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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의 6.25 전쟁지도
작성일 : 2008/02/20 12:53 / 조회 : 4,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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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의전쟁지도(戰爭指導)

 

 

南 廷 屋*

 

1. 머 리 말

2. 전쟁 이전 이승만의 반공노선과 방위전략구상

3. 전쟁 발발 후 이승만의 전쟁목표와 수행방식

4. 전쟁 중 이승만의 전쟁지도

5. 맺 음 말: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의 평가

 

1.머 리 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건국 대통령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민족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권을 수호한 국가지도자였다.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영욕이 엇갈렸던 그의 일생과 업적을 대변하듯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야누스(Janus)로 포폄(褒貶)되고 있다. 그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인사들은 “이승만이야말로 건국의 원훈(元勳)이자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國父)로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대정치가”로 평가하는가 하면, 그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우리나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하고 있다.

 

대체로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승만을 희세(稀世)의 위재(偉才), 외교의 신, 대한민국의 국부⋅아시아의 지도자⋅20세기의 영웅,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 한국의 조지 워싱턴” 등으로 격찬하고 있다. 반면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은 “그를 남북분단의 원흉, 친일파를 비호⋅중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장본인, 남한의 대미종속을 심화시킨 미제의 앞잡이, 유엔의 문제아, 작은 장개석(蔣介石), 권력에 타락한 애국자, 한국전쟁을 유발내지는 예방전쟁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폄하(貶下)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함께 6⋅25전쟁을 지휘했던 한국과 미국의 장군들은 이승만을 훌륭한 영도자 및 반공지도자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나 역임했던 백선엽(白善燁) 장군은 “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어떠한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해도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또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클라크(Mark W. Clark)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나는 지금도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하고 있다”고 증언하면서 이승만을 위대한 사람(great man)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쟁 동안 제8군사령관을 오랫동안 지내며 이승만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도 이승만을 “위대한 한국의 애국자, 강력한 지도자, 강철 같은 사나이이자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흠모하면서,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밴플리트 장군의 후임인 제8군사령관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도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반공지도자로서 영도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기 이승만의 군사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엿 볼 수 있는 국내 연구는 4⋅19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문제에 가려져 부정적 또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들 연구 수준도 ‘이승만의 6⋅25전쟁지도’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일반적인 전쟁지도 이론 및 총론적 성격의 ‘전쟁지도(戰爭指導)’ 속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비록 2004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현대한국학연구소가 주최한 「이승만의 역사적 재평가」라는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이승만 연구의 지평을 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을 좀 더 심층적이고도 균형 있게 평가하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분석이다.

 

즉, 이들 논문들은 ‘이승만과 전쟁지도’를 주제로 한 학문적 연구의 최초의 시도라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전시 군사지도자로서 이승만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다소 한계를 안고 있다. 이들 논문들은 전쟁 상황이나 작전단계를 도외시한 채 정치적 사건과 연관지어 이승만이 통수권 차원에서 행사한 군 인사권에 집중하여 분석하고 있거나, 이승만이 6⋅25전쟁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전쟁목표와 이를 실현하고자 했던 전쟁수행정책 및 수행방식을 결여함으로써 전쟁지도에 대한 전체적인 면을 간과한 채 그 일부분만을 다루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전쟁 기간 이승만의 전쟁지도에 대한 논리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에 근거를 두고 전쟁 동안 이루어진 대통령의 전쟁지도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수반될 때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 성과의 한계와 미비점을 극복하면서 전쟁을 통해 이승만이 국가원수로서 국군통수권자로서 행정수반으로서, 특히 이를 통괄하는 전쟁지도자의 위치에서 미국 및 유엔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전쟁을 지도하고 수행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전쟁 이전 이승만의 반공노선의 실체와 이를 기초로 이승만이 국권수호를 위해 어떠한 전략을 구상하였는가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서 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추구하고자 했던 전쟁목표와 수행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전쟁 중 이승만이 어떻게 전쟁을 지도해 나갔는가를 작전단계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되 당시의 국내외 상황 및 전선 상황을 고려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제헌 헌법에 나와 있는 대통령의 권한과 책임에 기초하여 평가함으로써 이승만의 전시 전쟁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주로 이승만의 전시 행적과 전쟁지도를 엿 볼 수 있는 한국전쟁전란지을 비롯하여 이승만 대통령 담화집, 전시에 제정된 법률 및 긴급명령으로 공포된 대통령령,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 이승만의 전기 및 평전, 이승만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외교관⋅정치가⋅장군들의 회고록 및 전기, 그리고 전쟁을 전후하여 이승만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 성과를 활용했다. 그리고 당시 신문도 사실 이면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됐다.

 

2. 전쟁 이전 이승만의 반공노선과 방위전략구상

 

(1) 이승만의 건국사상과 반공 민주주의 군대의 건설

이승만의 건국사상은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지도이념인 반일⋅반공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 국제평화주의, 사회균등주의 등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승만이 가슴에 품었던 건국의 꿈은 모범적 민주주의 국가, 반소⋅반공의 보루, 평등한 사회, 모범적 예수교 국가, 그리고 문명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즉, 그는 대한민국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최대한으로 보장된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신국가의 구체적 정부형태로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선호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반공주의자였다. 그의 반공노선은 해방 후 냉전 상황에서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청년시절부터 꾸준히 러시아에 대한 경계의식 내지 반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광복 이후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청년시절 이승만의 반러의식은 글을 통해 표출됐다. 그는 1898년 󰡔협셩회회보󰡕을 통해 “부산 절영도를 러시아에 조차해 주려는 대한제국 정부 내의 움직임을 통렬히 비판”했고, 1910년 󰡔독립졍신󰡕에서는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해 일본 못지않은 침략야욕을 지닌 위험한 이웃”으로 보았다. 이승만의 반러의식은 1917년 볼쉐비키 혁명으로 공산정부가 들어서면서 반공사상으로 바뀌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하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로 보고, 이를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했다.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1933년 모스크바 방문 때 보았던 소련국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더욱 굳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을 위성국화 하는 것을 보고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이승만은 광복 후 귀국해서 잠시 조선공산당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좌우익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공산당과의 대결이 불가피해지자 이승만은 1945년 12월 19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연설을 통해 “극좌 공산당원들을 소련의 전 세계적 적화 정책에 농락당한 반민족적 이기주의자”로 낙인찍고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즉,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보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조국을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이란 것은 이론상 그럴 듯하지만 공산당만 이롭게 한다고 믿고, 이를 따르는 자들을 경원시했다. 나아가 그는 미국이 소련과의 협조를 우선시한 나머지 한국인에게 무분별한 좌우합작을 강요하면, 한반도에 폴란드의 루블린(Lublin) 정권과 비슷한 친소 괴뢰정권이 탄생하게 될 것이고, 결국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내전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반공운동은 ‘세계 모든 자유민들의 싸움’으로 표현했다. 이렇듯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건국 후 국시(國是)가 됐고, 국군도 반공민주주의 군대로 성장했다.

 

정부 수립 이후 국군은 건군의 이념적 토대로 헌법 전문에 나타난 자유민주주의, 국제평화주의, 자주독립정신, 의병⋅독립군⋅광복군의 민족 항쟁정신, 그리고 반공정신을 근간으로 삼았다. 또한 국군은 군내부에 침투한 좌익세력의 발호로 1948년 10월에 ‘여⋅순10⋅19사건’이 터지자 숙군을 단행하면서 정신전력 강화에 노력했다. 이에 국군은 6⋅25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으로 밀리는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국민당의 군대처럼 부대단위의 집단 투항과 같은 자멸적 상황을 초래하지 않았다.

 

(2) 이승만 정부의 연합국방과 미국의 철군정책

정부 수립 이후 국방정책의 기본 방향은 연합국방(聯合國防)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군통수권자 차원에서 강조됐다. 연합국방은 “국제공산주의 세력을 가상적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방역량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진영과 연합하는 것”이다. 먼저, 초대 국방부장관은 그의 취임사에서 “국제 공산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의 군사역량을 규합해야 하고, 한반도 전쟁에 대비해 미군의 작전지원이 가능하도록 연합국방을 기본축으로 하기 위해 [한국은] 지상군을 육성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김홍일(金弘壹) 장군도 “현대전의 특성을 단순한 무력전이 아니고, 정치⋅경제⋅무력⋅문화⋅외교⋅사상의 총력전이고 … 또 국제적으로 침략전선이 생기면 반침략 전선이 생겨 경제⋅정치⋅군사 세 가지를 종합한 대립적 국제연합전투체제가 형성되기 때문에 현대전쟁은 2개 국가간의 단순전쟁에서 집단과 집단간의 연합전쟁으로 변천하게 된다. [따라서] 일국의 총력국방은 국제간의 연합국방으로 변형된다”고 말했다. 이승만도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선포기념식에서 “모든 우방들의 호의와 도움이 없이는 우리[한국]의 문제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한미간의 친선만이 민족생존의 관건”이라고 말하면서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공주의에 사상적 근원을 두고 있던 그로서는 국제공산주의를 가상적으로 하는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연합국방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렇듯 건국 직후의 국방정책과 전략은 반공민주주의 군대를 육성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결집됐다. 또한 연합국방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국가와의 군사역량을 규합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군과의 공동작전을 고려해 군사외교활동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반공민주주의 군대 건설과 미국과의 연합을 상정한 연합국방도 미국의 소극적인 대한정책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여기에는 미국 국방부의 전쟁계획과 국무부의 봉쇄정책이 지향하는 바가 달랐고, 이에 따른 한반도에 대한 낮은 전략적 평가,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장차전에 대한 전쟁 양상에 대한 오판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의 팽창 위협에 맞서 국무부로 하여금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수립하게 하고, 합동참모본부로 하여금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전쟁계획(emergency war plan)을 수립하도록 했다. 국무부가 마련한 봉쇄정책은 소련의 위협 및 침략에 대비코자 소련 주변부에 대소 봉쇄선을 설정하여 소련이 이 선 밖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전후 미⋅소간에 설정된 한반도의 38도선은 소련의 침략을 저지할 봉쇄선이었다. 이에 반해 합동참모본부가 마련한 전쟁계획에 의하면 미국은 극동에서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도서방위전략(off-shore defensive perimeter strategy)을 채택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도서방위선으로 일명 극동방위선으로 지칭됐다. 극동방위선은 미국이 소련과의 전면전시 극동에서 소련의 공격을 막아내는 최후 방어선으로 이는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생해야만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봉쇄정책에 나타난 봉쇄선인 38도선과 미 합참의 전쟁계획 상에 나타난 극동방위선 간에는 개념 차이가 있었다. 봉쇄선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아닌 상태에서도 터키나 그리스에서처럼 소련의 세력 팽창을 저지하는 선인 반면, 극동방위선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만 효력이 발생되는 군사방어선이었다.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도 전쟁계획 상에 소련과의 전면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은 한반도의 봉쇄선인 38도선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극동방위선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없었다.

 

또한 전쟁 이전 미국의 고위 정책 및 전략가들은 한국 안보에 대한 위협을 외부에 의한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이 아니라, 당시 태평양 상의 모든 국가가 안고 있는 전체주의 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나 침투 등을 더 우려했다. 이는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태평양 지역의 다수의 나라들이 직접적인 군사적 공격보다는 내부의 경제적 곤란, 사회적 혼란 때문에 공산권으로부터의 전복 행위, 침투행위에 취약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은 대신에 태평양 지역에서 한국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외부의 침략위협 보다는 내부의 경제적 혼란과 전복 및 침투 등과 같은 국내의 내부혼란을 더 위협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므로 한국문제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던 미국 국무부와 육군부는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와 아울러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목표를 설정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태평양 상의 전략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주한미군 철수 이후 한국 안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 미국은 이러한 전략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한국의 안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미국은 한국을 방위하는데 있어 전면전쟁과 같은 외부의 대규모 침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치안유지와 38도선에서의 무력충돌과 같은 소규모 국경분쟁에 대처할 수 있는 정도의 한국군을 육성하고자 했다.

 

그 결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후 외부의 침략공격에 필요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고 내부의 혼란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소극적인 군사원조만을 실시하게 됐다. 또한 군사력을 건설하는데 있어서도 소규모 국경충돌 내지는 치안유지에 적합한 방어적 성격의 군대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면서 한국군의 훈련에 필요한 군사고문단만 남겨 놓게 됐고, 무기 및 장비에 대한 원조도 전투기나 전차 등과 같은 공격용 무기가 아닌 방어용 위주의 군사원조를 실시했다. 특히 미국은 미국 스스로가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낮게 평가해서 철수한 한국에 대해 소련이 장차 미국과의 전면전을 치를지도 모를 침략전쟁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3) 주한미군 철수 이후 이승만의 방위전략구상

한국은 정부 수립과 함께 미국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연합국방을 수립하여 미국과의 군사우호동맹을 맺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승만의 노력은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 전투부대의 완전 철수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전쟁 이전 수립된 미국의 전쟁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수립한 전쟁계획에 한반도가 전쟁지역에서 제외됨에 따라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원해제로 병력이 부족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략적 우선순위가 보다 높은 지역으로 병력을 전환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여러 차례에 거쳐 논의와 수정을 거치며 결정됐다. 최초 주한미군 철수 결정은 1948년 4월 2일 국가안보회의가 NSC-8에서 그 해 12월 31일까지 철군을 완료하도록 결론을 내렸다. 그 후 구체적인 철군계획은 9월 15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1월 15일에 완료하도록 수정됐으나, 철군은 계획대로 1948년 9월 15일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철군 과정 중에 일어난 여⋅순10⋅19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한국안보에 다소 불안을 느꼈고,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 및 국회에서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미군 주둔을 다시 요청하게 됐다.

 

이에 따라 미 육군부는 1948년 11월 15일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1개 연대규모의 전투부대만 무기한 잔류시키되 7,500명을 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가 한국을 승인하고, 12월 25일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를 완료했다는 성명이 발표되자 미국도 주한미군 철수를 다시 논의하게 됐다. 그 결과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1949년 3월 22일 NSC-8/2를 통해 1949년 6월 30일까지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하는 대신 한국에 군사장비 이양과 함께 군사고문단 설치, 100,400명(육군 65,000명, 해군 4,000명, 경찰 35,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NSC에서 결정된 주한미군의 철수사항을 1949년 5월 17일에야 무초(John J. Muccio) 대사를 통해 이승만에게 알려줬다. 이때 이승만은 한국의 안보에 필요한 방위전략 구상을 무초 대사에게 제의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구상이 주한미군을 대신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했고, 미국의 이러한 조치가 실현될 경우 전쟁억지력을 갖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승만의 전략구상은 첫째 대서양조약(Atlantic Pact)과 유사한 태평양조약(Pacific Pact)의 체결, 둘째 한⋅미 또는 다른 국가를 포함한 상호방위(mutual defense)협정의 체결, 셋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가운데서 미국의 우호조항(amity clause)을 재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이 태평양동맹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도 주한미군 철수가 임박해 질 때 나온 북대서양조약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서유럽에서 소련의 침략에 대한 집단안전보장책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 16개국이 1949년 3월 18일 북대서양조약(North Atlantic Treaty)을 체결한데 이어, 그 해 4월 4일 워싱턴에서 북대서양조약에 대한 조인식을 하자 태평양동맹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이승만은 이미 대통령 개인특사로 미국에 간 조병옥(趙炳玉)과 주미한국대사 장면(張勉)에게 태평양동맹 결성을 미국 정부에 제안하도록 지시한데 이어, 대통령 자신도 이의 실현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승만은 1949년 5월 2일 트루먼대통령에게 한미방위군사협정 체결과 함께 북대서양조약과 같은 태평양동맹을 요청했다. 5월 11일에는 주미자유중국대사가 태평양동맹 결성을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정식으로 제의했고, 여기에 태평양 연안국가인 필리핀과 호주의 유엔대표들도 동조하고 나섰다. 그 중 필리핀의 유엔대표 로물로(Carlos P. Romulo) 준장과 필리핀 대통령 키리노(Elpidio Quirino)가 태평양동맹 결성에 열성적이었다. 한국에서도 그 해 5월 18일과 5월 20일에 임병직(林炳稷) 외무장관과 이승만이 각각 반공진영의 결성체로서 태평양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한편 태평양동맹 결성에 적극성을 보인 사람은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공산군에 밀려 패색이 짙어가고 있던 장개석 국민당 총재였다. 장개석은 태평양동맹 결성을 위하여 직접 관련국을 방문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장개석은 1949년 6월 12일 개인자격으로 필리핀을 방문하여 키리노 대통령과 태평양동맹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 해 7월 6일에는 한국을 비공식 방문하여 진해에서 이승만과 태평양동맹에 관해 논의했다. 그 해 7월 10일 장개석은 키리노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필리핀을 방문하여 피서지 바기오(Baguio)에서 아시아 반공블록으로서의 태평양동맹 결성을 제의했다.

 

장개석-키리노의 태평양동맹 회담에 가장 고무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그 해 8월에 장개석과 키리노를 한국에 초청했다. 태평양동맹 문제로 한국⋅필리핀⋅자유중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한국과 자유중국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됐다. 장개석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8월 6일 진해(鎭海)를 방문하여 이승만과 태평양동맹을 논의했다. 그러나 8월 6일 미국 정부가 「중국백서(the White Paper on China)」를 발표하여 무능하고 부패한 장개석 정부를 더 이상 원조할 가치가 없다고 함으로써 이 회담에 찬 물을 끼얹었다. 이에 이승만-장개석 회담은 태평양동맹이 국제공산주의 저지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공동성명서만 남기고 8월 8일 끝났다. 그 후 미국의 간섭으로 필리핀의 키리노 대통령과 로물로 유엔대표가 태평양동맹에서 빠지자 이승만과 장개석이 주도했던 태평양동맹은 힘을 잃게 됐다.

 

한편 이승만은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한반도에서 안보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해를 미국의 해군기지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승만은 진해항 교섭을 위해 그의 정치고문인 윌리엄스(J. J. Williams)를 앞세웠다. 윌리엄스는 1949년 6월 초순 미국 퇴역해군제독 코프만(Kauffman)을 만나 진해 해군기지의 재 건립과 한국 해군장교 양성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윌리엄스는 미국 해군참모총장 덴펠드(Louis E. Denfeld)와 진해 해군기지 문제를 놓고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이승만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1949년 7월 8일 빈포드(T. H. Binford) 제독이 이끄는 태평양함대 소속의 미군함대의 한국방문을 기회로 손원일(孫元一) 해군총참모장에게 태평양함대사령관 래드포드(Arthur W. Radford) 제독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손원일 제독은 7월 18일 래드포드 제독에게 미 함대의 방문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진해를 비롯해 부산과 인천 등의 항구를 기지로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이것마저도 실패했다.

 

또한 이승만은 1949년 5월 2일 북대서양조약 결성에 즈음하여 “미국이 한국과 군사방위동맹을 체결할 경우 한국의 국내치안 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고, 아시아에서의 반공투쟁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방위동맹을 체결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무초도 5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은 제퍼슨 대통령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동맹을 체결한 일이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동맹체결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이 문제는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3월 8일 이승만은 “국무부는 현재의 미국 방위선 개념을 바꾸어 한국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북한과 우리 국민에 미칠 심리적 효과를 고려하여 각 군이 방위할 필요할 만큼의 전력을 갖추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한국의 산악지형에 전차가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기도하는 북진통일에 이들 무기가 악용될 것을 우려하여 제공하지 않았다. 1950년 1월 로버츠(William L. Roberts) 군사고문단장은 성명을 통해 “한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미국은 경제⋅군사원조를 모두 중단할 것이다 … 미군이 철수할 때 한국군에게 이월한 무기는 전차와 비행기를 제외한 소구경의 대포를 포함한 방어무기들로서 이는 남한이 무력통일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렇듯 이승만의 한반도 방위전략구상은 미국의 오해 및 무관심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 이전 이승만은 아무런 대비 없이 그저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쟁억지를 위해 국군을 아시아 최고의 반공 군대로 육성하고, 주한미군 주둔연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의 소극적 대한 정책과 전략으로 이의 실현이 불가능해지자 태평양동맹과 한미동맹, 진해기지 제공, 그리고 국군 증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미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의 전쟁 이전 한반도 방위전략 구상은 전쟁을 거치며 모두 실현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의 현실 국제정치인식에 따른 정확한 판단과 위기관리능력을 확인해 주는 증좌(證左)라 아니 할 수 없다.

 

3. 전쟁 발발 후 이승만의 전쟁목표와 수행방식

 

(1)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수행목표

이승만이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승만은 평생을 국권회복과 수호를 위해 노력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국권회복은 일제강점기로부터 건국 이전까지의 목표였고, 국권수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한반도에서 통일된 자주 민주국가가 건설될 때까지의 목표였다. 이승만은 국권수호 이외의 문제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국민의 복리증진도 주권이 굳건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국정부도 모두 자국의 이익에 우선하여 행동한다는 점에서 북한을 차지한 소련도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을 때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탁통치나 군정을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 외세의 착취수단으로 여겼다.

 

이승만은 국권회복을 위해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항일독립운동을 했고, 또 광복 이후 미⋅소의 냉전구도 하에서는 한반도의 완전한 자주⋅민주⋅통일국가의 수립이 어렵다고 보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통한 국권회복에 노력했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국권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즉, 이승만은 정부수립 이후 추진되었던 연합국방에 기초를 두고서 주한미군 주둔, 한미동맹, 태평양동맹, 국군의 전력증강,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한국방위보장의 선언을 얻고자 노력했다. 물론 이승만의 완전한 국권수호는 유엔의 한반도통일안이자 미국의 대한정책목표인 한반도에서의 통일⋅자주⋅독립된 한국(a united, self-governing, sovereign Korea)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의 국권수호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협의의 국권수호’는 유엔감시하에 남한지역에서 실시되어 수립된 대한민국의 국권을 공산침략으로부터 지키는 것이고, ‘광의의 국권수호’는 대한민국이 주체가 되어 한반도에 통일된 자주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는 제헌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헌법 제1조)’이라는 국체와 정체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헌법 제4조)’는 헌법 정신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광의의 국권수호(북진통일)를 전쟁수행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매진했다. 이승만이 국가원수로서 또는 국군통수권자로서 전쟁을 통해 얻고자 했던 국권수호는 그의 전쟁지도의 핵심이었다. 한반도 통일을 지향하는 이승만의 국권수호라는 전쟁목표는 북진정책 또는 북진통일로 정립됐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국군에게 내린 38도선 돌파명령, 38도선 무용론, 압록강 및 두만강으로의 진격, 국군단독의 북진 등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국이나 유엔, 그리고 유엔군으로 참전한 자유 우방국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이승만이 전쟁수행 과정에서 보여준 북진통일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집념과 무리수를 둔 외교 행보가 부담이 되기도 했다. 영국의 전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은 “영국이 이승만을 위한 북한 정복전쟁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미국이 이승만의 북진정책에 동조할 때는 “미국을 좌지우지하면서 미국을 자신의 정치 쇼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전쟁수행목표를 달성한 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건국의 후견인이자 전쟁의 주도국으로 한국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미국의 전쟁수행정책과 전략 속에 담긴 정책적 제한 요소 때문이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표방했던 전쟁목표는 전쟁이전 상태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수행의 전제조건은 제3차 세계대전의 방지였고, 미국은 이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미국의 전쟁지도부도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북진할 때도 “소련이나 중공이 개입할 징후가 없을 경우에만 국한 한다”라는 단서를 달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도선을 돌파할 때 미국의 전쟁지도부는 “소련이나 중공이 개입이 없을 경우에 한 해서 북진을 실시하도록 했고, 그것도 소만 국경지역에서는 한국군이 전담하도록” 지시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자 미국의 전쟁수행목표는 “미국이 한국에서 최종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통일⋅자주⋅민주 한국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대신 38도선을 확보할 수 있는 선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한 뒤 적당한 시기에 한국군을 제외한 외국군을 철수시키되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여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시킨다”는 것으로 선회했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 정부의 강력한 휴전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전정책에 따라 공산측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됐다.

 

이렇듯 이승만의 북진통일로 대표되는 전쟁수행목표는 미국의 전쟁목표에서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즉, 미국의 전쟁목표를 수행함에 있어서 소련이나 중공이 개입할 징후가 없을 경우에는 한미 양국이 공동의 전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38도선 돌파 및 한만국경으로의 북진을 결행했다. 그러나 중공의 직접적인 개입 또는 소련이 제3차 세계대전을 감수할 의도가 있다고 판단될 때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철수 내지는 38도선에서의 휴전정책을 추구함으로써 한미간 갈등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군 단독으로 실현가능성이 없는 북진통일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에 대한 지원을 얻어냈다.

 

(2)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수행방식

6⋅25전쟁은 국가적 위기뿐만 아니라 안보 및 경제적 측면에서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통수권자 이승만에게 크나큰 위기였다. 그는 북한의 침공을 받고 대한민국의 힘만으로는 ‘협의의 국권수호’마저도 어렵다고 생각했고, 미국의 참전과 유엔의 협력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것을 국가원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전쟁 당일부터 전쟁의 해결의 근본적 치유책이 될 미국의 군사지원을 얻는데 힘썼다. 이승만은 국내문제 및 군사상의 작전지도에 대해서는 국방장관과 육군총참모장에게 위임했고, 자신은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한 전시외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무초 미국대사, 장면 주미대사와 한표욱(韓豹頊) 참사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등과 긴밀한 접촉을 통해 한국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이승만은 전쟁 당일인 6월 25일 오전 11시 35분에 무초 미국대사의 방문을 받고 전쟁사태에 관한 중요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 약 7시간 만에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될 것인지를 무초와의 회담에서 밝혔다. 그는 “국군에게 시급히 필요한 소총과 탄약을 미국에게 요청하면서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들을 총력전 태세로 지도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국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되었던 제2의 사라예보(Sarajevo)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이 위기를 이용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서 그는 “미국의 여론이 공산주의 침략에 더욱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무초대사가 이승만과의 대화 내용을 그 날 14시에 전문을 통해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것이다.

 

내[무초]가 보기에 대통령[이승만]은 상당히 긴장한 듯 보였으나 태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나는 대통령에게 [경무대에] 오기 직전에 육군본부를 방문했는데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참모부와 미고문단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10시에 연합군최고사령관(SCAP: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에게 한국 상황을 알려주었다. 대통령은 나에게 한국은 더 많은 무기, 즉 소총과 탄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한국정부에는 암호장비가 없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 나는 대통령에게 미고문단이 38도선의 모든 한국군 사단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의 사기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14시에 국무회의(a cabinet meeting)를 개최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대통령은 서울에 계엄령(martial law) 선포를 고려하고 있으며,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필요할 경우 모든 남녀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돌멩이나 몽둥이이라도 들고 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호소해 왔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이런 방식을 택해서라도 그를 지지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무기와 탄약이 가용하다면 국민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 대통령은 한국이 제2의 사라예보가 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 현재의 위기가 한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한번 뿐인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대통령은 미국 여론은 공산주의 침략에 대해 더욱 더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초 미국대사와 회담을 마친 이승만은 13시경 국제전화로 주미대사관의 한표욱 참사관과 장면 대사에게 “저놈들이 쳐들어왔어. 우리 국군은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격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든 미국의 원조가 시급히 도착하도록 노력해야 겠다”라고 지시했다. 이 때 장면 대사와 한표욱 참사관은 국무부와 긴밀한 협조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지침을 받은 장면 대사는 25일 14시 10분(워싱턴 시각 25일 01시)에 국무부를 방문하고 한국의 지원요청 내용을 전달했다. 이 때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제기하기 위해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다”고 알려줬다. 한편 미국이 공식 요청한 안전보장이사회가 6월 26일 새벽 3시(미국시각 25일 14시)에 개최됐다. 개회와 더불어 유엔사무총장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보고서를 인용해 “유엔군 침략에 직면한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에는 유엔주재미국대표인 그로스가 무초대사의 보고서를 토대로 사태를 설명하고 결의한 초안을 낭독한 후, 피해 당사국인 한국대표의 호소를 듣자고 제안했다. 장면 대사는 “북한의 우리에 대한 침략은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한국정부수립에 유엔이 큰 역할을 했는데 평화유지에 기본 책임을 지닌 안보리가 침략을 적극 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라는 요지의 성명문을 낭독했다. 장면 대사의 유엔 연설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이승만은 26일 새벽 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요. 당신 나라[미국]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요.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요”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과 참전을 얻어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전선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되어가고 있었다. 북한군이 27일에는 서울 북쪽 외곽까지 진출해 있었고, 주한 외국인들과 군사고문단도 철수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승만은 27일 01시경(미국시각 26일 12시) 두 번째로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일이 맹랑하게 되어 가고 있다. 우리 국군이 용감히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게 너무 많다. 즉각 장대사를 모시고 트루먼을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장면 대사는 그날 15시(한국시각 27일 04시경)에 백악관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때 트루먼은 “한국정부⋅국민⋅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으며 국민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 때 미 독립군이 무기⋅식량난에 어려움을 겪으며 낙담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이 우리를 도와준 적이 있다. 또 1917년 유럽 제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아 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을 때 미국은 그 지원에 나선 적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장면을 격려했다. 이는 트루먼이 한국의 지원을 우회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전쟁수행방식의 1차 목표는 미국을 한국 전선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대미 외교에 매진했다. 결국 이승만의 노력으로 트루먼은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한국의 지원을 장면 대사에게 시사했던 것이다. 트루먼의 한국지원은 서울이 함락된 다음날 그 일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트루먼은 6월 29일 NSC에서 “나는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를 원한다 … 나는 우리[미국]의 작전이 그곳[한국]의 평화를 회복하고 국경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해 주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면서 미국의 참전의지와 전쟁정책을 밝혔다. 미국은 이러한 전쟁정책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6월 25일과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채택에 따라 해⋅공군을 먼저 파병했고, 뒤이어 6월 30일 국가안보회의의 결정에 따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또한 미국의 전쟁지도부는 참전결정과정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면서 한국에서의 전쟁은 유엔을 통해 해결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승만의 뜻대로 참전을 하게 됐다.

 

이승만은 미국의 참전과 유엔의 한국지원을 획득한 다음에는 총력전으로 전쟁을 지도했다. 6⋅25전쟁은 정규군만으로는 전쟁을 치룰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고, 전장은 독일의 루덴도르프(Erich von Ludendorff)가 말한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형적인 총력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 6⋅25라는 민족 최대의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이했던 한국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동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자발적으로 군대에 입대함은 물론이고, 각종 조직을 결성하여 혈전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여기에는 15세부터 17세까지의 소년지원병과 학생신분의 학도의용군, 미군의 군복에 한국군 계급장을 달고 싸운 카투사, 미군 전투병력 10만 명의 파병을 절약해준 지게부대인 노무자, 40여개에 이르는 국군 및 유엔군 통제하의 유격대, 우익청년들로 구성된 대한청년단, 국립경찰, 여군, 반공인사들로 구성된 자생 유격대, 그리고 예비전력으로서 국민방위군 등 다양한 참전단체 및 국민들이 동참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전선에 뛰어 들었다.

 

이렇듯 이승만은 6⋅25라는 국가적 위기를 오히려 호기로 판단하고 전쟁을 지도해 나갔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은 이승만이 바라는 대로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고, 이승만은 전쟁 당일 무초 미국대사에게 말했던 것처럼 전 국민이 동참하는 총력전하에서 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됐다. 그는 비로소 마지막 기회가 될 완전한 국권수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됐다. 그에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전쟁목표인 북진통일을 위한 힘찬 행군만이 남아 있었다.

 

4. 전쟁 중 이승만의 전쟁지도

이승만의 전쟁지도 관점에서 볼 때 6⋅25전쟁은 크게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북한의 기습남침과 미국 지상군의 참전이후이다. 시기구분은 6⋅25전쟁 양상의 변화적인 측면과 한국 정부, 즉 이승만의 전쟁지도라는 측면에서 한국이 전쟁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전쟁목표와 전쟁수행정책의 일관성을 고려한 것이다.

 

먼저, 전쟁 양상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6⋅25전쟁은 최초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일어난 ‘사변(事變) 또는 동란(動亂)’의 성격을 띤 북한과 한국간의 양자대결이었으나, 유엔의 결의에 따라 북한이 국제평화를 파괴한 ‘불법 침략자’로 낙인찍히면서 미 지상군이 참전하면서부터 전쟁 양상은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됐다. 이러한 국제전 성격은 중공이 개입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이승만의 전쟁목표는 이 두시기 전쟁수행방식에서 방법만 달리했을 뿐 완전한 국권수호와 북진통일로 불변했다.

 

둘째, 6⋅25전쟁을 통해서 나타난 이승만의 전쟁지도는 일관성을 유지했다. 일견(一見), 6⋅25전쟁에서 이승만의 전쟁지도가 없었다거나, 있었다하더라도 미군 참전 이후 또는 이승만이 부산으로 떠난 이후 그리고 이승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 지휘권을 이양한 이후에는 통수권 차원의 전쟁지도를 하지 못했다는 반론도 있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6월 25일 오전 무초 미국대사의 예방을 받고 전쟁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북한의 남침이 통일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의 전쟁목표는 한반도 통일이었고 그 방식은 힘에 의한 북진통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전쟁목표는 전쟁수행방식만 달리했을 뿐 전쟁기간 내내 유지됐다. 다만 전쟁 초기 이를 달성하기 위한 단기목표로 그는 미군과 유엔군의 지원을 얻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미국이 참전한 이후에는 전쟁 국면의 변화와 관계없이 북진통일을 위해 매진했다.

 

(1) 북한 남침 이후부터 미국 지상군 참전 이전까지(’50.6.25~6.30)

이 시기는 6월 25일 04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부터 개전 당일 서울의 관문인 개성과 동두천이 함락된데 이어 4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병력과 장비의 절반을 상실한 국군이 한강 남쪽으로 밀려나 최후의 방어선을 편성한 6월 30일까지의 상황이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04시를 전후하여 전 전선에 걸쳐 포격을 개시했고, 동해안에서는 특수훈련을 받은 부대를 강릉일대와 부산지역으로 상륙시키려고 했다. 6월 25일 10시부터는 벌써 북한 비행기가 김포와 여의도 공군기지를 정찰한 후 정오경에는 야크(YAK) 전투기 4대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용산역과 통신소 등 서울시내 주요 시설에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육상⋅해상⋅공중 등 3면에서 공격을 감행해 왔다. 특히 북한은 오전 11시경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군은 자위조치로써 반격을 가하여 정의의 전쟁을 시작했다”고 하면서 선전포고를 했고, 13시 35분에 김일성은 “남한이 북한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했으며, 이는 북한의 반격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남침은폐용 방송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국군은 개전 4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한강 이남에서 삼척을 연하는 선’에서 급편방어를 하게 됐다.

 

그러면 이 기간 북한의 기습남침을 받은 대한민국 전쟁지도부는 어떻게 조치하고 있었는가? 먼저 전쟁지도부의 유무에 대해서 살펴본 다음, 전쟁 상황을 가장 먼저 인지한 육군총참모장과 국방장관 그리고 대통령의 작전 및 전쟁지도에 대해 고찰하겠다.

 

먼저, 6⋅25전쟁 당시 한국에도 미국의 국가안보회의와 같은 기능을 가진 전쟁지도부가 있었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에는 미국의 전쟁지도부에 해당하는 국가안보회의와 같은 체계적인 전쟁지도기구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이전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국방기구가 설치돼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치된 최고국방위원회이다.

 

전쟁 이전 이승만이 최고국방위원회를 운영했음이 미군사고문관에 의해 확인됐다. 육군총참모장 고문이었던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는 “1주일에 한 번 이상 이승만 주재로 열린 국방회의[최고국방위원회]에 참석했다”고 회고했다. 여기에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방장관, 육군총참모장, 주한미군사고문단장, 육군총장고문관 등 5명이 항상 참석했다. 하우스만 대위는 대통령의 군사고문 역할도 했다. 이승만은 하우스만을 불러 “[요즘] 군의 형편은 어떤가. 자네는 군대 증강 일에만 열심히 한다지. 군인이 정치에 관심을 두면 안돼”라고 충고를 했다. 이처럼 이승만은 수시로 하우스만을 불러 군사관계를 묻고 했기 때문에 육군 대위 계급이면서도 대통령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이렇듯 이승만은 주 1회 이상 ‘한미연합국방연석회의’를 통해 한국군 전력 증강을 위한 무기지원, 한국군의 훈련 상태 등을 수시로 점검하고 확인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최고국방위원회가 미국 NSC와 같은 국가전략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미국의 최신 군사정보를 비롯해 한국군 간부의 동향 및 한국군의 작전능력을 수시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의 장(場)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少將)과 국방장관 신성모의 동향 및 조치이다. 채총장은 전날(6월 24일) 밤 있은 육군회관 개관 축하 연회 때문에 늦게 귀가하여 취침 중에 기습남침보고를 받고, 그날 05시에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각 국장을 비상소집하라”는 구두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서 그는 국방장관 비서와 함께 신국방장관의 관사로 가서 07시경 북한의 침공상황을 보고했다. 신국방장관은 10시 30분경에 경무대에 도착해서 대통령에게 “개성이 함락되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군이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라고 보고했다. 이로써 북한의 기습남침 상황은 전쟁 발발 6시 만에 육군총참모장과 국방장관(국무총리서리로서 국무총리 겸직)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 됐다.

 

이후 채총장은 28일 수도 서울이 피탈될 때까지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 전선을 7차례나 방문하는 등 전쟁 전반에 따른 작전지도 보다는 일부 전선에 치중하는 국지적인 작전지도를 함으로써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됐다. 이처럼 전반적인 전황을 파악하여 작전적 또는 전략적 차원의 적시적인 지휘결심을 해야 될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전방지역 전선시찰, 비상국무회의, 비상국회, 국방수뇌회의, 군사경력자 회의 등 각종 비(非) 작전적인 회의에 불러 나감으로써 전반적인 작전지도에 차질을 가져오게 했다.

 

즉, 채총장은 지상 작전을 총괄하는 육군 총수로서 주요 전투지역을 방문하여 현장지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오로지 의정부 축선에만 매달림으로써 타 지역의 전선 상황은 알 수도 없었고 적절한 조치도 내리지 못했다. 그가 초전 3일 동안 수행했던 일은 전쟁 전체 국면을 보고 작전을 지도하는 육군 총수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의정부지역의 1개 전선사령관 역할이었고 신국방장관의 조급증을 해소해 주는 연락장교 역할에 불과했다. 3일 동안 밤낮없이 오로지 의정부의 현장지도에만 매달려온 그에게 남는 것은 전신을 가누지 못할 피로뿐이었다. 김홍일 소장은 “채총장은 수일의 피로를 못 이겨 담화 중에도 코를 골며 잠꼬대를 하는 처지이니 작전을 지도할 정신적⋅체력적 여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했던 것은 두 사람의 발언이었다. 25일 10시 30분경 대통령에게 드린 최초 보고에서 신국방장관은 “적이 38선을 넘어 남침하고 있으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각하의 신금(宸襟)을 어지럽혀 드린 일은 송구스럽기 짝이 없으나, 충용무쌍(忠勇無雙)한 국군은 적을 격퇴하여 수일 내에 북한을 수복해 보일 것입니다”라고 호언했다. 6월 25일 14시에 개최된 비상국무회의에서 채총장도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하였으나 격퇴가 가능하다”고 발언했다. 다음날 26일 11시 비상 국회에 참석한 신국방장관은 “3~5일 내에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주장했고, 채총장도 이에 가세하여 “의정부에서 적을 격퇴하고 있으니, 3일내에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허세를 부렸다. 27일 01시 비상 각료회의에 이어 열린 비상국회에 참석한 신국방장관은 의정부가 함락된 상황을 고려하여 “정부의 수원 철수 가능성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총장은 오히려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이러한 채총장에 대해 하우스만 대위는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그는 “채병덕은 25일 국회에 불려 나가 증언석에서 졸다가 국회의원들에게 호통을 맞았고, 의정부 전선 시찰 때도 입에 전날 먹은 술 때문에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의 반격론이었다. 국회 증언과 육본 발표를 통해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 지금 국군은 반격중이다’라고 거짓 발표를 해 서울을 아무런 피란 준비도 못하게 한 채 고스란히 적 수중에 던져 넣었다”고 비판했다.

 

채총장과 신국방장관의 전시지도능력에 대해 하우스만의 증언은 매우 분석적이다. 그는 증언에서 “채병덕과 신성모는 모두 한국전과 같은 미증유의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다 해도 막강한 탱크 병력을 앞세우고 무적의 황무지를 달리듯 쳐내려오는 북한군을 성공적으로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채총장이나 신국방장관이 이것만은 잘했다는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고 비판했다. 강문봉(姜文奉) 장군도 채총장에 대해 “채병덕의 결함은 치명적인 결함이라 하겠다. 특히 군인으로서 최고의 작전지휘관으로서 그렇다. 그것은 그의 전술능력의 부족 … [즉] 군사전문지식의 결여 … 작전지휘관으로서의 전술능력의 부족이다. 전술능력의 부족은 패장을 낳게 하고 패장에 대한 평가는 혹평에 그치기가 일수이다”라고 혹평했다.

 

셋째,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의 동정 및 전쟁지도이다. 본론에 앞서 그 당시 이승만의 통치스타일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승만의 전쟁지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건국 이후 국무위원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부수립 초기부터 경험과 훈련이 부족한 각료들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맡길 수 있을지를 놓고 고심했다. 건국초기 각료들은 자신들이 해결할 문제들을 미루고 대통령의 최종 결정만을 기다렸다. 여기에는 이승만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잦은 각료교체로 자신의 분야에 경험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정부수립 후 짧은 기간 동안 최고 통치자의 결정이 아니고는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전쟁 발발 이후 비상 국무회의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전쟁 초기 이승만은 국내 문제는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인 신성모와 각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국의 지원을 얻는데 필요한 외교적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25일 10시경에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이때부터 전쟁지도에 들어갔다. 즉, 이승만은 6월 25일 10시경에 비원내의 반도지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 경무대경찰서 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대거남침’ 상황을 보고 받고 경무대 관저로 돌아왔다. 이승만은 10시경에 경무대에 도착한 신국방장관으로부터 최초의 전황을 10시 30분경에 보고받고 임시국무회의의 소집을 지시했다. 이 때 이승만은 한국군 단독으로는 북한의 남침을 막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국의 지원과 유엔의 개입을 위한 전시외교에 주력했다.

 

이승만은 25일 11시 35분에 무초 미국대사의 방문을 받고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13시에 주미대사관에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도록 지시했다. 이어 14시에는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사태를 논의했으나 전차나 전투기를 막을 수 있는 뾰족한 수단을 강구하지 못한 채 산회했다. 그 후 전선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이승만은 25일 밤 10시에 무초 미국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여기에는 이범석과 신성모 등 전⋅현직 국무총리가 자리를 함께 했다. 이 회의에서 대통령이 “대전으로의 천도를 밝히자 무초 대사는 이를 반대하면서 자신은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더라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는 이승만이 ‘서울 천도’를 내세워 미국의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한 외교적 제스처로 판단됐다. 이승만은 미국이 이제까지 한국지원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자 이를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승만은 25일 밤을 앉은 채로 꼬박 세웠다. 경무대비서들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북한 야크기는 이날 밤에도 서울 상공을 선회했고 그때마다 공습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혈안이 됐다. 이승만은 26일 0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에서의 전쟁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전화를 했고, 04시 30분에는 무초 대사에게 전화를 해서 “극동군사령관과 참모장에게 한국군에게 필요한 전투기와 탄약 등을 요청하려고 전화했는데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무초 대사는 05시에 이대통령과의 통화내용을 국무장관과 맥아더에게 알리고 신속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서 대통령은 이 날(6월 26일) 아침에 치안국을 방문해 경찰계통으로 들어온 전황을 확인했다. 한편 이날 10시에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신성모 국방장관이 주재하는 군사경력자회의가 중앙청에서 열렸으나, 신장관과 채총장의 낙관론에 밀려 한강선 결전방어 등의 좋은 의견이 나왔음에도 서울고수로 결정됐다.

 

6월 26일 13시경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함락된 이후 대통령의 피난문제가 나왔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는 전황 보고가 뒤죽박죽인데다 신장관의 “계속 걱정하실 것 없다”는 말로 사태를 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16시께 프란체스카 여사는 비서들에게 기밀서류를 챙기게 한 뒤 자신이 교통장관에게 특별열차를 대기하도록 연락했다. 그런데 신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와서 “각하 별 일 없습니다, 사태는 호전돼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프란체스카 여사는 피난준비를 취소시켰고, 대통령도 내일 아침(27일) 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자 비서들이 피난열차를 대기하도록 교통장관에게 연락했다. 대통령은 새벽 1시에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트루먼에게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 무렵 조병옥씨와 서울시장 이기붕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와서 “각하, 사태가 여간 급박하지 않습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날보고 서울을 버리고 떠나란 말인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말했다. 조병옥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비서들에게 “각하의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빨리 서둘러 피난을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설득에 대통령도 할 수 없이 서울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이승만은 27일 11시 40분에 대구에 도착했으나, 대통령의 지시로 기차를 다시 돌려 16시 30분에 대전에 도착했다. 이 때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 참사관이 와서 유엔안보리에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위와 그 결과로 얻어진 유엔의 결의, 그리고 미국의 공식적인 태도를 밝히면서 ‘이제는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들의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 말을 듣고 대전 역장실에서 충남지사 관사로 자리를 옮겼다. 대통령은 27일 밤 12시께 전쟁 이후 처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 때 대통령이 권총을 꺼내 베개 밑에 넣는 것을 본 비서가 “각하, 무슨 일입니까? 어, 자네가 보았구먼. 권총이야.” 대통령이 내민 소형 모젤 권총엔 탄환이 장전돼 있었다. “내 아까 누구 보고 애기하여 한 자루 구해달라고 했지. 급해지면 나도 한 두 놈쯤 거꾸러뜨릴 수 있지 않겠어. 마지막 남는 총알은 우리 몫이고 ….” 대통령은 이때부터 부산 피난시절 3년 동안 권총을 침대머리 시트 밑에 숨겨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는 국란을 맞이한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의 사생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7일 저녁부터 7월 1일 부산으로 이동할 때까지 이승만은 대전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28일 아침 이승만은 충남도지사실에서 임시 각료회의를 열었고, 이 날 회의에서 총무처장관이 신국방장관을 경질하고 이범석 장군을 임명하자고 건의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29일 8시 30분에 무초 대사는 충남지사로 대통령을 예방하고 맥아더 장군의 내한 소식을 전했고, 이튿날 대통령은 수원비행장에서 맥아더 장군과 회동했다. 이승만은 맥아더를 소령 때부터 알았다. 맥아더의 장인이 한국우호연맹(League of Friends of Korea)의 고참멤버로 이승만이 독립운동할 때부터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맥아더의 한국전선 결과 보고서가 미 지상군 참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6월 30일 한국 전선에 미 지상군을 참전하기로 결정했고, 여기에 맥아더의 미 극동군이 참전하게 됐다.

 

이로써 이승만의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피눈물 나는 전시 외교노력은 미국의 참전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됐고, 한국군은 이제 강력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됐다. 이승만은 이제 미국의 참전과 유엔군의 지원에 힘입어 북진통일을 위한 힘찬 거보를 내딛게 됐다.

 

(2) 미국 지상군 참전 이후부터 휴전협정 체결까지(’50.7.1~’53.7.27)

이 시기는 미국 지상군이 참전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유엔군사령부설치 결의안 채택, 인천상륙작전과 38도선돌파, 북진, 중공군 개입 및 대공세에 따른 유엔군의 37도선 이남으로의 철수, 38도선에서의 전선 교착과 휴전협상 개시, 그리고 휴전협정 체결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흐름은 미국의 전쟁정책을 바꾸어 놓았다. 즉, 참전 이후부터 낙동강 방어선 전투까지 미국의 전쟁목표는 ‘전쟁이전 상태의 회복’이었고, 인천상륙작전이후에는 ‘국제평화와 그 지역의 안전유지 및 통일한국’이 정책목표였다. 이는 이승만의 북진통일과 일치했다. 그런데 중공군 개입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서 철수를 고려했고, 전선이 38도선에서 다시 교착되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전쟁 초기 목표인 전쟁 이전 상태의 회복으로 회귀했다. 미국은 이러한 정책변화 속에서 전쟁을 지도하고 수행해 나갔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전쟁지도는 미국의 전쟁정책의 변화에 관계없이 오로지 북진통일과 국권수호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의 전쟁지도는 미국의 정책과 주기가 맞을 때는 공조체제를 유지하며 한미간에 문제의 소지가 없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한미간에 심각한 갈등기류가 형성되었다. 특히 이승만이 주도하는 휴전반대, 한국군의 단독북진, 반공포로석방 등과 같은 미국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여 시행여부를 판단하기까지 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승만의 전쟁지도를 고찰했다. 이승만은 전쟁 동안 헌법상의 비상대권을 통해 전쟁지도를 수행했다. 이승만의 전쟁지도의 범주에는 대통령의 취임선서에 있는 국가보위, 긴급처분 및 명령권, 국군통수권, 계엄선포권, 그리고 주요 군인사권 등이 포함돼 있다.

 

첫째, 대통령이 취임선서 때 행하는 국가보위는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준수해야 될 가장 중요한 책무이다. 대통령의 국가보위는 국권수호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이렇게 볼 때 국가보위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전쟁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북진통일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전쟁기간 이승만의 국가보위는 북진통일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었다. 이승만은 1950년 7월 10일 국군과 미군이 힘겨운 지연작전을 전개하고 있을 무렵에 “이제38선은 자연 해소됐다”고 외쳤다. 또 7월 13일에는 “북한의 공격으로 과거의 경계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분단된 한국에선 평화와 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고 이승만은 발표했다. 7월 13일 맥아더도 동경을 방문한 합참 요원에게 “북한군을 38도선 위로 몰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격파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가능하게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얼마 후 미 국무부 내부에서도 참전 목적을 놓고 열띤 논의가 벌어지자, 7월 17일 트루먼은 NSC에 “유엔군이 38도선에 도달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작성된 NSC-81/1에서는 “유엔군은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내거나 이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38도선 이북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합법적인 토대를 가져야 한다. 미 합참은 가능한 한 북한 점령을 계획하도록 맥아더에게 전권을 주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승만도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9월 19일 부산에서 “유엔군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출 수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선이 호전되어 동해안의 국군이 38선에 도달하자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일권 총장을 불러 ‘북진명령’을 내렸다. 이 때 맥아더 사령부는 아직 유엔 결의가 없으니 명령이 있을 때까지 38선을 넘지 말라고 했다. 따라서 정일권 총장은 이때를 “내 생애 3번 있은 위기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이후 이승만은 평양 및 원산탈환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통일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통일의 막바지에서 벌어진 중공군의 개입은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쐐기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 이후 미국의 정책은 “미국이 한국에서 최종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통일된 자주⋅민주 한국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우선 38도선을 확보할 수 있는 선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한 후 적당한 시기에 한국군을 제외한 외국군은 철수시키되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여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와 이승만의 강력한 반대, 특히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경대응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휴전협상에 걸림돌 역할을 하는 이승만을 전쟁 중 두 차례에 거쳐 제거하고자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비록 북진통일이라는 전쟁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전쟁이전, 아니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후 한국이 갈망해왔던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했고,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실현하게 됐다.

 

둘째, 이승만의 국군통수권자로서 전쟁지도이다. 이승만은 통수권자로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국군사사절단을 편성했으며, 헌법상에 명시된 국군총사령관 임명을 비롯해 전쟁 이전 현역 및 예비역을 합쳐 14명에 불과했던 장성들을 부대증편과 지휘구조에 맞춰 대장(大將)으로 임명하는 등의 군 인사권을 행사했다.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선 시찰 때 총참모장 교체 제의와 전쟁초기 실패 책임을 물어 채병덕 장군을 그 직에서 해임하고 정일권(丁一權) 육군준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정일권의 총참모장 기용은 이승만에 의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6월 30일 18시경 임시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충남도지사실로 호출했고, 정일권은 수원에서 출발하여 대전에 21시에 도착했다. 이승만이 정일권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신국방장관이 배석했다. 이승만이 준 임명장에는 대통령 친필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임명장. 육군준장 정일권, 명(命) 육군소장. 보(補)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 1950년 7월 1일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이승만이 정일권 장군을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헌법 제72조에 명시된 ‘국군총사령관 임면(任免)’에 근거를 두고 실시한 인사였다.

 

이승만은 7월 7일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창설결의안이 채택되고, 다음날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자, 그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위임했다. 이승만은 7월 15일 맥아더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현재의 전쟁상태가 계속되는 동안(during the period of the continuation of the present state of hostilities)" 한국의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위임한다고 밝혔다. 이틀 후인 7월 17일 맥아더 장군은 워커 제8군사령관에게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할 것을 지시했고, 7월 18일 맥아더 장군은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이승만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미 제8군사령부의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는 제8군과 한국의 육군본부가 상하관계라는 위치 때문에 작전을 하는데 있어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이에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작전을 실시함에 있어서 한국의 육군본부에 명령하기 보다는 요청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한국군과 조화를 이루며 효율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이승만은 유엔군과 작전수립과정에서 한미간에 갈등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군부사령관을 한국군 장성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이 언어장벽 및 작전상의 혼선을 들어 한국군 부사령관 임명에 반대하자 대신 작전계획 수립과정에서 한국의 의견을 반영할 ‘한국군사사절단(Korean Liaison Group)'을 편성하여 유엔군사령부에 파견했다.

 

이승만은 전쟁 이전 일부 대령이 보직했던 사단장을 준장 또는 소장으로 격상하여 미군과 그 격을 맞추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성들도 전쟁 이전에는 현역과 예비역 등 총 14명에 불과했으나, 미군 참전 이후 육군본부 참모 및 사단장에 보직된 대령들을 장군으로 진급시켰다. 여기에는 김백일, 백선엽, 김종오, 이성가, 송요찬, 이종찬, 백인엽, 장도영, 강문봉, 이한림, 유승열 등이 준장으로 진급했고, 나중에는 전쟁 초기 군단 참모장과 연대장을 지낸 대령들이 장군으로 진급하면서 사단장으로 진출했다. 이들로는 최영희, 최덕신, 김익열, 박임항, 김동빈, 유흥수, 최창언, 함병선, 김웅수, 강영훈, 최석, 백남권, 민기식, 김종갑, 박병권, 김점권, 신상철, 김용배, 임충식, 오덕준, 임부택, 윤춘근, 송석하 등이 있다. 그리고 군단장 보직을 받은 유재흥과 김백일이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외에도 나중에 군단장에 보직된 장군으로는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 강문봉 장군 등이 역임했다. 총참모장 가운데 육군은 채병덕, 정일권, 이종찬, 백선엽 장군이 역임했고, 해군은 손원일 제독이, 그리고 공군은 김정열과 최용덕 장군이 역임했다. 한편 국군 최초의 중장은 1951년 2월 22일 부로 중장으로 진급한 정일권 장군이었고, 최초의 대장(大將)은 백선엽 장군이 차지했다. 그는 1953년 1월 31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미군은 병력 20만 명당 1명의 대장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으로서는 대장 승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1953년 2월 백선엽 대장이 총참모장으로 재임시 밴플리트 장군 후임으로 온 제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중장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인사였다.

 

또한 국군도 대폭적인 전력 증강을 이루었다. 육군은 휴전 무렵 8개 사단에서 18개 사단으로 증설되고, 병력도 94,000명에서 55만 명으로 증강됐다. 즉, 1950년 7월 5일과 7월 15일 사이에 제1⋅제2군단을 창설했고 8월부터 11월까지의 사이에 개전 초에 해편됐던 제2⋅제5⋅제7사단 등 3개 사단을 재창설했다. 이어 제9⋅제11사단을 창설했으며, 10월 16일에는 제3군단을 창설했다. 그 후 제2⋅3군단은 중공군의 침공으로 큰 손실을 입고 해체됐다가 제2군단은 1952년 4월 5일에, 제3군단은 1953년 5월 1일에 재창설됐다. 해군은 전쟁 당시 4개 정대에 33척의 함정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 무렵 해군은 6개의 전대를 기간으로 한 1개의 함대를 창설했고, 병력도 6,954명에서 12,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 공군도 1개의 전투비행단과 1개의 훈련비행단 등 2개의 비행단으로 성장했고, 비행기도 F-51전투기 80대를 포함하여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병력도 1,897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됐다. 이는 이승만이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셋째, 이승만은 헌법에 보장된 계엄선포와 긴급조치 및 명령권을 행사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치안을 유지했다. 대통령은 헌법 제64조 및 계엄법 제1장(계엄의 선포)의 제1조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했다. 1950년 7월 8일 계엄령선포시 이승만은 계엄법에 의거 선포의 이유는 “북한의 전면적 불법 무력 침구(侵寇)에 의하여 군사상의 필요와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다고 했고, 계엄의 종류는 비상계엄으로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대상으로 했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총참모장 육군소장 정일권”을 임명했다. 계엄사령관은 7월 8일 “포고 제1호”에서 “국내의 모든 체제를 전시체제로 전환함으로써 과감한 작전수행을 도모하고 신속한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헌법 및 계엄법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었음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이승만도 7월 15일 ‘계엄선포에 대한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작전지역에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니 관민을 막론하고 말을 삼감으로써 무근한 풍설(風說)로 민심을 동요시키거나 국방치안에 손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통령은 전쟁을 당하여 헌법에 보장된 긴급명령 및 처분권을 행사했다.

 

특히 이승만은 전쟁 당일부터 휴전 무렵까지 대통령으로서 군사⋅경제⋅치안과 관련된 각종의 비상조치를 공포하여 국가원수로서 전쟁을 지도했다.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 1950.6.25), 비상시법령공포식의특례에관한건(대통령령 제377호, 1950.6.25), 계엄령선포(포고제1호, 1950.7.8), 철도수송화물특별조치령(대통령령긴급명령 제3호, 1950.7.16), 금융기관예금대불에관한특별조치령(대통령긴급명령 제4호, 1950. 7.19), 비상시향토방위령(대통령긴급명령 제7호, 1950.7.22), 비상시경찰관특별징계령(대통령긴급명령 제8호, 1950.7.22), 징발에관한특별조치령(대통령령긴급명령 제5호, 1950.7.26), 징발에관한특별조치령시행규칙(국방부령 제1호, 1950.7.26), 계엄하군사재판에관한특별조치령(대통령긴급명령 제6호, 1950.7.26), 비상시향토방위령(대통령긴급명령 제9호, 1950.8.4), 피난민수용에관한임시조치령(법률 제145호, 1950.8.4), 징발보상령(대통령령 제381호, 1950.8.21), 육군보충장교령(대통령령 제382호, 1950.8.28), 국군임시계급에관한건(대통령령 제384호, 1950.9.16), 비상게엄해제에관한건(1950.11.7), 계엄선포에관한건(1950.11.7), 부역행위특별처리법(법률 제157호, 1950.12.1), 국민방위군설치법(법률 제172호, 1950.12.21, 폐지 1951.5.12), 감행령(대통령령 제426호, 1950.12.28), 방공법(법률 제183호, 1951.3.22), 계엄병시행령(대통령령 제598호, 1952.1.28), 전시근로동원법(법률 제292호, 19536.3), 민병대령(대통령령 제813호, 1953.7.23) 등. 이승만은 국가원수 및 행정수반으로서 이들 조치를 통해 전시 공공이 안녕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5. 맺음말: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의 평가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으로서 북한의 공신침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지켜 낸 국권수호의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광복 이후 숱한 간난(艱難)을 무릅쓰고 어렵게 이룩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채 2년도 안되어서 공산권 종주국인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막대한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은 북한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 당시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주한미군 철수와 미국에 의해 국경충돌 방지 및 치안유지에 적합한 경비대 수준의 군대로 육성된 국군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련제 전차와 전투기 등 현대전에 적합한 무기로 무장하고 독⋅소 전쟁 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수립한 전쟁계획과 이에 따른 사단급 기동훈련까지 끝마친 북한군의 전면적인 기습공격을 받았다.

 

개전 당시 비록 국군이 반공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됐다고는 하나, 전략적 기습공격과 남북한의 병력 및 무기지수 면에서 2:1이라는 현격한 전력차를 고려할 때 전쟁의 승패는 북한의 승리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개전 초부터 휴전까지 3년 1개월 동안 중요 전투를 거의 독자적으로 이끈 백선엽 장군은 “국군의 전력이 북한군의 절반 수준도 안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습으로 허망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전쟁 초기 국군 수뇌부는 북한군의 병력⋅무기⋅전술 등을 분석하고, 여기에 대처할 국군의 병력⋅무기⋅전술 등을 계산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소련제 전차와 소련이 마련한 전쟁계획으로 시작된 6⋅25를 불과 2년 밖에 안 되는 한국정부가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승만도 그 때의 상황을 “제갈량(諸葛亮)이가 국무총리였어도 공산군의 장총대포(長銃大砲)와 전차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정부가 이에 대한 대책을 미리 세우지 못한 것은 미국의 군사물자가 오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렇듯 당시 한국정부의 능력으로는 현대전을 지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전쟁관리능력이나 위기관리능력이 축적되지 않은 채 남침을 당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열악한 안보상황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한국군을 70만 대군으로 성장케 한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의 전쟁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전쟁억지력을 갖추고자 구상했던 한반도 전략구상이라는 이승만의 전략적 혜안(慧眼)은 범인(凡人)의 능력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전쟁지도자로서 이승만에 대해 다음의 평가를 내렸다.

 

첫째, 이승만은 전쟁 이전 북한의 전력증강에 즈음하여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반도 전략구상에 따른 한미동맹결성 및 안전보장 선언, 태평양동맹, 한국군전력증강, 해군기지제공 등을 제의했고, 이를 위해 대통령특사 파견과 주미대사를 통해 미국의 군원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순10⋅19사건과 38도선 충돌사건, 인민유격대남침사건 등을 겪은 이승만은 북한의 군비증강에 위협을 느끼고 미국에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들 공격용 무기들은 한국지형과 실정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가 주장한 주한미군 철수 반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를 대체할 NATO와 같은 태평양동맹이나 한미동맹 결성도 시기상조 및 미국의 전략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또한 진해 군항을 미국의 해군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이승만의 제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한국이 미국 극동방위선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극동방위선 연설을 그 화답으로 보내왔을 뿐이었다. 6⋅25는 그로부터 정확히 5개월 뒤에 터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의 그동안 처사에 그 누구보다도 억울한 입장에 있었고, 힘없는 국가의 지도자로서 비애를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전쟁억지차원의 전략적 혜안은 놀라울 정도로 선견지명적인 것이 되었다.

 

둘째, 전쟁 발발 후 이승만은 국가원수 및 전쟁지도자로서 탁월한 전략적 선택을 했고 이것은 주효(奏效)했다. 개전 초기 전황조차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은 통수권적 차원의 역할 분담을 효과적으로 실행했다. 이승만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최우선을 두고 행동했다. 즉, 이승만은 무초 미국대사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는 가운데 워싱턴의 한국대사에게 미국의 지원을 위한 간단없는 지시를 했고, 극동군사령관과 주한미국대사에게 한국군에게 필요한 무기와 탄약 요청함으로써 국군에게 부족한 탄약과 무기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대신 전선 상황에 따라 부대를 이동하여 병력을 배치하는 등의 순수한 작전사항에 대해서는 군부에 일임했다. 미군 참전 이전 전쟁지도자로서 평정을 잃지 않은 가운데 전시외교에 기울였던 이승만의 노력은 유엔의 결의와 미국의 참전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이에 따라 북한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강적을 맞아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됐다.

 

셋째, 전쟁수행과정에서 이승만은 한반도 통일과 북진통일이라는 전쟁목적과 목표를 확고히 추진했다. 이는 한국의 국권을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미국으로부터 한미동맹과 한국군 전력증강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전적으로 지원받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확고한 전쟁목표 아래 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의연하게 군림했고,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에게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는 이승만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미국 최고 명문대학을 졸업한 학문적 배경, 그리고 정세를 읽고 판단하는 통찰력에서 나왔다. 전쟁지도자인 이승만에게 그러한 뚜렷한 국가적 목표가 없었다면 한국도 베트남전쟁에서 ‘자유월남’처럼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넷째, 전쟁수행 중 이승만은 유엔군의 원활한 지휘를 위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하였으면서도, 반공포로석방 등 그 때 그 때의 전황에 따라 전쟁지도를 융통성 있게 실시했다. 이는 이승만이 주권의 일부를 포기했거나 또는 미국과의 대립 각을 세우는 등의 긴장관계를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오로지 국가이익을 위해 처신했고 행동했다. 미국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수립했으면서도, 미국이 이를 수용한 것은 이승만을 대신할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반공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국가이익을 위해 반공포로 석방 등 전후 미국의 안전보장을 얻기 위해 고집을 피우고 완고하게 행동했지만 합리성과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판단할 줄 아는 견식이 풍부한 국제정치지도자로서 전쟁의 주체인 미국을 리드(lead)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감을 갖고 미국과 여러 정책을 놓고 협의할 때도 먼저 원칙론을 내세워 강력히 주장을 펴며 충돌하지만 이는 미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실리를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휴전협상 무렵 그가 강력히 주장했던 단독 북진통일도 한국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이승만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클라크 장군은 이러한 이승만을 보고 “명분을 적절히 구사해 실리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을 도대체 어디에서 터득했는지 알 수 없다”고 탄복했다.

 

이렇듯 이승만은 열악한 안보환경하에서 국가원수로서 행정수반으로서 그리고 전쟁지도자로서 전쟁을 훌륭하게 지도하며 수행해 냈다. 그는 개전 초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군의 신속한 개입을 재촉하기 위해 노력했고, 미군 참전 이후에는 작전통제권을 위임하여 미국의 책임하에 전쟁이 전개되도록 만든 후 그는 오로지 민족의 숙원인 북진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휴전협정으로 통한 종전정책으로 바꾸자, 제2의 6⋅25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전력 증강 등 전쟁억지력 확보에 그는 혼신의 노력을 다 했다. 그는 미국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미국보다도 먼저 깨달고, 조국의 미래에 대한 국가이익을 위해 위국헌신(爲國獻身)했다. 진정한 애국자로서, 건국 후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6⋅25전쟁 때 전쟁지도자로서 그의 참모습은 죽은 뒤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승만의 오랜 미국 친구인 보스윅은 이승만의 영결식에서 애절한 절규로 그의 인간미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시심(詩心)으로 기렸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 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원고투고일:2007. 3. 9, 심사완료일:2007.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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