 점과 한국군 및 한국 국민의 이 박사에 대한 지지가 확고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박사 제거계획의 실행을 다시 중지했다. 미국은 이 박사를 제거하는 대신에 이 박사를 달래기로 했다. 미국은 이 박사의 협조 없이는 휴전협정의 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휴전에 동의하면 방위조약체결과 기타 원조를 제공할 것이지만 끝까지 휴전에 반대한다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기로 했다. 이러한 당근과 채찍을 전하기 위해 미국은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을 이 박사에게 파견했다.

 

로버트슨 특사를 맞이한 이 박사는 미국이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한국을 배반한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미국이 한국민의 통일열망을 외면하고 공산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미국이 또다시 한국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도덕적 차원의 압박을 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이 휴전협정 체결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적극적인 군사원조를 제공하며 유엔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시킨다면 한국은 휴전협정 조인에 참여하지는 않겠지만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고 종전의 입장을 완화했다. 이 박사는 로버트슨이 제시한 조건을 보면서 속으로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정(휴)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되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해 10월 1일에 체결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당초 이 박사가 요구한 사항을 100퍼센트 반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휴전 후 한국군은 미국의 대규모 군사원조를 받아 획기적으로 강화되었으며, 미군도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해 오늘날까지 주둔하고 있다.

 

 

맺 음 말

 

대한민국 건국 후 이 박사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전개한 외교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이 박사의 외교전술은 순전히 떼쓰기 전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박사는 한표욱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허약한 대한민국이 막강한 국력을 가진 미국을 상대로 흥정을 해서는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없으므로 포커게임에서의 블러핑 전술을 주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박사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강자의 약점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협박과 떼쓰기, 요즈음 말로는 ‘벼랑 끝 전술’을 주로 사용하여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확보했다.

 

미국은 자기들이 아니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 대한민국의 국가원수가 자기들의 말에 얌전히 순종하지 않고 미국을 상대로 블러핑을 가하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그리고 이 박사가 이런 블러핑을 가할 때마다 미국은 이 박사를 대통령직에서 쫓아낼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1950년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이 박사를 제거하는 쿠데타계획을 세웠다가 그만두곤 했다. 이 박사가 워낙 노련하게 외교게임을 전개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박사의 배후에는 그에 대한 한국민의 강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박사를 제거하는 대신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와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가가 존립이 어려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이 박사의 외교를 정리하면서 놀라운 점은 이 박사가 자기를 싫어하고 제거하려는 미국의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박사는 자기가 미국에 순종하지 않고 블러핑을 가한 탓으로 미국이 이 박사를 싫어하며 미국에 순종적인 다른 사람을 대통령에 앉히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 고문에게 거듭 말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박사는 미국이 싫어하는 짓을 더 해가면서 미국을 압박했다. 왜 그랬을까? 이 박사가 자기의 대통령 직 유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면 대한민국 정계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박사는 자기의 대통령 직 유지보다 조국의 안전을 확보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 박사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던지고 조국의 안전을 위해 그런 외교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이 박사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강화를 위해 조국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예사로 하는 요즈음의 정치지도자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정치지도자였던 것이다.

 

끝으로 새로운 문제 제기의 하나로서 추가해야 할 것은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의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또 한 번 생존 위기를 맞이한 대한민국은 ‘이승만 외교’를 통해 탈출구를 얻게 되는 데, 이 문제는 다른 기회에 다루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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