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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에 비추어본 이승만
작성일 : 2008/04/27 13:09 / 조회 : 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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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나워에 비추어본 이승만

 

 

이 주 영 (李柱郢, 건국대 사학과)

 

 

1. 비슷한 처지의 두 나라와 두 지도자

 

두 국민의 상반된 평가

 

아데나워(Konrad Adenauer,1876-1967))와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개인적으로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지도자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비슷한 시기에 정권을 잡고, 비슷한 그리고 기간(14년과 12년) 통치하였다. 그리고 통치자로서는 드믈게 최고의 학력인 박사 학위를 가졌고, 90세 이상 장수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지도자가 최악의 상태에 놓인 자기 조국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최악의 상태란 조국이 자신의 힘으로 외침을 막지 못하고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없는 약소국, 패전국,분단국의 처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원래부터 약소국이었던 한국이 1945년에 어떤 곤경에 빠저 있었으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강대국이었던 독일도 당시에는 약소국이었다. 그것은 소련군의 침공 위협에 직면했어도 그에 대처할 군사력도, 경제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지도자는 모두 자기 조국을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통치기간에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이승만은 그와같은 영광은 얻을 수 없었지만 나중에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이루는 데 있어서 두 지도자가 공통으로 보여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대판 로마제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미국을 파트너로 잡았다는 사실이다. 아데나워는 NATO를 통한 미국과의 군사적 결합과 문명적 유대를 대외정책의 주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대서양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승만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한 미국과의 군사적, 문명적 결함을 주목표로 했기 때문에 ‘태평양주의자’로 불릴 수 있었다.

 

이처럼 목표가 같고 결과가 같았는 데도 두 지도자는 각기 자기 조국에서 아주 다른 평가를 받았다. 아데나워는 국민의 압도적 다수에 의해 ‘건국의 아버지’로,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2003년 11월 독일공영방송 ZDF 텔레비전이 330만명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는 아데나워가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임을 보여 주었다. 그 뒤를 이은 영웅들은 마틴 루터, 빌리 브란트, 칼 마르크스, 나찌 독재에 항거한 숄 남매, 바하, 구텐베르크, 괴테, 비스마르크, 아인슈타인이었다.

 

이와는 달리 이승만은 한국인에 의해 거의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독재자로 비하되거나 아니면 아예 잊혀 지고 있다. 2002년의 한 여론조사기관이 조사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인기도를 보면, 이승만은 겨우 1퍼센트의 지지율로 전두환과 공동 4위였다. 그리고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는 그 흔한 독사진 한 장 실려있지는 않을 정도로 박대를 받고 있다.

 

두 나라의 역사처럼 다른 두 지도자의 생애

 

아데나워는 쾰른 출신의 카톨릭 교도로서 기독교민주당 창당의 주역이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뮌헨, 본 대학을 거치면서 경제학과 법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얻은 다음, 정치에 입문하여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할 때까지 16년간 쾰른 시장으로 행정 경험을 쌓았다.

 

나찌의 집권으로 공직을 물러나 1944년에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미군의 진격으로 풀려나 시장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쾰른이 영국군 점령 지역으로 바뀌면서 쫓겨났다. 왜냐하면 영국의 사회주의적인 노동당 정부가 반공주의자인 그를 달가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아데나워의 정치무대는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옮겨지고, 새 헌법에 따라 1949년에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을 이끌어 제1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73세의 나이에 실세 총리가 되어 14년간 통치하다가 87세인 1963년에 물러났다.

 

이에 비하면 이승만의 생애는 한(韓) 민족의 운명처럼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지만, 2세 때 가난을 벗어나 보려는 어머니의 용단으로 서울로 올라와 오늘날 서울역 건너편 도동의 양녕대군 사당에 딸린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 과거 급제를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서당에 다녔으나, 그것마저 1895년의 갑오경장으로 폐지됨에 따라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이승만의 인생은 20세 때인 1895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바뀌었다. 거기서 그는 평생의 자산인 유창한 영어 구사력과 미국인 선교사 친구들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는 급진적 개화파로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행하면서,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군중시위의 선봉으로 활동하였다. 그 때문에 박영효 추종자들의 고종 폐위 음모에 얽혀, 24세 때인 1899년부터 한성감옥에서 5년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29세 때인 1904년에 출옥한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동시에 그는 후원자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의 밀사 자격도 띠게 되었다. 그는 1905년 8월에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그의 사저에서 잠간 만나 한국 주권의 수호를 위한 지원을 요청할 기회가 있었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구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면담을 계기로 그의 이름은 미국 언론에 오르기 시작하였는 데, 1965년 하와이에서 죽기 까지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관련 기사만도 1,256건에 이를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는 조지워싱톤, 하버드, 프린스턴을 거치면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 데,주로 서양사와 국제법을 전공하였다. 그의 주관심이 서양의 근대화와 외교를 통한 독립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프린스턴에서 그는 지도 교수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을 만났고, 그의 학위논문은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는 영광을 얻었다.

 

35세 때인 1910년에 고국에 돌아 왔으나 이미 나라는 망했을 때였다. 그는 YMCA 간부로서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소개하고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105인 사건과 함께 체포의 위험이 닥아 오자, 그는 1913년에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리고는 해방으로 70세에 귀국하기 까지 33년간 국적없는 망명객으로서 살았다.

 

1945년에 귀국은 했으나 그의 정치적 후원자가 되어야 할 미 국무부, 군정청과 충돌함으로써 집권 가능성은 없어졌다.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은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국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좌우합작’ 노선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반쏘주의에 맞을 리가 없었다. 뒤늦게 미국이 소련에 대한 정책을 바꿈으로써 73세 때인 1948년에 나라를 세우고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12년간의 통치기간은 순탄하지 않았다. 건국이 된지 2년도 채 안되는 1950년의 6.25남침으로 그가 세운 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갔다. 겨우 기사회생하여 전후 복구에 성공은 했지만 그의 정부는 비판 세력들의 강한 도전을 받았다. 그러다가 결국 85세 때인 1960년의 4월학생혁명으로 물러나, 하와이에 유폐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험난한 생애는 나찌 통치 기간만을 빼고는 대체로 순탄했던 아데나워의 생애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와 같은 두 생애의 차이는 두 나라 운명의 차이가 되기도 하였다.

 

 

2. ‘문명사적 전환’의 주역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두 지도자의 공통적인 역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조국을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확실하게 편입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지도자는 모두 자기 조국을 전통적인 문명적 관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미국과 군사적,문명적 유대를 맺게 함으로써 일찌감치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에 적응하려 했던 선구자들이었다.

 

아데나워가 볼 때 독일의 문명사적 위치는 영국,프랑스의 서방문명과 러시아의 동방문명 중간에 걸처있는 ‘그네타기 식’의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독일을 서방문명에 확실하게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서방정책은 독일을 프랑스,영국과의 유대를 기반으로하는 ‘유럽 통합’을 뛰어 넘어 대서양 건너 미국,캐나다와 연결시키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이승만의 친서방 정책도 아데나워와 같았다. 그것은 한국을 태평양 건너 미국문명과 직접 연결시키려는 ‘태평양주의자’의 정책이었다. 그의 ‘태평양 세계’의 개념은 하와이 독립운동 시절에 발간했던 ‘태평양잡지’나 ‘태평양주보’의 명칭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초기에 미국,필리핀,대만,베트남과 같은 태평양 국가들을 묶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태평양 동맹’을 구성하려 했다. 이 때 이승만이 성공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데나워가 프랑스와 영국을 끌어 안았던 것과는 달리 일본을 동맹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은 아데나워 보다 이승만에게 더 큰 어려움을 가저다 주었다. 독일은 서방 문명과 많은 가치를 공유해 온 전통이 있었지만, 한국은 그러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있어서 ‘문명사적 전환’은 오랫 동안 익숙해 온 공동체주의적인 ‘중국적 생활방식’을 버리고 낯 선 개인주의적인 ‘미국적 생활 방식’을 새로이 받아 들임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문화 혁명’이었다. 다. 그러므로 낯 선 문화에 대한 적응과정에서 격렬한 반발의 진통이 따랐다. 진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지난 반 세기 동안의 남,북한 역사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대륙문명권에 그대로 남아 있던 북한 사회가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 사회는시위,파업, 폭동,정변으로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어떻든 한국은 해양문명에 적응했고, 그 대가로 자유와 번영을 얻었다.

 

이러한 결과는 이승만이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젊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꿈이었다. 그 꿈은 선진문명의 수용을 통한 부국강병의 달성이었다. 후진국은 어차피 선진국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라면, 2등국, 3등국이 아닌 1등국으로부터 배워야 했다. 그가 말하는 1등국으로서의 선진화 모델은 미국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고, 그의 뒤를 이은 대통령들은 그가 만들어 놓은 길을 대체로 잘 따라갔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위치인 것이다.

 

문명개화 수단으로서의 기독교

 

아데나워나 이승만은 모두 오늘날의 새뮤얼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충돌론자였다. 두 지도자는 모두 종교가 문명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믿었고,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가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에 적합한 종교라고 생각했다. 아데나워는 독실한 카톨릭 교도로서 소련 무신론자들의 ‘야만’으로부터 ‘문명’의 토대인 ‘기독교적 윤리’를 지킬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가 기독교민주당의 창당이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개신교였다. 그리고 개신교는 선진문명을 받아 들여 한국인의 생활방식을 바꿀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나라의 미래는 개신교에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 진데, . . . 우리는 마땅히 이 교(예수교)로써 만사에 근원을 삼아 . . .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게 하자”고 그는 1904년에 썼다. 독립운동 기간중인 1919년 4월 미국 신문기자와 가진 회견에서도 독립운동의 주목적은 동양 최초의 예수교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그의 통치기에 개신교는 국교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개원식 때 그는 동료의원인 이윤영 목사에게 감사의 기도를 부탁하고 자신도 선서문에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넣었다. 정부수립 기념식 취임사에는 미국 대통령처럼 하나님에 대해 맹세하였다. 또한 정부의 각종 국가의전은 기독교식으로 집행되고, 미 군정기에 정한 크리스마스 공휴일도 그대로 지켜졌다. 국기에 대한 경의는 경례 대신 주목례로 바뀌고, 형무소와 군대에는 형목제도와 군목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한 기독교방송국과 극동방송국이 인가되고, 국영 중앙방송국을 통한 기독교 선교도 묵인되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신교도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한 사실이었다. 그의 12년 통치기간에 임명된 135명의 장관급 부서장 가운데서 개신교도가 47.7 퍼센트였는 데, 이 숫자는 당시 개신교도가 인구의 10퍼센트 미만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놀라운 비율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개화와 독립에 헌신했던 애비슨 등의 미국인 선교사들을 표창함으로써 개신교의 긍정적인 역할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3. 동맹 확보를 위한 외교

 

‘이승만 외교’의 역할

 

두 지도자는 모두 약소국, 패전국,분단국에게 외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총리로 있으면서 오랫 동안 외무장관을 겸직할 정도로 외교를 중요시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는 것이었으므로,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NATO에 가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지원을 얻어 재무장에 착수함으로써 12개 사단의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전승국들과 대등한 국제적 지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승만은 청년시절부터 약소국이 주권을 유지하는 데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04년에 쓴 <독립정신>에서 “외교를 친밀히 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 나라를 부지하는 법으로 알아야 할지니, 만일 외교가 아니면 형세가 외로워서 남의 침탈을 면할 수 없다.”고 썼다. 1904년의 시오도 루즈벨트 면담으로 시작된 그의 긴 외교 행로는 독립,건국,호국의 과정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활동 전체를 ‘이승만 외교’(The Syngman Rhee Diplomacy)라는 말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 시절에 그는 한국의 독립은 미국이 일본을 전쟁에서 패배시키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그 때문에 독립의 필요성을 미국인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반드시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그의 베스트셀러 저서 <일본내막기>에 담았고, 그러한 예견은 1941년의 진주만 기습으로 사실로 나타났다. 미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확인받기 위해 임시정부 승인을 미국에게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과 영국 수뇌에 알림으로써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에 대한 약속을 원칙적으로나마 확인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승만 외교’는 해방후 한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그 진가를 드러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한 정부수립이 실패할 것임을 확신한 그는 1946년말에 미국으로 가서 한국 정부 수립 문제를 UN으로 이관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다행이 미국이 정책을 바꿈으로써 UN 감시하의 5.10선거가 실시되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라가 세워지기는 했지만, 유엔에서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다.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권의 반대는 물론 좌경화한 영연방 국가들의 적대적인 태도도 큰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의 국내외 인맥을 총동원하여 총회 마지막 날에 간신히 승인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년 안에 30개국의 승인을 받는 놀라운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만 외교’는 6.25전쟁에서 “없어질 뻔 했던” 대한민국을 살린데서 또 다시 그 위력을 드러냈다. 전쟁 개시 사흘만에 국군의 전력은 사실상 완전 붕괴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신속한 참전만이 그것을 구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군의 개입은 개전 다음날 공군기가 한 반도에 출격하고 개전 닷새 만에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가 전선을 방문할 정도로 신속히 이루어졌다. 이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데는 동경의 맥아더 사령관, 그리고 동경에 일시 머무르고 있던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의 ‘현지 의견’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이승만과 친분이 두터운 관계에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또한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면서, 대한민국은 또 다시 존폐의 위기에 부딪혔다. 유엔군측은 휴전을 성립시키기 위해 공산측을 달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새로이 한 반도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의견이 유엔휴전위원회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의견은 1954년 제네바 정치회의에서도 다시 제기되어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측이 이승만의 정치 고문인 올리버 박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승만은 ‘벼랑끝 전술’로 완강히 버텼고, 그의 고집을 꺽지 못한 참전국 대표들은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나라는 약했지만 그 지도자는 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이승만 밑에서 오랫 동안 외교 실무를 맡았던 조정환 장관은 그를 가리켜 ’외교의 신(神)‘으로 불렀던 것이다.

 

‘한국판 NATO’의 확보

 

6.25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미국과의 문명적 결합이 이루어져 갔다. 미국군과 한국군의 합동작전 수행은 ‘한국인의 미국문명 수용’이라는 이승만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70만 대군’의 국군조직은 청년들에게 미국문명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기회를 주는 도구였다. 그들은 미국식 군대의 조직력과 기동성, 그리고 미국식 기계의 조작 방법과 기획 능력을 배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군사적,문명적 결합은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그것을 견고하게 만들 ‘한국판 나토 조약’, 즉 한미동맹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거부하자, 그는 미국이 원하는 휴전을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해 1953년 6월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응수하였다. 미국은 분개했지만 결국은 이승만을 달래는 쪽으로 기울어져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한미동맹의 체결은 19세기말 이후 한국 외교가 추구했던 목표를 달성한 것이었다. 당시 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나라를 잃을가 전전긍긍했던 고종 황제는 동맹국의 제1조건으로 한 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어야함을 꼽았는 데, 그러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미국을 동맹국으로 잡는 데 실패했지만, 이승만은 성공한 것이다. “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은 누대에 걸처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고 말한 이승만의 예상처럼 오늘날 한국인들은 미국의 군사력에 힘입어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에게 한미동맹은 북한과 그것을 지원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6.25전쟁 중에 일본이 독도를 점령했던 사실을 보고 재침략의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은 오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방위조약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그것(방위조약)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궁극적인 지배라는 야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그는 브릭스 미국대사에게 말했던 것이다.

 

 

4. 자유민주 체제의 실험

 

자유방임으로의 지향

 

두 지도자는 ‘시장경제’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의 경제장관인 에르하르트 보다는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신념이 약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독일인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나는 민족공동체의 개념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복리를 위해 정부가 경제활동에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경제체제를 ‘사회 시장경제’라고 불렀다.

 

여기에 비하면 이승만은 자유방임의 미덕을 믿었고 그 때문에 로버트 올리버는 그를 가리켜 18세기 제퍼슨적 자유주의자로 불렀던 것이다. 그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서 봉건적 기질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있지만,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를 동생인 충령대군(세종)에게 물려 주고 불우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조선왕조에 대해 반감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더군다나 이승만은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5년7개월의 옥살이까지 한 터였다. 그가 고종을 얼마나 증오했는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을 만나 밀지를 받을 기회가 있었는 데도 그 제안을 거절한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의 반봉건적인 성향은 한일합방 직후 미국 유학에서 서울로 돌아 와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말했던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1948년 8월15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 “과거에는 사회와 정부가 양반들의 생활을 위해서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개인을 존중하고 노동을 우대하고 법률 앞에의 평등을 보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농지개혁을 강행함으로써 지주 양반 계급을 몰락시키고 자유인으로서의 자작농이 우세한 사회를 만들었다. 또한 농지개혁은 자본주의 체제를 발달시키는 계기로서도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신흥 기업가들이 지주들의 지가증권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귀속재산 불하에 사용함으로써 자본축적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의 사회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그의 자유방임주의 경제 사상은 제대로 실천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1948년의 제헌헌법은 사회주의적, 국가자본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포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54년의 제2차 헌법개정부터는 민간기업 체제의 요소를 상당히 반영하였다.

 

그의 자유방임주의적인 경제관은 재무장관을 역임한 송인상 장관의 증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53년 화폐개혁 당시 일정 한도액을 넘는 큰 액수의 돈은 신화폐로 바꾸어 주지 않고 장기저축을 하도록 정부가 강제하려는 경제관료들의 계획에 이승만 대통령이 맹렬히 반대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재무부의 계획에 따르고 말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내키지 않은 조치였다.

그는 건국, 6.25전쟁, 전후 복구 등으로 자신의 경제관을 제대로 펴지 못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상공업 진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도 하와이 독립운동 시절에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통치자들을 기다려야만 했다.

 

자유선거제와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

 

대한민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은 1948,49년 출범시에 모두 자유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에서 간접선거 방식으로 최고의 통치자를 뽑았다. 그러나 최고 통치자의 선택에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 자유민주체제의 요체라고 볼 때, 두 공화국의 민주적 성격은 영국과 같은 군주국들의 수준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는 제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1952년부터 대한민국은 적어도 제도상에 있어서는 독일과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최고 통치자를 뽑는 방식이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선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선제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이라는 무리한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거기에는 단순히 이승만의 집권욕만으로만 치부될 수 없는 다른 요소도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식 대통령제의 도입을 원했던 것이다.

 

미국식 대통령제에 대해 이승만은 일찍이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세상에서 . . .제일 선미(善美)한 제도”라고 찬양한 바 있었다. 3.1운동 직후 서재필과 함께 개최한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에서도 “가급적으로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를 제안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948년에 제헌 헌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헌법기초위원회에 두 번씩이나 참석하여 대통령 중심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는 협박성의 발언을 할 정도였다.

 

미국식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그의 신념은 국민교육으로 나타났다. 문맹율이 78퍼센트인 나라에서 미국식 자유민주체제의 실현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입국론’은 의무교육제도의 시행을 서두르게 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작은 예산이기는 하지만 연평균 10퍼센트 이상이 교육에 투자되었다. 그 결과로 그의 임기말인 1959년에 오면 학령아동의 95.3퍼센트가 취학하고, 국민의 문맹률이 22펴센트로 떨어지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 때문에 로버트 올리버는 그를 가리켜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의 교육정책은 자유민주체제에 적합한 새로운 엘리트 양성에서도 나타났다.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한 것이다. 1953-1960년 기간에 해외 정규유학생로 나간 4,884명 가운데 90퍼센트가 미국으로 갔다. 1953-1961년 기간에 단기연수 기술훈련생으로 해외에 나간 2,309명의 대부분도 미국으로 갔다. 1950년대에 미국을 다녀 온 군 장교와 하사관은 1만명이 넘었다. 미 국무부의 교환 계획에 따라 단기간으로 미국을 다녀 온 사회 지도자들도 수백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미국식 자유민주체제를 한국 땅에 이식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켰다. 그것은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1957년의 ‘2.4보안법 파동’, 1959년의 경향신문 폐간, 그리고 1960년의 ‘3.15 부정선거’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러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전부 이승만과 그의 정부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세력의 위협, 가혹한 6.25전쟁의 후유증, 자유민주체제 운영 경험의 부족, 국민의 낮은 생활 수준과 책임의식의 결여, 타협을 모르는 극한 투쟁의 전통 등이 자유민주체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었다. 그러한 장애물들은 통치자 한 사람으로는 극복하기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승만이 자유민주체제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12년의 통치기간에 자유선거를 거부하거나 연기한 적이 없었다. 자기에게 불리한 경우에도 어김없이 선거를 치렀다. 그것은 뒤의 대통령들이 대통령 직선를 비롯한 선거를 유보했던 사실과 비교해 보면 돋보이게 된다. 또한 그는 어떤 경우에도 국회를 해산하거나 인위적으로 정당을 개편한 적이 없었다. 야당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존속하지 못할 정도의 가혹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1955년부터는 민주당이 출현함으로써 자유당과 함께 양당 제도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민당계의 동아일보, 흥사단계의 사상계, 카톨릭계의 경향신문이 거의 제한을 받지않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 관대하였다.

 

좌우합작에 대한 경계

 

아데나워와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아데나워가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주된 이유는 카톨릭 신앙 때문이엇다. 그는 무신론자들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혁명운동이야 말로 문명의 기초가 되는 ‘기독교 윤리’를 말살하려는 야만적인 야만적 행위로 보았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본산인 러시아가 후진국이라는 독일인의 전통적인 편견도 작용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공산당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산체제의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국가들과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집하였다.

 

이승만의 반공정책도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특히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인간관과 생활태도에 대해 불신감을 가졌다.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그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을 정당화하는 그릇된 인간관, 그리고 자기가 이길 때까지는 결코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비타협적인 생활태도를 문제로 보았다. 게다가 공산주의 종주국인 러시아에 대한 불신감도 작용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시절 러시아의 이권 침탈에 대해 투쟁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성감옥에서 읽은 ‘피터 대제의 유훈’을 통해 러시아의 군주들이 얼마나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음모에 몰두해 있는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반공주의와 반쏘주의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 국무부와 충돌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루즈벨트,트루먼의 민주당 정부의 대외정책은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국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좌우합작 통일노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이승만이 볼 때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이끄는 어리석은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조직이 강한 좌파와 조직이 없는 우파가 손을 잡았을 때 반드시 우파가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미 군정이 추진하는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 좌우합작위원회에 맹렬해 반대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제2차대전 직후의 ‘좌우연립 정부’를 세웠던 동유럽 국가들,그리고 ‘국공합작’을 내세웠던 중국이 공산화된 사실에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건국을 전후해서 일어난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 반란 사건은 이제 막 태어난 대한민국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8년말에 공산당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1950년의 6.25남침으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공산주의를 허용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미국식의 자유민주체제는 용공적인 민주당적인 것이 아닌, 반공적인 공화당적인 것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이해할리 없는 외국의 비판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인권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독재자로 몰았던 것이다.

 

 

맺 음 말

 

제2차대전부터 지금까지 독일과 한국은 지향해 온 국가적 목표와 이룩한 성과에 아주 비슷하였다. 문명 수준과 국력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독일과 비교해 잘못된 길을 걸은 나라는 아니었다. 지도자 개인 자격을 보더라도 이승만은 아데나워와 비교해 결코 뒤떠러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력, 외국어 실력, 문필력, 국제적 안목에 있어서는 아데나워를 능가하는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독일 국민의 ‘영웅’으로 남았는 데 비해 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악한’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첫째 이유는 이승만이 권력에 물러날 시기를 놓첬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임기말인 1956년이나,세 번째 임기말인 1960년에만 물러났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최고 통치자로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둘째 이유는 사회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이 우세한 지적 풍토가 문제라는 생각이다. 이승만에 대한 비난은 필요 이상으로 격렬한 경우가 많은 데, 그 가운데는 6.25전쟁 때 한국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산화 통일이 될 수 있었는 데 이승만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만일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승만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대한민국을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묶어 두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은 북한의 그것과 같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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