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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말한다
작성일 : 2008/04/25 22:25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말한다

정치학박사 이 인 수

 

올해는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은 환갑이라고 한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수자이지만 별로 경축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 이다. 광복절이라 해도 일본이 패전한 1945년 8.15를 말하고 막상 국권을 회복한 건국의 날인 1948년 8.15를 말하는 이는 없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대통령이 1960년 4.19정변으로 하야한 후 역대정권의 교육과 언론 그리고 영상매체들이 반세기를 이박사 폄훼와 금기(禁忌)로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이박사의 생애는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창업이요 자유수호와 국가발전의 기반구축 이었다. 이박사 없이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말할 수 없고 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항간에는 이박사가 대한민국을 세웠기 때문에 북한에도 정부가 생겼으니 그가 분단의 책임자이고 1950년의 한국전쟁도 북침이라는 등 북한의 김일성사관에 따른 한국 현대사 보기가 소위 배웠다는 젊은 지식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인 것이다.

 

이렇게 반세기를 바라보는 반이승만시대(反李承晩時代)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사라는 말조차 듣기가 어려웠고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한두 학자의 연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승만을 금기하다보니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없어지고 그가 크게 활약한 자유수호의 전쟁과 국가발전을 위한 업적도 매몰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과서는 건국과 6.25전젱을 빼고 4.19로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국사교육을 반세기동안 이렇게 해온 나라가 또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한마디로 권력자에 대해 심약(心弱)한 백성--- the weak mind people---이라는 평을 듣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제가 우리에게 심고 간 식민사관의 영향도 적지 아니하다. 이 글은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매우 간략하게 회고해본 것이다.

 

한국의 민족사상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은 1910년의 망국(亡國)이요 1948년에 나라의 독립을 찾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다. 이 망국에서 독립을 전취하기까지 한국역사의 중심에는 이승만박사(1875-1965)라는 건국과 창업의 위인(偉人)이 있었다. 그는 조선왕조말 1896년부터 개화의 선각자로 언론과 구국운동의 선봉이었으며 독립협회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그가 반정부운동의 혐의를 받아 5년7개월의 옥중생활 중에 저술한 ‘독립정신’에는 조국의 현대국가 건설이라는 구상이 담겨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근대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사상이다. 그는 출옥 후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가서 외교활동을 하면서 조지·와싱톤, 하바드, 프린스톤대학을 졸업하여 1910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가 다시 도미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영도하였다.

 

1919년, 일제치하 전국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하게 하여 이승만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처음에 임시정부는 3월17일 러시아에서 선언된 대한국민의회정부, 4월11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가 있었으나 9월6일 상해에서 세 임시정부가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존중하여 하나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출범하게 되었으니 곧 한성임시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국민대회와 13도 대표에 의해 수립된 그 민주방식을 중시한 까닭이다. 이것으로 한성임시정부에서 직함이 집정관총재이던 이박사는 대통령으로 그 명칭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박사는 미국에서 한국의 임시정부가 자신을 국가원수인 집정관총재로 추대하였다는 통지를 받고 5월에 집정관총재부를 와싱톤에 설치하여 6월14일에는 영·미·불·이(英美佛伊)등 여러 나라에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정부가 탄생한 것을 통보하고 이 공문에서 그 나라마다 과거에 대한제국이 수호조약을 맺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것으로 정부의 대표인 이박사는 신생 대한민국이 조선왕조의 대한제국을 승계하는 한국의 정통적 민족국가임을 알린 것이며 우리 나라의 영문명칭인 'Republic of Korea'도 이때 외국에 보낸 이 쳣 공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고 확정된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확립되므로 국내외에서 산발적이던 한국독립운동은 통합된 힘으로 총본산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박사는 8월, 와싱톤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를 전담하게 하였고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재정에 충당하였다. 1920년에는 상해에 가서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그 후 독립운동의 방법에 있어 이견이 생기고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 등 우여곡절 끝에 1925년에 이박사는 대통령직을 면하였다. 그 후 임정은 체제를 바꾸어 이동녕, 박은식, 이상용, 홍진, 신규식, 김좌진, 노백린, 김구, 안창호, 김규식,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이청천, 김약산, 이범석 등 많은 요인들이 관계를 가지고 중국의 상해, 남경, 장사, 광주, 중경 등지를 전전하며 한국독립운동의 맥을 이어 나갔다.

 

이박사의 독립운동은 합법적인 독립운동이요 외교와 홍보 및 교포청년에 대한 민족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기적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 내에 한인기독교회를 세웠고 한인기독학원을 경영하였으며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대통령을 사임한 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키며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33년에 그는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서 임정의 신임장을 가지고 제네바에 가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박사는 이미 1941년 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썼고 전쟁에 대비하여 김구주석과 연락해서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게 되자 9일에 임정의 대일선전포고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1일에는 와싱톤 D.C.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으며 6월에는 VOA방송으로 국내외에 산재하는 하국인에게 대일항쟁을 촉구하였다.

 

태평양전쟁중 이박사는 임정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승인과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참전과 전쟁 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반도전체에 대한 미국군대의 진주 등 여러 가지를 미국정부에 제안과 경고를 하였으나 소련과의 전쟁협력을 위해 친소정책을 취하던 미국무부는 이것을 무시하였고 특히 국무부내의 앨저·히스 같은 소련간첩의 영향으로 한국문제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미군과 광복군내에 한국에 진입할 한국인특수부대 편성만이 가능하였다. 1943년 11월,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이 있었음에도 1945년 2월에 이미 병든 몸으로 얄타회담에 임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소련의 대일참전을 약속받으며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스탈린과 비밀히 약속하였다.

 

소련은 일본에 원자탄이 투하된 후 8월 8일에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북한에 쳐들어왔다. 일본 총독부는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8월15일 여운형을 불러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조건으로 치안권을 위임하였다. 여운형은 총독부로부터 2천만엥의 자금과 정치활동의 후원을 받아 조선공산당과 함께 전국적인 좌파조직을 마치고 9월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발표하여 이를 기정사실화 하고자 하였다. 주석에는 아직도 미국에 있는 이승만박사를 추대하고 여운형은 부주석이 되었다. 우익에서는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후 16일에 가서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9월20일에는 스탈린의 비밀지시를 받아 38선을 국경화 하여 북한을 폐쇄사회로 만들고 단독으로 공산화와 공산정권의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해방 후 한반도의 정국은 압도적으로 좌파가 주도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승만박사는 미국무부의 방해로 귀국이 늦어져 10월16일, 실로 33년만에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의 대동단결’ 을 강조하였으며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취임을 거절하고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11월4일에는 ‘연합국에 대한 우리의 결의문’을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완전독립의 요구, 38선의 철폐, 신탁통치의 반대, 임정의 법통존중과 선거를 통한 민주정부의 수립이었으니 곧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시행이었다. 이것은 이박사의 건국강령으로 이후 3년 동안 그는 이 강령을 실현하기위해 국내외로 정치활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38선의 철폐조항만 빼놓고 모두 달상한 것이었다. 38선의 장벽은 소련군과 조선공산당이 북한에 공산당의 단독정권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필수요건이기 때문에 전쟁으로 소련군과 북한정권을 제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박사의 이러한 건국강령이 알려지자 당황한 것은 조선공산당 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공산화를 불가능 하게할 원칙들이었으니 공산당수 박헌영은 38선의 철폐주장이 ‘연합국의 반감을 사게할 내용’ 이라고 민족을 분단케 한 38선 장벽의 존속을 주장하며 친일파의 숙청이 먼저라고 이박사의 통합운동에서 탈퇴해 나갔다. 이박사의 귀국으로 좌파가 지배하던 해방정국은 이렇게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박사는 미군정을 설득하여 11월23일, 개인자격이라는 조건부 이었지만 김구씨를 비롯한 임정요인을 귀국하도록 하였다.

 

12월 28일에 모스크바 3상결정이 발표되었다. 얄타비밀협정의 실천을 위해 미·소·영·중 강대국이 한국에 5개년 신탁통치를 강행하겠다는 것이고 이 기간의 한국인 임시정부를 진주군을 대표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와 상의하여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자주독립이 될 것으로 알았던 한국민족이 반대한 것은 물론이었고 반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소련은 미소공위용으로 북한과 조선공산당에 신탁통치를 지지하게 하고 공위에서 신탁을 지지한 공산세력만을 정부수립의 상의대상으로 할 것을 고집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한 민족진영을 정부수립에서 제외하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정책과 미국의 좌우합작정부수립의도가 공위에서 타협될 가능성은 없었다. 소련은 이미 1946년 2월8일, 북한에서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당의 단독정권을 세우고 무력을 갖추게 하여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기도(企圖)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국익을 달리하는 미·소의 국제세력이 4대국 신탁통치라는 되지도 않을 문제를 놓고 미소공위가 공전을 하게 되자 이박사는 미국의 잘못된 정책에 대항하여 한국문제를 UN에 이관시켜 총선거의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고자 1946년 9월에 임영신을 UN에 파송하여 교섭하게 하였고 10월에는 3상결정을 취소하라고 성명하였다. 이때 미군정에서는 미국무부의 지시에 따라 김규식박사를 내세워 미소공위에 대비하여 좌우합작을 추진하며 이박사의 정치활동을 극도로 견제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박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였고 민주의원의 의장으로 좌익조직을 제압하는 민족진영 총본산의 총수이었다. 그리고 12월에는 하지사령관의 방해를 물리치고 미국에 가서 조야를 설득하여 자율적인 정부수립의 불가피성을 설득하고 돌아왔다. 이박사 체미중인 1947년 3월12일, 트루먼독트린의 발표는 미국의 정책이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해 7월10일,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9월에 가서야 이박사가 주장한대로 한국문제를 UN에 가져가 23일, 총회가 의제로 채택하였으며 마침내 11월 14일, 남북한 자유선거와 한국임시위원단의 파견을 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북에 이미 김일성의 공산정권을 만들어 10만이상의 공산군대까지 양성해 놓고 있는 소련은 이것을 백지화시킬 UN자유선거를 거부하며 한반도에서 외군철수 후 한국인에게 정부수립을 하도록 하자는 대안을 제시하였으니 이는 외군철수 후 북한에 마련된 공산군과 남북한 공산당의 조직력으로 남한을 쉽게 공산화할 승산에서 나온 계책임은 물론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UN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하고 인구의 3분의 2가 사는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우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UN이 할 수 있는 힘의 한계이었고 미국도 소련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총선거는 이박사가 말하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민족이 자유선거로 삶의 체제를 선택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선거이었으나 당시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김구와 김규식, 양김은 이 선거를 거부하고 북한에 가서 소련의 괴뢰 김일성과 담합하여 이른바 4·30성명에 서명하고 돌아와서 이것을 성과라고 남한국민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북한의 공산지도자가 약속한대로 전쟁이 안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성명은 외국군대 철퇴 후, 남한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북한에 모인 공산당주도하의 56개 정당사회단체만으로(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을 포함) 전 조선정부를 수립한다는 것과 남한선거의 결과 즉 건국될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당시의 소련주장을 그대로 받드는 공산당중심의 한반도 적화통일안 이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으로 일본의 패전과 함께 진주한 미·소 양군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민족은 일찍부터 북은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정권이 들어섰으니 남의 갈 길은 북에 구축된 공산군의 무력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미군정하에서 스스로 삶의 체제를 택해 정부를 세우고 공산화를 막아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지향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이박사는 일찍부터 이 사실을 간파하여 후자를 택해 미군정과 싸우며 마침내 미국무부의 빗나간 정책을 고쳐서 이 민족을 개방과 자유민주라는 광명의 길로 인도하였고 김구와 김규식 양김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전자를 택해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어도 곧 처내려올 붉은 군대 앞에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반대를 하여 마침내 해방정국의 미아(迷兒)가 되어 비명의 최후를 맞은 것이다.

 

1948년 5·10총선거가 끝나고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의장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고 제의하여 국회는 감사의 기도로 시작되었고 곧이어 이의장은 이 국회에서 수립되는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하여 우리의 주권회복이 독립운동의 소산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와 같이 이승만의장은 한국독립운동에서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고 이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민족사상 처음인 현대국가 대한민국 건국에 그 역사적 맥과 정통을 잇게 하는 막중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젊었던 그의 구국운동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민족사상 가장 어려웠던 질곡(桎梏)의 세월을 의(義)와 애국으로 일관(一貫)한 실로 가시밭길 52년의 오랜 인내와 투쟁 끝에 이룩한 건국이 대한민국 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국회의장이 민주적으로 구성되어 주권을 회복하게 된 이 국회가 전 민족을 대표한다는 것과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정부가 한국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라고 하였으니 한국민족에 있어 현대국가 수립의 모든 합법적 절차를 갖춘 대한민국이 앞으로 자유민주통일을 달성해야할 정통국가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8월 15일, 초대대통령 이승만박사는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국제친선을 강조하면서도 북한과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책임이 소련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렇게 이박사 영도아래 피나는 투쟁으로 어렵게 건국된 나라 대한민국은 참으로 통일을 위해 할일이 많은 나라이다. 그는 1948넌 3·1절에 남북문제에 언급하여 ‘한편이 죽어가는 몸을 살아있는 편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은 편을 살리기를 꾀해야 할 것이다’ 고 하였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조선왕조말의 구국운동과 임정의 독립운동을 계승한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진 나라이며 사상적으로 한국의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국제평화주의에 의거하여 구조상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제 원칙 즉 제헌헌법에 따라 정부가 수립되었으니 UN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적인 정부임을 승인하였고 그 구성원에 있어서도 임정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비롯한 이시영, 신익희, 이청천, 이범석등 임정의 중진 및 국내의 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참여해서 정부를 수립한 매우 자랑스러운 건국이었다.

 

그리하여 한국민족은 국권을 탈취당한지 실로 38년만에 이승만대통령의 영도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세계사에 다시 등장하였거니와 자유로운 삶의 체제를 선택하여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을 격퇴하였고 65만의 국군을 양성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강화된 국가안보와 안정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체제아래 교육입국의 이념이 실천되어 민생과 국가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국민족이 오래 예속하여온 대륙의 전제국가들로 부터의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해양세력의 앞선 문화를 배우는 새시대를 열어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진취적 활약을 기약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대한민국 건국60주년에 우리는 먼저 정직하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그동안 버려졌던 우리나라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연구해야 하고 국민이 그것을 알아서 이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여야 한다. 없어졌던 나라를 찾아준 민족사의 위대한 은인인 이승만박사를 누가 시켜서 그렇게 미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민족을 그토록 사랑하여 사는 날까지 이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기도를 하다가 가신 그를 왜 미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부나 언론계와 학계와 문화 그리고 예술계가 다같이 반이승만의 시대를 어서 끝내야 우리 민족이 알아야할 진실과 밝은 앞날이 보일 것이다.

 

(필자: 6.25참전 공군대위, 뉴욕대 정치학박사, 전 명지대학교 법정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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