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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건국 활동과 좌우합작론의 극복
작성일 : 2008/06/26 20:19 / 조회 : 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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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건국 활동과 좌우합작론의 극복

 

이주영 ‖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이승만李承晩의 대한민국 건국 과정은 그가 대한제국 말기에 한성감옥에서『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한 1904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원고에서 그는 미국의 정치제도를 은근히 찬양함으로써 대통령중심제의 공화국을 앞으로 한국인들이 채택해야 할 정치제도의 모델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1948년에 세운 대한민국의 윤곽은 이미 그때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건국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에 활동 무대를 외로운 섬 하와이에서 미국의 중심부인 워싱턴으로 옮긴 다음부터였다. 당시 그의 독립운동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이중적인 목표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일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 패망 후에 새로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될 소련의 개입을 막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목표를 가진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1930~40년대의 시대 분위기와는 안 맞는 것이었다. 당시는 코민테른의 인민전선人民戰線 노선이 전 세계 지식계를 휩쓸던 ‘좌경화의 시기’로서, 파시스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좌파․우파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좌우합작左右合作’의 명분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던 때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의 세계는 공산주의가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되던 시기였다. 그러한 생각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미 국무부는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하거나 소련의 이익을 배려하려는 친공적․친소적인 전문가들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좌우합작 노선에 대해서는 미국 내의 한국인들도 상당히 많이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반공적․반소적인 이승만의 독립․건국운동은 좌우합작파左右合作派와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입장이 모호한 좌우합작파들과의 싸움은 실체가 분명한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보다 더 힘든 것이었다.

 

 

1. 임시정부와 좌우합작의 유령

 

1919년 3․1운동 직후 한반도 안팎에서는 6개의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당시 이승만은 그 모든 임시정부의 내각 명단에서 오늘날의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이름이 오를 정도로 비중이 컸다. 그는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등의 대학을 거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민족자결주의 선포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었고, 그의 학위 논문은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서 출간되었다. 화려한 학력에 덧붙여 언론인, 기독교 지도자, 교육자로서의 경력이 그를 민족의 대표적 지도자로 떠오르게 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가장 먼저 관련을 맺고 애정을 느낀 것은 서울에서 세워진 한성漢城임시정부였다. 한성정부는 1919년 4월23일에 일제통치 밑에서 세워진 것이지 때문에 실체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13도 대표들이 인천에서 모이기로 계획되었던 국민대회도 열리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것은 270여 명이 체포될 정도로 실체가 확실한 것이었다. 그것의 주류세력은 기독교인들로서, 이승만을 아들처럼 아끼던 이상재李商在와 기독교계의 거물이었던 윤치호尹致昊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수반(President, Republic of Korea)으로서 임시정부 출범 사실을 미국을 비롯한 열강에 알렸다.

 

또한 이승만은 4월11일에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에서도 정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상해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 연해주국민의회가 합쳐져 9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그것은 흔히 상해임시정부로 불리는 통합 임시정부였다. 통합은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의 각료 명단이 받아들여지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이승만은 5개월 밖에 상해에 부임해 있지 못했지만, 워싱턴에 머무르면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이끌며 편지와 전문을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임시정부 내부 갈등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갈등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독립운동 방법에 있어서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데 대해 대부분은 무장투쟁론을 내세웠다.

 

예를 들면, 임시정부의 최대 세력을 이끌고 있는 안창호安昌浩는 이승만의 외교적 방법이 글 몇 줄로 강대국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안창호는 이승만의 반공주의와는 달리,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 모든 세력을 결집시킨다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그것은 일종의 좌우합작론으로 보였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이승만이 주로 서울․경기 지역 인사들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안창호는 평안도 등의 서북 지방 인사들에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이유들 때문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했고, 결국은 1925년 3월에 3대통령직으로부터 면직되었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임시정부와 공식적인 관계가 끊어지게 되자, 이승만은 더욱더 자신의 뿌리를 한성정부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김구金九와의 협력 체제가 이루어져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복원되기는 했지만, 이승만에게 임시정부는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였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1942년에 공산주의자들을 끌어들여 좌우합작 정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 미국의 좌우합작 전략과 한국인 동조세력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 독립의 희망이 보이지 시작하자, 임시정부의 김구와 구미위원부의 이승만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김구는 이승만에게 워싱턴 주재 주미외교부 위원장 자격을 주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승인과 광복군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미 국무부와 루스벨트 대통령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승만 후원단체인 한미협의회의 미국인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무기대여법에 따라 군사 원조를 제공하면,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국인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대전 후에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을 막는 데도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외교활동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좌우합작 정책 노선을 비밀리에 확정해 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그는 1942년 1월에 미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를 만남으로써 확인하게 되었다. 알저 히스는 나중에 소련 간첩으로 판명되었지만 한반도 문제는 미국의 동맹국인 소련과 관계된 것이므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소련과의 협상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한반도에 독립정부가 수립된다 할지라도 소련의 이익을 대변할 친소적인 것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발표된 코델 헐 국무장관의 발언도 이승만의 의구심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발언에서 헐 장관은 자기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못한 국민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여기서 ‘싸우지 못한 국민’ 가운데에는 한국인도 포함되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의 한국인 가운데서도 미국 정부의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연립정부 수립을 목표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출현은 미국 정부에는 반가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무부는 한국인들이 분열되었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물의 대표적인 경우가 한길수韓吉洙였다. 그는 1933년 미국을 방문한 민주사회주의자인 김규식金奎植의 한중민중동맹 소속으로,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비밀리에 얻었다고 주장하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미 국무부 하급관리들의 호감을 샀다. 그는 이승만이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인물이라고 헐뜯고, 중경임시정부도 극소수로만 이루어진 사설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했다.

 

이들 한국인 좌우합작론자들은 미 국무부의 한국 책임자인 조지 맥퀸 박사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맥퀸은 평양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이물로, 안창호 계통의 북한 출신 인사들, 주로 흥사단興士團 세력과 가까웠다. 그 때문에 이승만의 지지자인 스태거스 변호사는 한국에서 일본에 의해 추방된 미국인 선교사들을 일일이 찾아내 한국인들의 정치적 대변자가 이승만임을 증명하는 의견서를 국무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항상 경계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그는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이 독립을 찾도록 결정했음이 발표되었을 때도 그 선언의 진의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는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절자’를 밟아 독립을 허용한다는 문구의 진짜 의도를 의심하였다. 그것은 미국이 소련의 이익을 배려하기 위해 한국의 독립을 늦출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문구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여러 차례 발표하고,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 ‘적당한 절자’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명확히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아무런 공식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이승만의 의심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하는 신문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1943년 초『시카고 선』지에는 런던특파원발 기사로 “앤서니 이든 영국 외무장관과 루수벨트 대통령 사이에 소련의 한국 합병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월드 어페어즈』지 1943년 6월호는 미 국무부가 유럽의 망명 정부들과 달리,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이유는 소련 때문임을 암시하는 기사를 실었다. 나중에 코델 헐 국무장관은 그의 회고록에서 “1943년 3월 27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신에게 한국에 대한 국제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라고 썼다. 이승만의 우려에는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3. 이승만과 미 국무부의 충돌

 

좌우합작 정책을 내세우기는 장개석蔣介石의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43년 여름 이승만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 내 독립운동 상황보고서를 제출하자, 루스벨트는 미국에 온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에게 한국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송자문은 장개석의 처남이지만 친소적인 인물로, 나중에 호세택과 함께 소련에 이권을 준 친공적인 좌우합작론자였다. 그는 한국이 독립되면 김규식, 김두봉, 조소앙과 같은 온건좌파들이 정권을 잡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김구의 임시정부를 좌파가 포함된 좌우합작 정부로 바꾸도록 계속 압력을 넣었고, 1942년 12월에 그 목적을 달성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좌우합작주의의 적용은 독일의 항복이 가까웠던 1945년 4월 연합국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총회를 열었을 때 분명해졌다. 이승만은 한국인을 대표하여 회담 사무총장인 알저 히스에게 한국 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되었다.

 

그때쯤 해서 미국이 소련의 야심을 배려한다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그것은 독일의 배후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소련의 남유럽 진출을 막을 목적으로 미군과 영군의 발칸 반도 상륙을 제의한 처칠의 주장을 루스벨트가 거부한 사실에서 나타났다. 그것은 발칸 반도를 소련에게 넘겨주려는 것이었다.

 

또한 소련에 대한 미국의 배려는 미국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모택동의 공산당과 손잡는 이른바 국공합작國共合作을 받아들이도록 강하게 요구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게 될 것이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좌우합작주의자인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은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모인 한국인들을 좌우합작의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 한국인들을 위한 만찬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강대국들이 얄타 회담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넘기는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라는 폭탄선언을 함으로써 회의장을 놀라게 하였다. 이승만은 그 소식을 공산당 출신 소련인으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미 국무부가 부인 성명서를 발표했는데도 이승만이 비난을 계속하자, 백악관도 전면에 나서서 부인했다.

 

그 문제는 영국 하원에서도 터져 나와 처칠 총리에게 이승만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묻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처칠의 답변은 얄타에서 비밀 협약이란 없었고, 논의된 많은 문제 가운데는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것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바로 그러한 ‘대체적인 양해’ 가운데 한반도의 분할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주장을 반박하는 선언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승만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은 나중에 1945년 8월에 한반도의 분할 점령이 이루어진 사실로 확인되었다.

 

미국과 중국이 좌우합작의 방향으로 입장을 굳혔으므로,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를 비롯한 이승만의 미국인 친구들은 그에게 그 노선을 받아들이도록 강력히 권유하였다. 그들은 이승만이 반공․반소련 노선을 고집하게 되면 독립 후에 세워질 좌우합작의 연립정부에서 제외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좌우합작이란 명분 밑에서 잘 조직된 좌파세력이 흩어진 우파세력을 압도함으로써 한반도를 공산화共産化하고 한국인들을 소련의 노예로 만들 것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가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해 한국인들을 속이고 잘못된 길로 끌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아이오와 같은 시골에 가 닭을 키우며 살겠다고 올리버 박사에게 말할 정도로 좌우합작에 대한 그의 거부 태도는 단호했다.

 

 

4. 이승만과 미 군정청의 충돌

 

일본이 항복하자, 소련군은 북한 지역에서 치밀한 계획에 따라 빠른 속도로 공산 정권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동유럽 국가들을 점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분단의 책임을 남한과 미국에 떠넘기기 위해 공식적인 정부 수립 선언은 하지 않았지만, 북한에서는 이미 ‘실질적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화폐 개혁을 하고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민주개혁’이라고 부른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이승만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귀국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의 좌우합작론자들이 방해를 했다. 미국은 이미 한반도에 공산주의자들과의 연립정부를 세울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데, 반소련적이고 반공적인 이승만이 귀국하게 되면 소련과의 협조가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귀국하기 위해 2개월 이상을 고생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이 개인 자격으로나마 서울에 오게 된 것은 해방이 된 지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16일이었다. 부인 프랜체스카는 그보다 3개월이 지난 1946년 1월에야 겨우 시애틀을 출항하는 군 수송선을 탈 수 있었다. 이승만의 귀국은 비밀이었기에 김포공항에는 한국인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환영행사도 없었다.

 

한편 남한 지역의 미 군정청은 철군 압박에 시달렸다. 대전 직후 미국 여론은 해외의 군인들을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다. 미국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한반도로부터의 철군 요구는 유난히 거셌다. 그러므로 주한민군의 주된 목표는 빨리 한국인의 정부를 세워 주고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부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소련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동의는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미국․영국․소련)의 선언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첫 단계로 4개국(미국․영국․중국․소련)이 참여하는 5년간 신탁통치를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우려해 온 좌우합작 통치기구가 나타나게 될 순간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동반관계에 있었다. 신탁통치 반대에 있어서는 오히려 김구가 더 적극적일 정도였다.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리고 지방 순회연설을 통해 신탁통치를 매개로 소련이 어떤 형태로든 남한 땅에 발을 붙이게 되면, 한반도는 결국 동유럽의 나라들처럼 공산화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행동은 미 군정청의 친소련적․친공적인 좌우합작 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946년 봄, 하지 장군은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 원고를 미리 검열해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 부분을 삭제하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5. 이승만과 좌우합작파의 충돌

 

미 군정청의 좌우합작 정책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시련을 맞았다. 하지의 예상과는 달리, 소련군 대표 슈티코프는 신탁통치에 반대한 한국인 정당들을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우파右派새력의 참여를 차단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소련군과 미군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단체라도 모스크바3상회의의 성명을 지지만 하면 참여 자격을 얻게 하는 ‘공동성명5호’가 발표되기는 하였지만, 우익의 상징인 이승만과 김구는 서명하지 않았다.

 

소련군의 의도가 분명해지자, 이승만은 미국 정부가 미소공동위원회를 집어 치우고 소련 정부와 직접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 안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통한 신탁통치 실시 계획을 고집하였다. 모스크바3상회의 선언에 따르면, 소련과의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소련이 합의해 줄 의사가 없는데도 하지는 그것에 계속 매달리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뜻대로 되지 않자, 하지는 1946년 6월에 우파나 좌파가 아닌 제3의 세력, 즉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같은 중도파를 내세워 정부 수립을 준비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를 구성케 하고, 새로 생기게 될 미 군정자문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위의원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도왔다. 민선 의원 45명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세력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자, 미 군정은 그것을 막기 위해 서울과 강원도의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였다. 그리고 45명의 관선 의원 임명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천한 좌파 성향의 인물들을 임명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미국에서 이승만 공격에 앞장섰던 김호와 강용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하지는 이승만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한 데 대해, 이승만은 앞으로는 공개적으로 맞서겠다고 응수했다.

 

하지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미국에 직접 가서 그 정부와 국민에게 호소해 보려고 하였다.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통치할 통일정부 수립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 명백해진 이상,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는 이승만이 자신을 제치고 워싱턴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데 대해 분개하였다. 이에 그는 미국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의 송금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6. 이승만의 ‘자유선거 추진 전략’

 

1946년 12월1일 이승만은 어렵게 김포공항을 출발해 도쿄로 향했다. 도쿄에서는 그에 대해 호의적인 맥아더 장군이 미국까지 가는 군용기를 제공해 주었다.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미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정부 수립 지원을 호소할 전략팀을 구성했다. 그를 돕는 미국인들은 올리버 박사, 변호사 존 스태거스, 원로 언론인 제이 제롬 위리엄스, 국방부의 프레스턴 굿펠로, 의회 상원 소속 목사인 프레더릭 브라운 해리스 등이었다. 그리고 그의 충실한 추종자인 임병직林炳稷과 임영신任永信도 있었다. 전략팀은 한반도 문제 해결 방안으로 남북한 총선거를 국무부에 제시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소련의 팽창이 심각하게 우려되고 있었던 때이므로, 한국에 대한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무부 관리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피점령국 담당 차관보 존 힐드링 장군만이 이승만의 생각을 지지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국무부의 책임 있는 어느 누구도 이승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귀국 과정에서 다시 이승만은 국무부의 좌우합작 세력으로부터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도쿄에서 맥아더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났다. 원래 장개석은 김구를 비롯해 중국에서 활동했던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정권을 잡기를 희망했지만, 모택동과 내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개석은 이승만에게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편을 마련해 주었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장개석 정부도 좌우합작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귀국해서 이승만은 남한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를 밟기로 힐드링 국무차관보와 합의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그러나 즉시 하지 장군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 성명을 냈다. 그리고 하지는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서울에서 열었다. 제1차와 마찬가지로 협의 대상 자격 문제로 회의는 헛돌기만 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승만은 ‘회담을 결렬시킬 행동을 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미 군정청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라디오 방송 출연은 물론 일반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전화도 철거되고, 미국에서 오는 편지들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미국인들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므로 1947년 여름에 이승만은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하지 중장은 좌우합작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를 ‘미국의 적敵’으로 보았다. 그렇다고 미 군정청이 지지하는 김규식과 여운형의 인기가 높았던 것도 아니었다.

 

 

7.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는 이승만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국무부 관리들도 이제는 한국 문제에 있어서는 이승만 노선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47년 8월에는 마셜 국무장관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인정하고 신탁통치안을 대신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 개최를 소련․영국․중국에 제의했다.

 

소련은 즉각 거부하였다. 그러자 마셜 장관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가져갔고, 11월에 유엔 총회는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하에 정부 수립을 위한 자유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의 뜻이 관철된 것이다.

 

소련은 선거 결정을 불법이라고 비난했지만, 유엔은 계획을 강행했다. 그리하여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대표들도 좌우합작, 또는 남북협상南北協商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단장인 인도 대표 메논은 북한에도 애국적인 지도자가 있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8개국 대표 가운데서도 좌파 성향이 강한 캐나다와 호주 대표들은 선거 자체를 반대했고, 인도와 시리아도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서울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미군 사령관과 소련군 사령관에게 선거 실시를 위한 협조 요청 서한을 보냈다. 하지는 즉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슈티코프는 서한의 접수 여부조차 확인해 주지 않다가, 결국 유엔 한국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했다. 이승만의 희망이 무너질 순간이었다.

 

이 시점에서 유엔 한국위원단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했으므로, 단장인 메논은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유엔 본부로 돌아갔다. 유엔 특별 ‘소총회’에서 좌파 성향의 캐나다와 호주 대표들은 남한만의 선거가 분단을 고착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 시간 회의장 밖에서는 임병직과 임영신이 선거 실시안이 동과되도록 열심히 설득활동을 벌였다. 북한 지역에는 사실상 공산 정권이 수립되어 있으므로 남한 지역만의 선거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마침내 1948년 2월19일 유엔 소총회는 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이승만의 승리였다.

 

남한만의 선거 결정은 김구가 이승만을 떠나 김규식의 좌우합작 진영에 가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거 반대에는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본국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하지 중장은 이번에는 김구와 김규식에게 선거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두 김 씨는 선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좌우합작 문제에 있어서는 중국도 바뀌고 있었다. 모택동의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게 된 장개석 정부는 김구와 김규식이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려 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두 김 씨가 장개석으로부터 입은 은혜 때문에 중국 정부의 권유를 뿌리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울 주재 중국공사 류어만劉馭萬은 김구와 김규식이 이승만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 중장은 미국의 대외 정책이 바뀌어 가고 있었는데도 변화된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좌우합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하지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밀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아다니고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미 군정청의 한국인 관리 가운데 이승만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하지 중장을 움직여 이승만에 대항할 서재필徐載弼 박사를 미국으로부터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서재필이 나이가 많고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기대에 못 미치자, 미 군정의 연장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하지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선거 방해는 북한에서도 했다. 김일성金日成이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남한 지도자들을 평양으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한에서의 선거를 뒤로 미루기 위한 작전이었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남로당 등의 좌파들과 함께 회담 참석에 동의했다. 이승만은 두 김 씨의 평양행이 북한에 의해 악용될 것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만류했다.

 

1948년 4월의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행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단지 선거로 구성될 남한 정부를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 ‘4․30 공동성명’ 형식으로 동의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자기 추종자들에게 선거에 참여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두 거두의 반대는 선거를 무산시킬 수도 있을 만큼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내부의 좌파들 움직임도 선거 실시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었다. 좌파 성향의 캐나다․호주․시리아 대표들이 “5․10 선거로 탄생될 국회는 독립국가의 정식 입법기구가 아니라 유엔의 자문기구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거 실시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고, 그 때문에 이승만은 선거 실시안을 관철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8. 건국과 유엔 승인 과정에서의 위기

 

이러한 역경을 딛고 1948년 5월10일에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유엔 한국ㅇ미시위원단의 대표들과 직원들은 전국을 지역별로 나누어 투표를 참관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투표 방해로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등록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 수의 86%를 넘고, 그 가운데 92.5%가 투표에 참가했기 때문에 유엔 한국위원단은 선거가 비교적 공정한 것이었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남한 지역은 한반도 전체 인구의 약 3분의2가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선거는 전체 한국인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1948년 7월20일에 이승만은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되고 8월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그렇지만 1948년 가을에 열리게 될 파리 유엔 총회에서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다. 정부 숭인에 대해 캐나다․호주․인도․시리아의 반대는 확실했다. 그리고 영국과 중국, 그리고 아랍권, 북유럽권, 소련과 위성국들, 프랑스 등이 반대표를 던질 위험성이 컸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국가 승인을 위한 유엔 외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장면張勉을 단장으로 하고 올리버 박사를 고문으로 하는 강력한 한국대표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김규식과 김구도 유엔이 신생 대한민국을 승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통일독립촉진회統一獨立促進會의 유엔 대표단을 1948년 8월1일에 구성하였다. 그리고 선발대로 서영해를 프랑스 파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단장인 김규식이 파리행을 거부함으로써 반대 대표단 파견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엔의 한국 정부 승인은 총회 마지막 날인 12월12일에 간신히 통과되었다. 그리고 나서 1949년 1월1일에 미국이 승인한 것을 시작으로 각국의 승인이 이어짐으로써 신생국 대한민국은 국제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신생국 대한민국의 앞날은 불확실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좌파나 좌우합작론자들은 5․10 선거에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오언 패티모어는 대한민국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동시에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저주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유에스 뉴스&월드 리포트』나『뉴욕 타임스』에는 결국 미국이 한국을 소련에 줄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9. 6․25 전쟁과 대한민국의 해체 위기

 

그러한 우려는 마침내 사시로 나타났다. 태어난 지 2년도 안 된 대한민국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습을 받아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한국군이 북한 지역까지 통일할 기회를 얻을 것 같았지만,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과 인해전술 공격으로 유엔군이 무조건 후퇴하게 됨에 따라 대한민국은 또다시 붕괴 위험에 부딪혔다. 대한민국 해체 가능성은 1950년 말에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맥아더 유엔사령관에게 한국으로부터의 전면 철수의 시기와 방법을 물었던 사실에서 나타났다.

 

뒤이어 유엔 총회는 1950년 말에 3인으로 구성된 휴전위원회를 설치하고 휴전 방안을 마련케 하였는데, 당시 유엔 측은 휴전을 하기 위해서는 공산 측에 어떤 양보라도 할 태세였다. 그러므로 캐나다의 레스터 피어슨을 위원장으로 하는 휴전3인위원회는 공산 측을 달래기 위해 대한민국을 해체한 다음 4대국(미․영․소․중) 감시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새로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것은 좌우합작 또는 남북협상 노선에 토대를 둔 건의안으로서, 대한민국을 없앤 다음에나 실현될 수 있는 방안이었다. 물론 이승만은 완강히 반발하였다. 다행히도 그 제안은 1951년 초 미국 하원이 중공에 대한 저지를 결의하고 유엔군이 반격에 나섬으로써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해체 위기는 휴전 다음해인 1954년 4월에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서 다시 찾아왔다. 그것은 1953년 7월 휴전 협정에서 다루지 못했던 한반도의 정치적 장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로서, 강대국들의 외무장관들과 한국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거창한 모임이었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은 변영태卞榮泰를 단장으로 하고 올리버 박사를 고문으로 하는 대표단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지키기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여기서 또다시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 참전국들은 소련 및 공산 측을 달래기 위해 또다시 좌우합작에 입각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해체시키고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 실시를 통해 새로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방안이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방안에 대해 이승만이 찬동하지 않을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에, 미국 대표단의 월터 로버트슨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이승만을 설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찬성하지 않는다면 유엔 회원국들이 그를 버리게 되고 그에 따라 남한은 완전히 외톨이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협박도 붙었다. 올리버 박사는 전문을 통해 그 내용을 서울의 이승만에게 알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승만의 반대는 완강하였다.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하의 선거로 탄생된 나라이므로 선거를 다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선거가 필요하다면 대한민국 선례를 따라 북한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결국 미국을 포함한 16개 참전국들은 그들의 남북한 총선거안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대한민구의 해체를 전제로 한 한반도 해결 방안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1953년에 맺은 한미군사동맹(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화해 나가면서 국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1904년에 시작된 이승만의 건국운동은 제네바 정치회의가 끝난 1954년에 와서야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미국과 군사적․문명적으로 결합된 반공적 자유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이 인민전선, 남북협상 등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국내외의 좌우합작론이란 장벽을 뚫고 나가는 힘든 과정을 거쳐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10. ‘87년 체제’의 출현과 ‘48년 체제’의 변질

 

그러나 1987년의 6․29선언에 뒤이어 10월에 이루어진 9차 헌법 개정과 함께 이른바 ‘87년 체제’가 나타나면서,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의 ‘원형’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원래 1948년의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의 헌법과의 법적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8년의 제헌헌법 전문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군가를 재건함에 있어”라고 함으로써,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은 1919년의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것임을 밝혔던 것이다.

 

실제로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은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정부 계승이니”라는 말로 대한민국이 상해임시정부가 아닌 한성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김구도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임시정부와 1948년의 대한민국이 직접 연계되어 있지 않음을 시인하였다.

 

그 이후에 이루어진 제5차․제7차․제8차 개헌에서도 헌법 전문에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지속됨으로써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와는 직접적인 법적 관련성이 없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1987년의 6․29 선언 이후 좌경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해 10월에 이루어진 제9차 개정 헌법의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일부의 변혁적 성향의 재향군인들은 10월1일로 되어 있는 현행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4월19일로 바꿀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1987년의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를 “3․1운동 정신의 계승”으로부터 “임시정부의 계승”으로 바꾼 것은 체제변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였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것은 반공국가에서 좌우합작국가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1942년부터 좌파들을 받아들인 좌우합작 정부이기 때문이다.

 

아직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대한민국이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좌우합작 국가가 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87년의 헌법 전문은 사회주의를 용납한다고 주장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체제 변화는 이승만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뜻밖의 결과였다. 예상치 못했던 변화 때문에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은 국가 정체성 문제에 있어 혼란에 빠졌고, 그 결과로 좌파와 우파가 정면으로 대결하는 이념적인 내전 위기를 겪었던 것이다. 끝

 

 

시대정신

2008년 여름호 vol.39

건국60주년 특집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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