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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되살려내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김길자)
작성일 : 2008/07/22 12:36 / 조회 : 846 / 추천 : 172

 

건국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되살려내자

趙甲濟의 現代史강좌: '李承晩 동상을 다시 세우자'
 
金吉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동장군 보다 견디기 어려운 염제지절에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아스팔트우파입니다. 또한 여러분과 똑같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발전에 직·간접으로 기여한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조갑제 사장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지갑과 손발로 애국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스팔트 우파가 된 계기는 김대중 정부의 ‘제2건국’이라는 정책이 시작 될 때부터,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감이 들었지만 별 관심 없이 지내다가 2003년에는 노무현 여당후보를 보고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곤란한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어버렸습니다.
 
  2004년 이후 여러분들께서도 염려하셨던 여러 가지 노무현 스타일의 국정운영 문제로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우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에는 애국시민 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많은 애국단체들의 회원이 되어 후원을 하는 방법으로 애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사립학교법개정이후 사립학교법재개정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구국집회는 거의 빠지지 않고 다 참여하는 구국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왜 대한민국이 이지경이 되었나? 어떻게 자신이 대통령취임 선서에서 ‘헌법을 준수하고’라고 선서한 헌법을 부정하는,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해 부정에 가까운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최고 통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단순한 구국운동만을 하기보다는 무엇인가 근본문제를 찾아내어 그 문제를 풀어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스팔트우파들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들기 위하여 잠은 아껴야했지만 땀은 아낄 수가 없었던 분들이며 열사의 나라에서, 동토의 나라에서, 월남전에서, 독일의 탄광부로, 간호원으로 가족과 국가를 위여 혼신을 다하여 헌신 하신 분들이기에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 국민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애국자들이십니다. 실로 건국과 호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증인들이자 주역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보수우파가 자식교육 열심히 하고 경제활동도 열심히 해서 자신의 발전과 국가발전을 이루는 동안 좌파들은 국가발전에 기여하려는 노력 없이 지식인사회와, 문화예술계, 대학가와 교육계에 침투하여 뿌리를 내리고 대한민국을 농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계의 고명하신 어느 분께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발간당시 100만 권이나 팔려 나가고 이후 400만권 가깝게 판매될 때 보수우파에서는 아무도 주시하는 분이 없었다는 것을 개탄 하셨습니다.
 
  또한 좌파들은 ‘공공의적’, ‘두사부 일체1,2’를 제작하여 대히트를 하였으며 MBC방송에서는 지금도 재방을 가끔 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관람한 수백만 명에게 사립학교의 재단은 문제의 집단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후, 2년쯤 후에 사립학교법개정안을 전교조가 제안하게 되었고, 한나라당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국회에서 절차를 무시한 채 의장이 집권 상정하여 불법으로 날치기통과를 하는 주도면밀한 좌파들입니다.
 
  한 신학도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보수우파들은 그 동안 무엇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좌파세상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어느 자리에서건 왕따를 당하기 때문에 보수의 입장을 대변할 수가 없어 화가 치민다고 하였습니다.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올해 2008년 8월15일이 건국60년이 된 해입니다. 환갑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 개인도 환갑잔치를 위해서 일 년쯤 전부터 준비를 하는 것인데 건국60주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잔치 준비를 하는 것 같지 않게 냉랭합니다.
 
  저는 2007년 8월부터 몇몇 뜻있는 분들과 의논하여 정부가 건국6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할 것 같지 않으니까 우리 민간인들이 먼저 바람을 일으켜서 정부가 무시할 수 없도록 하자고 의견을 모아 작년 11월20일에 강영훈 총리, 이인호 전 러시아대사, 바른시민사회 회장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공동위원장이 되고 몇몇 분들이 집행위원이 되고 성신여대 김영호 교수가 집행위원장이 되어 기념사업 계획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현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원회에도 제안서를 제출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건국회’라는 모임에서도 ‘건국60년국민대축제’라는 타이틀로 축제준비를 하기 위하여 정부를 움직인 결과 마지못해서 5월이 다 되어서야 국무총리산하에 ‘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가 발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두 민간단체의 모든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고, 정부 주도로 홍보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념주화 발행 소식을 저는 외국에서 들었는데 국내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념주화는 은화로 액면가 37000원에 해당하며 50000개 한정 발행이라고 합니다. 60000개 였으면 의미가 있었을 텐데, 제가 매입신청을 하게 된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6월20일에 기념주화. 기념우표, 건국절재정과 건국기념공원 건립을 ‘건국60년기념위원회’에 제안하였습니다. 기념주화와 우표발행만 채택이 되고 건국절과 건국기념공원에 대한 제안은 회신도 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올해가 건국60년이라는 것을 국민들이 많이 알게 되기를 바라며 그래야 건국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나름대로 여기저기에 제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일보에서 현대시100년을 맞이하여 시인들이 선정한 애송시100편을 연재하고, 동시도 50편이나 연제 하는 것을 보고, 올해가 건국60년이니까 축하시 60편을 마련하여 연재하였다가 건국60년경축시집을 발간하도록 권했습니다. 또한 매해 10월에 열리는 경춘마라톤대회도 이왕이면 건국60년 기념 경춘마라톤대회로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제가 봉사하는 사랑의 집짓기 여름행사에서도 ‘건국60년 기념 사랑의 집짓기’로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건국이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건국절도 건국의 아버지도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종북(從北) 좌파들이 제 세상 만난 듯이 활개치고 날뛰고 깽판을 놓고 하는 데에는 우리우파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좌파들은 교과서를 왜곡, 날조하여 현대사를 가르치고 있을 때 우리는 건국에 대해서 6.25에 대해서 자식들을 교육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광복절은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건국절이 없어도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고 무심히 지났습니다. 건국기념일을 모르는 사람이 65%나 된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에도 건국기념관을 지어야한다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한 독재자라는 이름 앞에 누구도 용기를 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 아픈 이야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현충원의 이승만 대통령 묘비가 ‘초대대통령이승만지묘’로 되어있습니다. 얼른 보기에 아무 문제 없는듯하지만 실은 애초에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지묘’라고 만들었는데, 김대중 정부에서 세우지 못하게 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교체하는데 비석이 크고 무거워 어디로 옮기기도 어려워 그 자리를 파고 묻어두고 ‘초대대통령지묘’라고 만들어서 다시 세웠다고 자유시민연대 류기남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기에 올해 7월19일 서거 43주기를 맞이하여 파내어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여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강원도 고성 이승만 대통령 별장 가는 도로 표지판도 초대대통령으로 되어있습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려는 계획아래 건국이라는 단어를 쓰지도 못하게 함으로써 사라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건국의 아버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건국의 비화’, ‘이승만과 한미 외교’, ‘이승만과 구한말 개혁운동’ 이렇게 4권의 이승만 관련 책을 읽었습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은 지금 읽는 중입니다. 원채 노인성 기억력 감퇴로 ‘무엇을 읽었나’ 시간이 아까울 때가 많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감동이라기보다는 강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제가 그 분에 관한 책을 읽을 때는 그 분이 책 속에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 분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면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흠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 분에 관한 책들을 읽은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보면 그 분은 행동하는 선각자로서 시대에 맞는 애국을 하셨습니다. 근, 현대사의 한국 역사 속에서 가장 시대에 맞는 가장 훌륭한 애국자였습니다. 구한말에는 그 당시 개혁세력이었던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제국신문과 매일시문을 발행하여 이웃강국들 특히 러시아의 부당함을 알리고, 왕정의 개혁을 권하며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대중 집회를 하는 등,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정수행능력이 없어 보이는 왕정을 ‘입헌군주공화국’으로 개혁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며, 한 때 중추원의 위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분은 개혁 진보의 원조가 되어 시대에 맞는 애국을 하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40여 년간의 긴긴 해외에서 뼈를 깎는 독립운동을 주로 미국과 국제무대에서 외교전을 펼치는 방법으로 애국을 하시었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는 미국모델의 자유민주국가 건설의 꿈을 꾸었던 분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통하여 그 꿈을 이루었고 그 꿈은 오늘의 기적 같은 대한민국으로 열매를 맺게 됨으로써 결국 그 분은 자유주의 보수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 분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영어를 잘 하는 대통령이었으며, 가장 엘리트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였고 6살에 천자문을 때었기에 마을잔치를 하였으며, 13살에 과거를 치를 정도로 신동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시험의 부정, 비리 때문에 번번이 낙방을 하게 되었고 결구 1894년 7월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1896년 배재학당에 들어간 후 6개월 만에 영어를 마스터하고 1897년 6월8일 종강행사와 졸업식 사를 영어로 하여 주변의 찬사를 받았고 외국인 의사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수재였습니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 2년 만에 조지워싱턴대학의 학사를 취득하고 이후 하버드에서 수학한 후 1910년에 프린스턴대학의 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불과 5년 만에 학. 석.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수백 건의 강연을 하여 대한제국의 형편을 알리고 일본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1904년 도미(渡美)한 이후 1965년 서거하실 때 까지 뉴욕타임스에 실린 글만도 무려 1256건이나 되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한국인이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건강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분은 6살 때 수두를 앓다가 잠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1899년 박영효 사건에 연루되어 역적죄로 한성감옥에서 6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목에 칼을 쓰고 두 손발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 17개월을 지내야했으며 몸무게가 10키로 그램이나 빠졌다고 합니다. 후에 하와이의 주치의 말에 의하면 엉덩이에 화상흔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고문을 당하지 않았나 라는 추측성 글도 있습니다.
 
  그분은 1904년 최초로 미국에 가서 학위취득 후 1912년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애국 강연을 하다가 일본의 감시망을 벗어나 1913년 다시 출국을 하게 된 후 해방된 조국을 찾아온 것은 33년 만인 1945년 10월16일 오후 5경이었으며 그때 연세가 72세였습니다. 그때 당시는 환갑인 60까지만 살아도 장수한다고 하던 때이기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되어 돌아오신 이승만 박사는 지금 나이로 85세쯤 된 노인 이었던 것입니다. 3년 후 1948년 만난을 무릅쓰고 건국을 하신 나이가 75세였으니 85-90세쯤의 나이에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파파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신 것입니다.
 
  2년 후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77세의 나이로 전쟁터에 다니면서 장병들을 위문하고 격려하는 90-95세에 가까운 초인적인 노익장이셨습니다. 1960년 4.19로 하야하실 때에는 85세이었으며 이후 하와이에서 5년을 지내시다가 1990년 90세로 작고하셨습니다. 온갖 고초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금으로 말하면 백수(白壽)를 하신 것입니다. 하늘이 주신 건강과 장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외교가이셨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그 분이 독립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들과의 충돌장면이 가끔 등장합니다. 충돌의 주요 내용은 한쪽은 행동대원을 훈련시켜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하여 위협하자는 의견과 그런 방법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니 외교력을 동원하여 미국과 기타 여러 강국을 설득하여야 한다는 이박사의 의견과의 충돌이었습니다.
 
  1904년 한성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서를 가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가면서부터 그 분의 국제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은 시작되었지만 주권과 외교권이 박탈된 나라의 독립운동가의 노력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나치정부를 피하여 불란서에 망명정부를 세웠던 독일 사람들의 경우, 국제적으로 임시정부를 인정받아 미국과 국제적인 경제지원이 있었기에, 우리 임시정부의 국제승인의 가능성을 보고 열심히 시도했던 것이지만, 미국의 대일 정책에 따라 일이 쉽게 성사되지 않자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체류기간의 그의 로비와 인맥 구성이 훗날 대한민국의 총선을 위해 유엔의 참여를 요구하였을 때 호주, 캐나다, 인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총선 감시를 이끌어 내게 되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남한정부수립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6.25전쟁 발발 당시에도 그 분이 아니었다면 유엔군 참전을 즉각 이끌어 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훌륭한 대통령의 핵심능력은 외교, 안보, 경제를 성공시키는 능력입니다. 여타 국정운영은 내각에서 책임껏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핸섬한 미남이었습니다. 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은 외양이 좀 번듯해야합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이라든지 1933년 5월 제네바 유엔국제연맹 앞에서 찍은 50대의 모습은 가히 국제적인 신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도 李 대통령에게 반하여 집안의 강한 반대와 25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었습니다. 1945년 10월 귀국 하였을 때 온 국민이 그를 환영하고 존경하던 상황이었지만 美 군정이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아 금번에 문화재로 등록 된 돈암장 주인이 이승만 대통령을 자기 집 한쪽에 기거하도록 하였다가 미군정과의 불화로 연금 상태에 까지 생기는 것을 보고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집을 비워달라는 요청이 있어 마포 나룻 터의 강바람이 센 언덕 높은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겨울이면 얼마나 추운지 동상이 걸릴 정도로 추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노인 독립운동가가 머물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긴 중소기업인 33명이 돈을 각출하여 어느 여성이 주인 이었던 현 이화장을 싸게 살 수 있도록 간청하여 구입한 후, 거처를 마련해 드린 것이 대통령이 남긴 사재의 전부입니다. 그분은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생활화가 된 분이라는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승만 대통령은 생전이나 사후에 어떤 개인 재산을 남기지 않은 분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일류 서예가 이셨습니다. 한문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시찰하는 부대마다 순찰하는 정부 부처 곳곳에 달필 수준이 아닌 예술작품 수준의 휘호를 써주곤 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시인이셨으며 생활 속에서 겪은 내용을 시로 표현한 한시집이 있습니다. 문필가이셨습니다. 한성감옥 속에서 집필하여(이달 19일 서거43주기추도식장에서 배포될 내용입니다) 일본의 눈을 피하여 동지인 박용만 선생이 몰래 미국으로 가져가 발간한 ‘독립정신’과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예언하여 베스트셀러의 책이었던 ‘Japan inside out’ 이라는 책과 기독교 105인의 사건의 실체를 파 해친 ‘한국교회핍박’등의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그 분은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언론인으로써 독립신문이나 제국신문 주필로써 주요칼럼을 도맡아 썼으며 매일신문을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고종의 후궁 왕비였던 엄비가 그 분의 글을 즐겨 읽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all-might한 분이셨으며 역대 대통령 중 군계일학 수준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을 우리는 잃어버린 세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10년을 거치면서 우리가 배운 것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세대가 역사의 현장에서 퇴장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찾게 된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애국세력의 손으로, 힘으로 건국절을 반드시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국기념일이 아닌 국가의 명절인 건국절로 제정해야 됩니다. 제힘으로 이루어내지도 못한 광복절은 해마다 열심히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낸 대한민국의 건국을 기념하고 축하 하지 않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하겠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 탄생 된 국가가 142개국쯤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근, 현대에 세워진 나라 중 제나라의 탄생일을 기념, 축하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는 건국기념공원을 만들어야합니다. 서초동에는 윤봉길 기념공원이 있고 강남구엔 안창호 도산공원, 효창공원엔 김구 선생의 공원이 있고 최근엔 보성에 서재필 공원이 세워졌지만, 어디에도 국부인 우남공원은 없으며 우남공원이 아니더라도 건국기념공원하나 없는 나라입니다. 미8군이 이전하게 되어 있는 용산 공원 자리를 좌파들이 민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차지하려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획이 무산되었습니다. 최근에 뜻있는 몇몇 분이 모여 건국공원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고 의논하게 되었고 제가 6월20일경 건국60년기념위원회에 제안서를 제출하였으나 회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셋째는 건국기념관도 만들어야 합니다. 건국공원이 성사가 되면 그 공원 안에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습니다. 그리고 그 공원 안에는 건국기념관을 필두로 역대 정부의 기념관을 만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내용은 건국60년기념위원회의 60가지 기념사업 중의 하나로 건국기념관이라고 당당히 제시하지 못하고 현대사박물관이라고 명명하고 괄호를 한 후 건국기념관이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건국이라는 용어쓰기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담입니다만, 1997년경 개인이 250여억 원 정도의 부동산을 출연하고, 삼성이 50억을 후원하고, 이화장에서 기록물, 문서 등 자료 200여점을 연대에 제공하여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하였으나 우남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한국학현대연구소라고 명명한 것과 너무도 흡사하여 씁쓸할 뿐입니다.
 
  넷째는 우남로를 지정해야 합니다. 업적이 크신 분들은 충무로, 퇴계로, 세종로, 도산로 등 ‘로(路)’로하고 웬만한 분들은 소월길, 소파길 등 ‘길’로 표현합니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건국대통령인 우남로가 없다는 것은 국가의 수치입니다. 좌파들의 방해와 국민들의 인식 부족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섯 째, 10만원 고액화폐 초상화를 이승만 대통령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화폐선정 자문위원의 고백에 의하면 70%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 하였으나 모두 묵살당하고 좌파들의 계획대로 김구 선생님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는데 김영봉 중앙대 교수와 김성욱 기자와 양동안 연구교수 외에는 김구 선정의 부당성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가 막힌 일은 김구 선생님을 연구하는 학자 중에 김구 선생님을 화폐인물로 정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작년 8월20일이 고액화폐 인물선정 의견서 제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급히 강영훈 전 총리와 조갑제 사장님을 포함한 사계의 권위자들께서 참석하시어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고, 160여명의 지성인과 20여개 시민단체의 이름으로 제안서를 한국은행에 제출하였습니다. 이후 김구 선생 선정의 부당성을 진정하는 글을 류기남 선생님 외 두 분이 제출하였으나 참작되지 않았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요, 민족주의자요, 애국자이며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훌륭한 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화폐인물로는 적격자가 아니며 만일 그분이 선정된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정부는 조롱을 당할 것이며 우리국민은 지식이 부족한 천박한 국민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김구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끝까지 반대한 분입니다. 김일성을 찾아가 남북합작정부를 세울 수 없겠는가 하는 애국적인 생각에서였겠지만 국제정세 파악에 무지했던 그 분은 남북합작정부를 하면 동구권처럼 소련의 위성국인 공산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1948년 총선 감시를 위해 유엔 감시단이 한국에 와 있는 상태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4월8일 북한의 김일성 초청으로 전조선정당사회단체(56개 단체 16개의정당과 40개의단체)모임에 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의 이름으로 참석하여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1948.4.30) 공동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결정적인 김구선생님의 대한민국에 대한 실수가 4항의 ‘남조선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명서 내용입니다.
 
  이후 유엔 감시 하에 5월10일 총선이 실시되고 정부승인 사절단을 유엔에 파견하려고 할 때 김구 선생은 8월1일 한국통일촉진회를 결성하여 유엔의 한국승인을 저지하기위하여 서정애를 미리 보낸 후 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하였으나 김규식이 가지 않았습니다. 8월15일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1월3일에는 미소(美蘇) 양군이 철수하고 통일정부를 수립을 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대한민국단독정부를 끝까지 반대한 분입니다. 12월12일 유엔은 40 對 6으로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하고 정부는 12월13일 유엔가입을 위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후 김구선생은 사망하게 되어 임시정부에는 기여가 많았지만 대한민국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 분을 대한민국의 고액화폐인물로 선정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입니다.
 
  여섯 째,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현재 국내에 세워져 있는 이승만대통령 동상은 4개입니다. 첫째는 국회의사당 안에 세워져있습니다. 초대 국회의장이셨기 때문에 15대 국회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의회를 통과하여 세워졌습니다. 두 번째는 이승만대통령이 세운 배재대학 우남관 앞에 올해 6월5일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소위 학원민주화라는 세력들에 의해서 세 번씩이나 철거되어 지하에 보존하였다가 올해 개교기념일을 맞이하여 총동문회와 총학생회주관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여전히 반대세력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로 방해를 하였습니다. 세 번째 것은 배재 중, 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李 대통령 사저인 이화장에 세워져 있습니다. 1985년에 하와이에 세워진 것을 계기로 1988년 건국40년을 맞이하여 남산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세 분이 국내에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각자 1만 원씩 3만 원을 거두어 가지고 이화장을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최규하, 김옥길, 정일권, 김일한, 이재형, 김정렴, 오중정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참여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 연구를 위하여 거액의 부동산을 출연하였던 최종옥 여사 세 자매가 주된 후원자가 되어 그야말로 시민들의 힘으로 세워졌다는 이화장의 말입니다.
 
  그 외에 하와이의 기독한인학교를 청산한 자금을 토대로 하여 설립된 인하대학에는 1979년 하와이 교포들의 기증으로 세워졌던 것을 현재에는 철거되어 지하실에 보존되어 있는 중이며, 총동창회에서 금년에 다시 세울 계획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에는 건국60년을 맞아 자유총연맹에서 자체 부지에 건립할 계획을 마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해외에 세워진 것으로는 1985년 하와이에 세워져 있습니다.
 
 남산에 세워져 있던 동상은 1960년 4.19 혁명 때 파괴하였던 것을 어느 시민이 동강난 상부를 자기 집에 가져다가 방치하여 둔 사진을 김성욱 기자가 찾아내어 알리고 조선일보에도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남산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헐려 나간 자리에는 현재 분수대가 만들어져있고 남산에는 이승만 대통령 대신 박정희 정부에서 김구 동상을 세웠습니다.
 
  정말 좌파들은 치밀하고 끈질긴 사람들입니다. 국내에서는 김구 선생을 앞세워 이승만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끊임 없이하고 미국에서는 서재필 선생님을 내세워 이승만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올해 6월에 서재필 동상이 총영사관 앞에 건립이 되었습니다. 현지 교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각의에서 결정하여 10만 달러의 예산에 교민들의 일부성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현지 교민들과 언론은 서재필 박사의 동상은 그 분이 평생 살아왔고 유족들이 아직까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에 건립하는 것이 마땅하며 워싱턴 D.C에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의 본거지이자 국무성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의 독무대였던 만큼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글이 실려 있는 신문도 보내왔습니다. 다행이 그곳에서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동상건립위원회가 결성되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곱째, 우남애국상도 제정해야합니다. 뜻있는 분들이 모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분투하는 분들에게 애국상을 수여하였으면 합니다.
 
  여덟째, 우남장학회도 되살려내야 합니다. 후대들에게 위대한 대한민국의 국부에 대한 교육을 시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4.19혁명에 뒤이어 5.16군사정부가 들어선 후부터 박정희 대통은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인하대학을 몰수하여 한진기업 조중훈 씨에게 넘기고, 해외에 한국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법인으로 되어있는 이문당이라는 출판사도 해체되고, 우남 장학재단도 없어지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사저인 이화장 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지만 프란체스카 여사의 강력한 저항으로 뺏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역대 정권은 계속해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한 폄하 내지는 역사에서 지우기를 하였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자유당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한분이고, 김대중 정부는 제2건국위원회를 구성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을 무시하고 자기정부의 정통성을 꾀하려 했으나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 자신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정의가 실패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말한 것은 대통령 자신이 자기나라의 건국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역대 정부가 역사 속에 묻어버리거나 지워 버렸던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우리 애국자 민초들의 손으로 되살려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잘못된 역사관에 의한 좌파들의 농단을 제압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이승만 대통령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께서 우리 국민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바는 첫째, 우리 대한민국을 왕조에서 주권재민의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 건국하신 것입니다. 둘째, 세계주의가 막 시작되던 1945년 4300여 년간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속하여 살던 우리 한민족을 떼내어 현대판 로마제국인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편입하는 문명사적 전환을 시켰다는 것이며 이것은 혁명에 가까운 시도였다는 건국대학 이주영 교수의 논리입니다. 셋째, 해양문명권인 팍스아메리카나로의 편입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폭동, 정치파동, 6.25전쟁과 같은 수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결국 1953년 한미동맹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해양문명권으로의 편입이 확실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알려진 탁월한 위인이신 제나라 건국의 아버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고 묻어 버리려는 시도를 하는 좌파들에 맞서야 하며 인식이 부족한 국민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당장 고액화폐 인물선정 문제를 사회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국민 토론에 부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우선적으로 1988년 세 사람의 바둑 두던 분들과 같은 생각으로 뜻을 모으고 십시일반 모금을 하여 헐려 나간 그 곳에 동상을 다시 세워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의 상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건국60년을 맞이하여 국민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건국절 제정과 건국기념공원 결정과 기념관 건립을 정부에 간절히 청원하여 이 일이 반드시 성사될 수 있도록 우리 우파 애국세력들이 주가 되어 성사시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4.19세대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언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현명한 애국자들이라면 이승만 대통령처럼 시대에 맞는 애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는 진보적으로 자유 보수주의적 개혁이 필요할 때에는 자유 보수주의적으로 애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 4.19혁명은 당시 정부의 부정선거와 독재를 막기 위한 훌륭한 애국운동이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원조들이었으며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50년이나 지난 21세기의 지식정보사회이며 세계화 속에서 무한경쟁을 하여 살아 남아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역대정권뿐 아니라 4.19 애국세력도 건국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이승만 대통령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는데 한 몫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진정한 애국세력이라면 자신들의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건국절도 없고 건국의 아버지도 없는 대한민국으로 방치하여 좌파들이 날뛰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스스로 지키려는 노력이 부족한 점을 계기로 대한민국을 우습게 여기어 중국은 역사를, 일본은 영토를 훔쳐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는 애국관도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의 애국심을 발휘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고 후대에게 전수하여 이 나라 천년만년 대계의 초석 역할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셔야 합니다. 아니, 앞장서야 합니다.
 
  중국의 등소평은 모택동에 의해 숙청되었던 사람입니다. 모택동 사후 복권이 되어 모택동의 공을 70%로 과를 30%로 평가하여 체제를 안정시키고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늘의 대국 중국을 일으킨 진정한 애국자인 것입니다. 자신의 정적이었으며, 3800만 여명을 굶주림으로 죽게 하고, 문화혁명을 10년간 지속함으로써 중국의 역사를 후퇴시킨 자신의 정적을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높이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요, 의회의 아버지요, 국군의 아버지요, 의무교육의 아버지요, 여성교육의 아버지요, 농지개혁의 아버지요, 언론의 아버지요, 주권재민의 아버지요, 명실이 상부한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아버지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金吉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http://www.chogabj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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