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이승만의 외교를 `한미동맹`이라는 하나의 성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작게 보는 일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미국에 의존하면서도 한국이 미국 외교의 수동적인 추종국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부 수립 직후부터 그의 시선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과 일본, 대만과 동남아시아, 태평양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신생 대한민국이 강대국의 보호를 받는 약소국이 아니라 새로운 아시아 질서의 형성에 참여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외교적 포부였다. 이 문제의식은 1949년 태평양동맹 구상에서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1957년 ‘자유아시아 연합(United Free Asia)’ 제안으로 이어졌다.
1948년 대한민국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러한 구상이 얼마나 대담했는지 알 수 있다. 해방된 지 불과 3년, 정부를 수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였고 경제력과 군사력도 빈약했다. 북한에는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중국에서는 국공내전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38선 주변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팽창, 일본의 전후 처리와 동남아시아의 정세를 하나의 연결된 국제정치 문제로 파악했다.
1949년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태평양동맹(Pacific Pact)`은 이러한 지역인식을 보여준다. 필리핀의 엘피디오 키리노, 중화민국의 장제스 등과 함께 태평양 지역의 연대를 모색했고, 특히 이승만은 이를 공산주의 팽창에 대응하는 강력한 집단안보체제로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유럽에서 NATO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아시아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안보협력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외교적 시야였다.
더 주목할 것은 시기다. 이승만이 태평양동맹을 주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이 있기 전에 이미 그는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개별 국가의 국내문제가 아니라 지역 전체의 안보위기로 보고 있었다.
같은 해 중국 대륙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듬해 북한은 남침했고 중국군까지 한반도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의 역사를 놓고 보면 이승만이 우려했던 동아시아의 안보위협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외교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미국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미국의 힘을 정확히 이해했고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언제나 한국의 국가 이익을 대신해 줄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미국은 세계 전략을 생각했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생존을 생각했다. 두 국가의 이해가 일치하면 협력했지만 충돌하면 미국을 상대로도 자신의 요구를 밀어붙였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휴전문제와 안보보장을 연결하며 끈질기게 미국을 압박했다. 휴전 이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북한이 다시 공격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가 확보한 한미동맹은 이후 70년 넘게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축이 되었다. 이승만 외교를 평가할때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장기적인 제도적 유산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승만의 구상은 한미동맹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는 NATO가 있는데 공산주의와 직접 대치하는 아시아에는 이에 상응하는 강력한 지역안보체제가 없다는 사실을 문제로 보았다. 한국·중화민국·필리핀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더라도 아시아 국가들이 자신의 안보를 위해 스스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동맹의 필요성과 외교적 주체성을 함께 추구했다.
이러한 노력은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의 창설로 이어졌다. 한국과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정치인과 반공 인사들이 참여한 국제적인 반공 네트워크였다. 이승만이 원했던 정식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신생 대한민국이 국제조직의 참가국에 머물지 않고 지역적 국제연대를 만드는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건국한 지 6년밖에 되지 않았고 전쟁의 폐허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라가 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한 것이다.
1957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이 제안한 ‘a United Free Asia’는 이러한 구상을 더욱 잘 보여준다. 이승만은 한국과 남베트남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아시아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팽창에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아시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하나의 완결된 공식 외교독트린으로 체계화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49년 태평양동맹, 1954년 APACL, 1957년 United Free Asia를 연결해 보면 일관된 지역전략을 읽어낼 수 있다.
당시 아시아에서 성장하던 비동맹주의와 비교하면 이승만의 선택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1955년 반둥회의를 계기로 미국과 소련 어느 진영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힘을 얻었고, 이는 훗날 비동맹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과 중국군의 참전을 직접 경험한 이승만에게 공산주의 앞에서의 중립은 현실적인 안보전략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이 어느 진영에 설 것인지를 분명하게 결정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연대를 국가생존의 조건으로 선택했다.
이승만의 일본관에서도 냉전 현실과 역사적 경험이 동시에 작용했다. 그는 일본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해온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다시 아시아의 지도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강하게 경계했다. 미국이 일본의 경제력과 산업능력을 동아시아 자유 진영의 중요한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과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태평양동맹 참가국들이 일본의 참여를 원한다면 한국이 이를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취지의 입장도 나타냈다. 반일이라는 감정만으로 그의 외교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점에서 이승만의 외교는 이념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주의적이었다. 공산주의에는 분명한 선을 그었지만 국가 간 관계에서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우선했다. 미국을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선택하면서도 미국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일본을 경계하면서도 국제정세에 따라 협력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외교에서 영원한 감정보다 국가이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건국 초기부터 실천하고 있었다.
특히 평가해야 할 부분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국제정치의 `객체`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약소국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강대국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안에서 살아남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한국이 새로운 지역질서의 형성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평양동맹과 APACL은 모두 그 목표를 완전하게 실현하지 못했지만, 실패 여부만으로 이러한 외교적 시도의 의미를 평가할 수는 없다.
실제로 미국이 구축한 전후 동아시아 질서는 이승만이 원했던 단일한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와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 등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양자동맹들이 지역안보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승만의 태평양동맹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가 제기했던 문제, 즉 공산주의 팽창에 개별 국가가 아니라 지역적 안보협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냉전기 동아시아 안보질서는 다른 제도적 형태로 그 문제에 답했다.
오늘날의 인도·태평양을 바라보면 이승만의 지역적 시야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이 유지되고 미국·일본·호주·인도의 쿼드가 작동하며 한미일 안보협력도 강화되어 왔다. 물론 이것을 이승만의 태평양동맹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역사적 비약이다. 시대도 다르고 참가국과 목적, 국제환경도 다르다. 그러나 한반도의 안보를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지역질서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그의 인식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무엇보다 이승만의 외교를 ‘친미’라는 두 글자로 정리하는 것은 그의 외교적 역량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미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미국에 모든 판단을 맡기지 않았다.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한국의 목소리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반영하려 했다. 약소국이 강대국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어떻게 자신의 국가이익을 확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한 지도자였다.
1949년 태평양동맹에서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1957년 ‘United Free Asia’에 이르는 흐름은 바로 그 이승만 외교의 크기를 보여준다. ‘자유아시아’라는 하나의 공식 독트린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의 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하려 했다는 사실은 여러 외교적 시도를 통해 확인된다. 대한민국의 생존을 한반도 내부에서만 찾지 않고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국제질서 속에서 찾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승만은 가난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신생국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교적 시야까지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국제정치의 변방에 놓인 나라가 아니라 자유아시아의 전선국가이자 지역질서에 참여할 국가로 보았다. 미국과 동맹을 만들고 그것을 대한민국의 생존장치로 제도화하면서 동시에 아시아 국가들의 지역연대를 추진했다.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외교적 유산은 `한미동맹`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스스로 국제질서의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국가적 자신감이었다.
출처 : 최보식의언론(https://www.bosik.kr)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하십시오 :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하십시오 :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추천
주소 : (우110-872) 서울 종로구 내수동 72번지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 3-532호
전화 : 02-738-1794~5 팩스 : 02-738- 1796 e-mail : manager@loverokorea.org
Coptright 2008 대한민국사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