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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작성일 : 2008/09/01 23:10
다시 생각해 보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미국은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하는 데 집착
이주천 교수   
 
 
  I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는 나라가 커서 없어질 염려가 없지만, 또 영국과 일본의 경우 4면의 바다로 인해 외세의 침공의 염려가 없지만,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인 경우 자칫하면 나라가 없어지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허다했다. 유럽 강대국에 둘러싸인 폴란드의 경우, 혼란스런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3차 분할합방으로 나라가 없어졌다가 1차대전이후 간신히 국권을 회복했다. 한국의 경우, 19세기말 한반도 제패를 위한 청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3각 쟁탈전이 벌어져서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이라는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勝者 일본의 조선 침탈 야욕이 달성되었고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우려를 표명한 강대국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 팽창을 억제하는 댓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36년동안 국권을 상실했었다.
 
 II
  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45년 해방이 된지 꼭 3년뒤인 48년에 대한민국은 건국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되새기는 국민은 많아도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반추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48년에서 50년 6.25직전까지의 세월을 다시 돌이켜 본다면, 신생국 대한민국에게는 存亡의 기로에 선 위태로운 기간이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한국처럼 주변 강대국에 둘러 쌓인 약소국의 건국에는 항상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다행스럽게도, 이승만과 같은 뛰어난 통찰력과 탁월한 리더쉽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
 
  건국당시 이승만에게는 세 가지 과제가 놓여있었다. 1948년 12월 제3차 파리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국가승인을 확보하는 것, 그 이후부터 1950년 6.25동란까지 신생국 대한민국을 이끈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현안문제는 주한미군의 철군을 지연시키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군사원조를 확보하는 한편, 경제건설을 위한 미국으로부터의 지원을 확보하는 등의 문제이었다. 이들 세 가지 문제, 유엔으로부터 국가승인,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와 경제원조의 확보는 신생국가의 생존에 있어서 절박한 문제였다.
 
 II
  48년 여름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외교적으로 총력전을 펼쳤다. 그당시 대한민국은 외교전문가도 없었고, 외교부도 없었다. 신생국 대한민국의 위상도 지금처럼 올림픽을 치루거나 금메달을 따오는 나라가 아니었다. 캐나다, 프랑스, 호주, 인도와 같은 나라의 정부 는 현재와는 달리 그 당시에는 좌파가 장악하여 승인을 얻기는 더욱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그래서 장면박사를 단장으로 한 유엔대표부는 세달에 걸쳐 불철주야로 맨몸으로 뛰어다니면서, 신생국 대한민국의 건국의 합법성을 각국의 대표들에게 호소했다. 마침내 12월 12일, 유엔을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승인하였다. 이승만 외교의 개가였다.
 
 이 당시 미국 행정부는 막후에서 신생국 대한민국의 승인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승인했지만, 미국으로부터의 대한원조는 신속히 진척되지 못했다. 1946년부터 북으로부터 도주한 피난행렬을 줄을 이었고, 1948년 5월14일 북쪽은 남쪽에 대한 전력 공급을 끊었다. 북쪽은 당시 한반도 전체 발전량의 96%를 생산했다. 전력공급이 중단되자 남한은 공장이 멈춰서는 등 엄청난 타격을 봤고,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48년 1인당 국민소득(GNP)는 38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니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지탱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신생국 대한민국에 적극적인 원조를 기피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미 의회와 사회의 일각에서 이승만이 경찰을 통해서 좌익폭동에 대한 강경진압한 점에 대해서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행정부는 이런 미 의회의 대한지원 반대 분위기로 인해 곤란한 입장에 처해져서 적극적으로 이승만 정부를 지원하지 못했다. 미국 진보좌파 언론들은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비난했으며, 그의 정부가 ‘탄압을 일삼는다’는 공격을 계속했다. 역설적으로 그런 언론들은 남한에 비해 훨씬 독재적인 북한 김일성 정권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험구가들의 결론은 “남한은 공산당 지배하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라”는 식이었다. 존스홉킨스대학의 중국전문가로 루즈벨트 행정부와 트루먼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마오쩌둥을 공공연히 찬양했던 좌파 지식인(후일 공산주의자로 밝혀진) 오웬 래티모어는 1949년 7월17일 ‘뉴욕 데일리뉴스’에서 “우리의 할 일은 남한이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썼다. 그 당시 래티모어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두 번째로 미국행정부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핑계로 삼아서 대한군사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자칫 남한의 군대가 北進하여 북한군과 대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예를 들어서, 1949년 7월 1일에 설치된 미군사고문단(KMAG)은 명목상으로는 한국군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북쪽에 대한 도발을 못하도록 군비를 축소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그 때문에 미군사고문단의 주요 임무는 남한이 북한을 불안하게 할 정도의 군사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도록 확인하는 일이었다(『건국의 내막』, 하권, p.444). 또 미군사고문단에게 운영지침이 다음과 같이 전달되었다. 한국군은 38도선 월경을 절대로 하지 말 것, 공격 도발 행위를 하지 말 것, 그리고 기동 연습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는 무장, 훈련, 부대 전개를 일체 하지 말 것 등을 책임지도록 한국군에 대한 엄격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건국의 내막』, 하권, p.451). 대한민국은 정찰을 위해서만 6대의 항공기 이상은 허용되지 못했다. 탱크나 기갑 차량은 가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포병은 탱크를 격파하기 불가능한 바주카포와 화포에 국한되었다.
 
  세 번째로, 45년부터 6.25동란까지 기간에 미국이 평가하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형편없이 낮았다는 점이다. 일부 미국의 전략가들은 한국을 소련에 넘길 수도 있다는 분위기도 존재했었다. 원래 한반도 문제는 미소 합의를 존중한다고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물적 지원을 최소화하면서 한반도 문제에서 서서히 발을 빼려 했던 것이다. 미국은 장차 3차대전이 발발한다면 스탈린에 의한 유럽 침공으로 계산했었다. 그래서 미국은 경제적으로 마셜플랜으로 서유럽을 지원했고 그곳에 안보기구로서 NATO 등을 설치하였다. 미국의 모든 애정과 관심은 유럽으로 향했다. 나머지 여력은 일본 관리에 주목했다. 그런데 1949년 12월,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패퇴하여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대륙은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에 공산화되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힘의 세력균형이 크게 무너졌는데, 미국은 이를 과소평가했고 한반도에서 북한군의 침공의 대비에 소홀히 했다.
 
  한반도에 빠져나가려는 미국의 바짓가랭이라도 붙잡기 위한 이승만의 몸부림은 決死的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측의 로비스트에게 자신의 절박한 의사를 서신으로 미 정부에 자신의 간곡한 입장을 전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 언론과 게 미군철수의 부당성을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한국 언론에 철수의 부당성을 공박하고 전국의 가두에 대중동원을 하는 것이 이승만의 유일한 대책이었다.
 
 III
  6.25동란 발발이후 자연히 전쟁 발발의 책임론이 미국 사회에서 불거졌다. 미국측 정부와 학자들은 대한군사원조의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①미 의회가 대한원조에 관심이 많지 않았던 점과 ②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핑계의 무게를 두어 왔다. 특히 그들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미 행정부의 남북한 무력충돌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대한군사원조가 지지부진했다고 하여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그 책임의 무게를 강하게 두어 왔다. 전혀 일리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실제로, 이승만이 자신의 고문이자 미국내의 로비스트로 일했던 로버트 올리버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북진통일에 대한 의지를 내 비친 서신의 내용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승만이 호소하고 있었던 것은 38도선 너머로 거의 매 시간마다 감행되는 공격을 막기 위한 직접적인 목적과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의 연한 본래의 국경선까지 한국을 보다 근본적으로 통일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한국군이 북한에 대해 방위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로부터 적절한 무장과 공격의 승인이나 지지를 공식적으로 받아내는 일과 아울러 미국 국민으로부터 여론의 지원을 얻은 일이었다”(『건국의 내막』, 하권, p.448).
 
  북진의 공격을 미국이 막으려는 것은 미국측으로 볼 때 일견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제대로 북한군의 침공시 한국군이 방어할 수 있는 군사적 여건이 전혀 마련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었다. 1949년 6월 미군철수이후, 이승만이 파악한 당시의 상황은 심각했다. 49년 10월 22일자 올리버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10만 병력의 우리 육군은 당연히 받아야할 장비로 무장도 갖추지 못하였소.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그대로 만일 북한 공산군이 전면 침공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할 충분한 탄약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오. 내가 불평 불만을 일삼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지만 우리들의 형편은 거의 절망적이오.” 11월 25일자 올리버에게 보낸 이승만의 서신에 의하면. “육군의 보고서에 의하면 5일 이상 견디기 어려운 탄약 밖에는 우리가 가진 것이 없소.”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면 이승만이 보여준 미국의 언론과 조야에 서신쓰기, 대중동원이나 언론플레이 이외에 미국을 납득시킬 다른 대안이 있었던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불안감을 더해주는 신생국의 여론을 한 곳으로 집중결속시키고 정치체제를 안정시키는 순기능적 측면도 있었다. 헌법에 이미 자유통일에 대한 염원이 삽입되어 있었다.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정정당당하게 승인을 받았고, 북한은 불법국가로 되었지 않았던가?
 
 IV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승만이 미국에게 저항하는 것이 바람직했던가? 미국 행정부가 그 당시 신생국 대한민국의 외교적 위상이나 국력으로 볼 때, 만약 이승만이 즐겨 구사한 ‘대중동원’이나 ‘북진통일론’을 자제했다면, 또 만약 그가 보다 품위있는 신사적인 목소리를 내었다면, 미국이 이승만의 우아한 리더쉽에 감동하여 한국의 절박한 입장을 제대로 인정하고 미군철수를 지연하는 등 잘 대우해 주었을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포기하고 방위위주의 군비증강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면, 미국의 조야에서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가? 그 당시 미국은 과연 한국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나?
 
  45년 해방부터 50년 6.25직전까지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완벽한 방어를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공격전술도 필요했는데, 미국은 북한의 무력도발은 억제하지 못한 반면에, 남한의 대북 공격을 막는데 급급했었다. 자연히 무기와 탄약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한국군의 해군과 공군력은 거의 없었다. 항복한 남한에 주둔한 일본군이 보유한 탄약, 무기, 선박 등을 한국군이 제대로 인수인계 받았다라면 사정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력을 전혀 인수인계 받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멀쩡한 일본군 군 장비와 탄약을 제주도 앞바다에 수장하기까지 했다.
 
  1948년 건국부터 50년 봄 사이에 미국의 대한정책은 우유부단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비용을 많이 들지 않은 유엔에서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많은 힘을 쏟았지만, 경제적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드는 신생국 대한민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서는 인색했던 것이다. 미국의 대규모의 무력침공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48년부터 정보부는 주한미군 당국에 수차례 북한군의 동향을 보고했지만, 미 행정부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하는 데 집착했다. 해방이후 미국에게 비쳐진 한국의 이미지는 일종의 ‘천덕꾸러기’ 내지 ‘못난 오리새끼’였지 않았던가? 이런 낌새를 챈 이승만 대통령은 언론플레이, 로비스트를 통한 미국 행정부 압박과 대중동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에게 대한원조지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원조에서는 기대한 만큼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미국은 6.25동란의 참전으로 막대한 인적물적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V
  지난 일이지만, 만약 김일성이 전면침공이 아니라 민족해방전선의 이름으로 베트콩을 앞세운 베트남식의 유격전술을 채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반미, 자주, 민족공조를 앞세운 정치선동과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정치투쟁을 병행한 비정규전식의 군사노선과 테러전술을 복합적으로 취했다면, 과연 유엔군과 미군이 그토록 전면적으로 군사적 자원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어쨌든 6.25동란의 발발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의 소홀에서 그 책임이 큰 것인데, 미국측에서 다시 그 지원소홀을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그 핑계를 대는 것은 올바른 지적이 아니므로 이제는 마땅히 중단되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만의 어떤 식의 외교적 압력이나 레토릭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은 49년 6월 마땅한 군사적 대비책도 없이 500명의 미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한반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49년 6월, 미군철수이후부터 50년 6월까지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자신들의 예정된 스케줄에 의해 한반도 ‘홀대정책’을 집행한 것이었다.(Konas)
 
 이주천(뉴라이트 전국연합 공동대표, 원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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