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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⑪ 경무대서 "한미 휴전전쟁" 18일
작성일 : 2017/11/08 12:21 / 조회 : 9 / 추천 : 1

美-中-북한이 한편 되어 `대한민국 죽이기` 대공세...`1인 세계대전` [새연재:한미동맹]

경무대 `소 휴전회담` 18일...이승만 협상술에 로버트슨 녹초 되다
아이젠하워의 한미방위조약 약속문서 받아내...이승만도 양보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⑪ 경무대서 `한미 휴전전쟁` 18일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선물’은 충분히 가지고 왔다.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에게 보내는 선물을 들고
로버트슨 특사는 26일 아침 9시10분 경무대에 도착하였다.
빠바방~~군악대가 팡파레를 울리며 연주를 시작하였다.
신록이 우거진 아름다운 대통령관저 넓은 뜰에는 3군의장대가 도열하고
현관엔 한국정부 모든 국무위원들과 장성들이 나와 미국특사 일행을 환영하였다.
로버트슨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장대 사열을 받아야했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한미 양국의 휴전협상 담판은 이렇게 화려하고 거창하게 시작되었다.
노련한 이승만은 미국특사를 국빈급 특별대접으로 협상의 첫 카드를 내민 것이었다.

6.25남침 3주년 이승만대통령의 `난국돌파` 연설. 아래에 로버트슨 입경 기사.ⓒ조선DB
▲ 6.25남침 3주년 이승만대통령의 `난국돌파` 연설. 아래에 로버트슨 입경 기사.ⓒ조선DB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기념촬영을 하고 첫 회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측은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 외무장관, 신태영 국방장관이 배석하였고,
미국측에선 로버트슨 옆에 브릭스 주한대사와 양 국무성동북아과장이 앉았다.

이날 첫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NBC방송 존 리치 기자가 토의내용까지 녹음했다.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로버트슨씨, 나와 극민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별사절이자 덜레스 국무장관의 대표로서
 귀하를 환영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게 생각한다. 귀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에 한국에  왔다.
 나는 귀하의 방한중 우리가 어느 정도의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로버트도 맞장구 쳤다. “뜨겁게 환영해 주시고 각하와 대화할 영광을 가질 수 있음에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 있는 귀하의 친구 두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의 문안과 메시지를 휴대하고 왔다. 우리 양국간의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대한다”

한미 3명의 지도자, 이승만은 프린스턴대 박사이고 아이젠하워는 컬럼비아대 총장을 지냈고
덜레스는 프린스턴대 박사 출신으로 이승만과 동문이다.

로버트슨이 덜레스 장관의 친서를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국내에선 공개되지 않고 미국 언론들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이젠하워 미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닉슨 미부통령을 이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하여
  파견할 것을 제안하고, 회담장소로 일본 혹은 오키나와가 선택될 것”이며, 이런 조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조속한 휴전성립을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직접교섭을 행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라고 전하였다.

낮12시 15분까지 2시간 30분이나 이어진 첫날 회담에서 이승만은 주로 로버트슨의 말을 듣는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한번 한비방위조약의 ‘즉각적인(immediate)’ 체결과 경제원조, 그리고
한국육군 20개 사단의 증강등을 조목조목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로버트슨은 휴전 반대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가 

‘즉각적인 변화’를 보여야한다는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휴전 준수- 이것이 로버트슨이 서울에 온 ‘특사로서의 단 하나의 임무’이다.

이대통령은 회담후 기자들에게 “로버트슨씨가 좋은 생각을 가져와서 많이 양해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트슨사도 “매우 우호적인 회담이었다. 우리는 서로 오해를 없애는데 진전을 보았고 또 만날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로버트슨 특사의 침통한 표정과 또 외교소식통이 전하는 ‘낙관 불허론’으로 미루어보아 회담진행은 “결코 순조로운 것이 아니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라고 조선일보는 기사를 썼다.

경무대서 첫 회담전 악수하는 이승만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
▲ 경무대서 첫 회담전 악수하는 이승만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


팽팽한 협상..."한가지 합의하면 또 새로운 조건 꺼내는 이승만"

6월27일=이틀째 회담에서 로버트슨은 한국이 휴전협정을 지지하고 준수한다면,
또한 동시에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무기한 유엔군에 맡길 것에 동의한다면,
한미방위조약을 미-필리핀 조약과 유사한 수준으로 체결하는 문제를 즉시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아이젠하워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유엔군이 한국의 북진통일에 협력할 때에만 작전지휘권을 계속 위임할 것이며
방위조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휴전 조인 이전에 체결되어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였다.

28일= 일요일에도 논쟁은 계속되었고, 로버트슨은 3-4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회담이 장기화
되리라는 예상으로 출국 스케줄을 바꿔야 했다.
29일=클라크와 로버트슨에게 이승만은 “한국전쟁은 내전이 아니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생존투쟁”이라 규정하고 군사적 승리만이 전세계 공산 야욕을 잔념시킬수 있을뿐더러,
싸워서 이겨야만 한국이 ‘제2의 중국’처럼 공산화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하였다. 로버트슨은 “미국은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 통일을 실현시킨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면서 방위조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한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잘라 말했다.

30일=회담이 평행선을 달리자 클라크와 브릭스 대사는 이승만 대신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휴전을 반대하면 미국은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침을 전달하였다. 초지일관 고집을 꺾지 않는 이승만의 의지를 꺾으려는 협박이었다.

7월1일= 로버트슨은 덜레스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shrewd, resourceful) 인물인데다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national suicide)로 몰고 갈 능력이 충분하고 매우 감정적이며 비논리적인 광신자(fanatic)“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받아야만 한다“는 동질감도 밝히면서
따라서 협박과 회유의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이승만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며 그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보고하였다. 

2일= 이승만은 휴전후 개최한다는 정치회담에서 통일을 실현시키겠다는 미국의 제안이
 “실현성도 없고 어리석은 시간낭비”이며 한국을 어린애로 보고 달래려는 ‘당근’인줄 알면서도
이것을 역협상카드로 던졌다. “만약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은 한국통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준다는 확실한 약속을 한다면, 휴전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이런 약속도 없는 한 국민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다소 완화된 자세를 보여 준 것이었다.
★3일= 로버트슨이 정전후 전쟁을 재개하려면 "미국의회의 승인은 필수적"이라고 버티자 

이승만은 역사적 근거를 들이대며 대한민국의 방어는 `미극의 의무`임을 설명한다. 

암덩어리처럼 평생 가슴에 박혀있는 강대국의 횡포, 그것은 구한말로 거슬러올라가는 

식민시대의 비극, 미국-일본 합작을 통해 저질러진 한일병탄부터 강의를 시작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한국인은 1910년과 1945년 두차례나 미국의 배신에 버림받았소.
조선왕국과 체결했던 ‘조미수호조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일본침략에 협력하였고

해방후 한국과 사전협의도 없이 한반도를 동강내어 소련의 강압에 굴복, 분단시키더니

이제와선 우리에게 일방적인 휴전을 강요하는 상황은 또 하나의 팔아넘기기(a another sellout), 즉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소련에 넘기고 중공에 넘기려는 ‘세 번째 배신’이 되지 않겠소?”

불쌍한 대한제국의 슬픈 에피소드 <비운의 딘막극 2장>

제1장 = 1905년 8월 뉴욕의 이승만, 루즈벨트 대통령과 허망한 만남

한성감옥에서 6년째 옥살이하던 이승만이 석방된 것은 순전히 영어를 잘한 덕분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놓고 한판 패권을 다툰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고종황제는
미국대통령에게 원조를 청할 특사를 찾다가 ‘왕실의 역적’으로 몰려 옥살이 중인

이승만을 풀어주어 미국으로 급파한다.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일방이 외부로부터 불공정-모욕을 당하면 타방이 거중조정으로 돕는다)는 규정에 매달려 고종이 나라를 지켜보고자 짜낸 궁여지책이다. 

1904년말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면담신청을 했건만 이듬해 봄 여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가 8월 4일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5월에 대한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한 일본이 미국에 부탁하여
전후처리 강화회담을 맡아 분주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욕 롱아일랜드 사가모어 힐에 있는 여름 백악관에서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를 30분간 만나주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유학생 이승만.
▲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유학생 이승만.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26대 대통령.
▲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26대 대통령.


“우리는 우리국민의 청원서를 각하에게 올리러 왔습니다.” 

윤병구가 청원서를 건네자 루즈벨트는 훑어보더니 청원서를 도로 내밀었다.

“나는 러이사와 일본에게 강화를 권할 뿐이고 다른 간여는 못합니다.”

“각하의 스퀘어 딜(Square Deal)을 행사하여 주십시오.” 이승만이 나섰다.

“강화회의에 간섭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기회 있는대로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입각하여
각하께서 불쌍한 우리 대한의 위험을 건져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건 중대한 일이므로 한국공사관 통해서 보낸다면 언제든지 접수하겠습니다.”

루즈벨트의 말에 뛸 듯이 감격한 두 사람은 그길로 호텔로 달려가 방값을 치루고
거르름돈 받는것도 잊은 채 워싱턴 한국공사관으로 달렸다.
그러나 김윤정 공사대리는 뜻밖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본국의 훈령 없이는 못합니다.” 이 대답에 윤병구와 이승만은 멘붕상태로 흥분했다.

그동안 이승만이 밀사로 파견된 ‘실세’인줄 알자 김윤정은 진급운동까지 부탁했던 터인데
진급된 후 태도가 돌변, 그 부인까지 나서서 ‘못 한다’고 거부하였다. 

이승만과 유변구는 오전 내내 김공사를 설득, 얼르고 달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김윤정은 공사관 철문을 잠그고 흑인 경비병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소리 질렀다.
그는 일본의 하수인으로 매수되어 버린지 오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을 도미시킨 

민영환에게 보고서를 써보내 김윤정을 파면시키라고 요구했다.

한달후 9월5일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제2조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러시아 제국정부는 일본제국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우월한 이익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아니할 것을 약정한다.’로 되었다. 패전국 러시아는 10년간 지배하던 조선왕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인정한 것. 이보다 앞서 8월12일 제2차 영일동맹 3조에도 일본이 한국을 지도, 감리, 보호 조치하는 것을 영국이 인정한다고 했다. 이로써 일본은 마침내 미국과 영국과 러시아 3대강국으로부터 ‘한국 보호권’의 보장을 얻어내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두 달후 11월18일 일본은 서울 덕수궁에서 이토히로부미가 고종황제를 강압하여
소위 ‘을사 보호조약’을 체결, 마침내 조선반도의 지배권을 장악한다.

12월 루즈벨트는 포츠머스 조약의 공로로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이었다.

가쓰라 다로 일본수상(왼쪽)과 태프트 미국육군장관.
▲ 가쓰라 다로 일본수상(왼쪽)과 태프트 미국육군장관.

더욱 놀랍고 무서운 일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다.

루즈벨트는 러일전쟁 강화교섭을 부탁하는 일본과 비밀거래에 합의,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로 하여금 도쿄에 가서 ‘필리핀과 조선’을 바터하는
빅딜 밀약을 맺게 하였다. 즉 1905년 7월 29일 일본 총리 겸 외무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郎]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후에 미국 27대 대통령)가 맺은 비밀 협약(가쓰라-태프트 협정, 또는 태프트-가쓰라 각서(Taft Katsura Memorandum)에서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하기로 합의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이 문서는 공식조약이 아니고 비밀각서로만 존재하다가 19년후 1924년 미국의 외교역사가인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이 T. 루스벨트 대통령의 문서철을 연구하다가 발견해
[커런트 히스토리(Current History]지에 발표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니까 루즈벨트가 이승만 일행을 만나준 것은 비밀협약후 불과 엿새 뒤의 일이다.

식민제국주의 약육강식의 전성시대, 일본과 미국의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한국 무시)를 알지도 알 수도 없었던 이승만이 오랜 뒷날 그 실상을 알고서 다시한번 경악 분격했다. 그때부터 이승만은 미국내 독립운동에서 ‘미국의 한국 배신’을 들어 미국의 도덕적 책임과 반성과 그 보상을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1941년 8월에 출간한 영문저서 [Japan Inside-Out]에서는 일본의 정체를 폭로함과 더불어 그 밀약을 공개하고 “미국은 한국에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침략을 분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야한다”고 미국민들에게 호소하여 미국 의회등 지도층의 공감을 끌어내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제2장= 112년전의 서울, 고종황제는 ‘앨리스 공주’에게 매달리다.

‘일본의 개‘로 변한 김윤정 워싱턴 공사에게 배신당한 이승만이 분풀이를 벼르고 있던 그 때, 대한제국 수도 한성은 ‘국빈맞이 준비’로 어수선하였다. 국빈이란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그녀가 중국 여행 뒤에 서울에 온다는 소식에 고종황제는 ‘구세주’를 만나는 듯 좋아했다.

만주 여순에서 배를 탄 앨리스가 제물포에 상륙하여 황제전용열차를 타고 서울 한성(漢城)에 나타난 것은 추석을 앞둔 9월19일, 거리에는 울긋불긋 새옷을 차려입은 군중이 빽빽이 늘어서서 청홍(靑紅)색의 장명등(長明燈)을 들고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 공주님’을 환영하였다. 황실악단은 미국 국가를 연주했으며 황제용 가마를 탄 앨리스는 깨끗이 청소한 거리를 달려 미국 공사관에 여장을 풀었다. 고종은 당초 제물포에서부터 한국기병대 사열과 예포를 발사하는 국빈영접을 계획했으나 일본 측의 저지로 포기해야했다고 한다.

앨리스가 황제의 가마를 타고 나들이 하는 모습의 그림뉴스.(1905년 프랑스 신문 게재)
▲ 앨리스가 황제의 가마를 타고 나들이 하는 모습의 그림뉴스.(1905년 프랑스 신문 게재)

재색을 겸비한 21살 처녀, 루즈벨트와 사별한 부인 사이의 외동딸 앨리스는
미국에서도 ‘앨리스 공주’(Princess Alice)라 불리며 매스컴의 인기를 독차지할 때였다.
재클린 케네디보다 더 아름다웠다는 대통령 딸은 ‘드레스를 입은 야성동물’이란 별명처럼
‘튀는 행동’으로 유명하여 보도경쟁의 아이컨이 되어있었다. 호기심 왕성한 젊은 처녀는
러일전쟁후 아시아를 구경하고 싶어서 연인 롱워스 하원의원과 육군장관 태프트,
다른 정치인등 일행과 함께 ‘만추리아호’를 타고 미국을 떠났다.
하와이에 들른 후 7월 하순 일본에 도착, `여왕 대접`을 받으며 광관을 즐겼다.

바로 그때 태프트는 루즈벨트의 지령에 따라 은밀하게 일본 가쓰라 총리와
‘한국-필리핀 바터 밀약’을 맺었던 것, 며칠 후 태프트는 미국땅 필리핀으로 가고
앨리스 커플 일행은 망해가는 청나라를 한바퀴 관광한 다음, 조선땅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당시 고종은 경운궁 화재(1904년, 일본소행 추정)로 황실도서관 중명전(重明殿))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웃한 미국 공사관에선 창문으로 황제의 움직임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한다. 다음 날 20일 첫 오찬이 베풀어졌을 때 고종은 앨리스를 같은 식탁에 앉혔다. 

고종 황제가 외국인을 공식적으로 같은 식탁에 앉힌 것은 처음이었다. 나머지 일행은 작은 테이블에 한국 고관들과 앉았다. 황제의 특명으로 처음 양복을 빌려 입은 관리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미국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앨리스는 연일 만찬과 오찬에 참석하면서 대한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환대’를 받으며 서울 주변을 관광하였는데.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도 찾아가 구경한 사진도 남아있다. 열흘 뒤 9월29일 황제전용 기차로 서울을 출발, 10월2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명성황후의 홍릉을 방문, 석상에 올라탄 앨리스(왼쪽)와 미국남자들.
▲ 명성황후의 홍릉을 방문, 석상에 올라탄 앨리스(왼쪽)와 미국남자들.

 당시 앨리스의 수행원 윌러드 스트레이트는 여러장의 사진과 기록을 남겼다.

“이번 한국 여행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방해공작이었다. 앨리스 양이 왕족이 아니라면서 황실 차량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사사건건 끼어들어 비열하게 행동했다. 일본인들은 앨리스 양의 방한이 한국인들을 고무시키지않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중략)....황실의 오찬은 황제가 통제하고 있었지만, 그 황제는 일본인이 통제하고 있었다. 

고종은 필사적으로 미국의 도움을 원했다. 상원의원 뉴랜즈를 옆으로 불러 ‘미국 대통령에게 조정역할을 하도록 요청해 달라’고 거듭거듭 부탁했다.
뉴랜즈 의원은 ‘공식창구를 통해 적법하게 요청하라’며 비웃는 투로 미소지었다.
실로 한국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 같았으며 앨리스 양과 우리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고 매달렸다...(후략)...“

앨리스는 귀국후 인터뷰에서 한국 방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감명은 없었다. 좀 서글프고 애처로왔다. 황제와 식사하러 들어갈 때
그는 내 팔을 붙잡았다. 그는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여러벌의 옷을 입었는데
호화롭기는커녕 연민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떠나 올 때 환송회견장에서
황제와 황태자는 각각 자신의 사진을 주었다.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둔감하고 슬퍼 보였다.
그 나라는 이미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고,
궁을 드나드는 일본군 장교들은 대단히 민첩하고 유능해 보였다.”

태프트-가쓰라 밀약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적에게 주먹질 한 번 못하는 나라는 하나님도 돕지 못할 것이다”

하버드 법대출신 루즈벨트는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그래도 마음에 걸렸던가.
중국에 대해서 이런 말도 했다. “청국이 돈 한푼, 병사 한사람 사용하지도 않고
국제적 권리에만 끼어들려고 애걸하는 것은 이론상 어불성설이다.”
루즈벨트는 당시 이토록 냉엄한 강대국의 리더였기에 오늘날까지 미국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5명의 대통령 중 한명으로 남아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왼쪽)와 앨리스 루즈벨트.
▲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왼쪽)와 앨리스 루즈벨트.

그러니까 `을사보호조약`은 `태프트-가쓰라 밀약` 넉달후, 앨리스가 서울을 떠난

두달 후, 고종황제가 앨리스를 환대했던 그 중명전에서 강제적으로 맺어졌던 것이다.

★ 밀착된 미국-일본에 ‘왕따’ 당한 대한제국의 운명, 이것이 ‘코리아 패싱’의 원조다.

그로부터 40년, 일본의 기습을 받아 태평양 전쟁으로 막심한 피해를 당한 미국이란 나라는 전후 5년만에 또다시 적국 일본과 밀착되어간다.
피해자 한국은 또 ‘패싱’ 신세인가?

이승만은 고종이 아니다. 그가 청년시절 그토록 경멸했던 ‘왕 답지 못한 왕’의 실패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 똑같이 무지무능을 반복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국운의 갈림길,
미국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져 이승만은 겨우 ‘왕따’ 신세를 면한 참이다.

조-미 수호조약을 무시한 미국의 배신! 배신자라 욕만 할수 없는 역사를 본다.
배신하게 만든 `우물안 개구리` 조선왕조 `무지 무능의 죄`가 더 크지 않을까.

한미방위조약 체결이야말로 조선의 죄를 씻어내고 미국의 배신에 복수하며
미국이 다시는 배신 못하게 만들면서 대한민국이 생존할 생명의 만리장성이다.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의회가 지자할 것이라는 성명을 상원 의장인 닉슨 부통령이 발표, 이승만대통령에게 전하였다.ⓒ조선DB
▲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의회가 지자할 것이라는 성명을 상원 의장인 닉슨 부통령이 발표, 이승만대통령에게 전하였다.ⓒ조선DB


7월4일 =  미국 독립기념일, 로버트슨은 이승만에게 “결판을 내자”고 덤볐다.
“우리 두나라가 함께 갈것이냐? 각자 독자의 길을 갈 것이냐? 이것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다.(It’s up to YOU!)”면서 미국이 제공하는 선물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은 결코 위압(COERCION)이 아니오“라는 말은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었다. 

이승만도 맞받았다. “서울 지척에 중공군 대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미국은 상원의 동의없이는 전쟁을 못한다면서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 방위조약 체결도 립서비스(lip service)에 불과할뿐,
상원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경우 어쩔 셈인가? 문서로써 확실한 보장을 하라.”

토론의 승리자는 언제나 이승만, 그가 21살때 배재학당 학생회 `협성회` 토론에서도 그랬다.

어느팀이든 그가 참여하여 열변을 토하면 결론은 항상 그대로 결판나곤 했다.

이날도 토론 끝에 처음으로 미국측이 한미방위조약의 초안을 내기로 하고 회담을 끝냈다.

5일= 로버트슨은 덜레스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이 휴전동의를 못하는 이유는 분단의 영구화 우려 때문이라는 것.
 *이승만이 장차 중공이나 소련만이 아니라 일본의 재침을 똑같이 우려한다는 것.
 *이승만이 미국 정치사를 너무 잘 알아서 상원의 조약 비준에 대해 불신이 깊다는 것.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상원 지도자들의 비준보장 증거를 만들어 보여줘야 하겠다는 것. 

7일= 이승만은 로버트슨에게 비망록을 보냈다.
1) 미국측 초안에는 조약당사국 중 한쪽이 공격받을 경우, 다른 쪽이 ‘즉각적이고 자동적    (instataneous and automatic)’으로 개입한다는 조항이 없다는 점.
 2) 한국은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와 달리 ‘순식간에 치명타(a swift crippling blow)’를 당할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는 나라임을 명심하고 방위조약 문항을 만들 것.
3) 최소한 ‘일본 내와 주변에(in and around Japan)’ 미군 주둔을 명문화한
   미일안보조약과 같은 수준의 조약을 체결해야 할 것..

8일= 이날 이승만은 “미국은 한국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the only) 우호국가’임을
솔직하게 고백한다”며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로버트슨도 감동했던가, “요청하신대로 한국 내와 주변에(in and around Korea) 미군이 주둔하는 조항을 수용하겠습니다”고 선뜻 ‘밤새 선물’을 꺼내놓는 것이었다.
그는 대신 “휴전후 한국 통일문제를 다룰 정치회담이 결렬될 때까지는 시간 제한없이
한국군을 유엔군에서 철수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과 마라톤협상을 벌이던 로버트슨.
▲ 이승만과 마라톤협상을 벌이던 로버트슨.



침묵회담 30분...‘협상의 달인’ 8순 이승만의 지구전

“잘 되면 사흘 정도...길어도 1주일 내로 끝난다” 로버트슨 자신이나 이승만 주변 참모들도
낙관적으로 보았던 ‘경무대 휴전 협상’은 열흘이 지나서야 조약문서 검토가 시작되는 단계, 

워낙 극비리에 대통령 관저에서 진행되는 일인지라 언론은 날마다 코끼리만지기식 보도로

관측통들의 추측기사가 난무하는 지경이다. 어제는 ‘의견일치’ 오늘은 ‘팽팽한 대립’이다.

회담 관계자들을 비롯, 도쿄에서 왕래하는 클라크도 지치고 워싱턴에서 회담을 조정하는 팀도
연일 짜증을 냈으며 경무대 앞에 진을 친 취재진도 지쳐갔다.
당시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였던 이혜복의 회고담이다.

"1주일동안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는 연일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 끈질긴 설득작업을 펼쳤다. 그때 나도 경무대 마즌편 신무문(神武門) 앞에서 대기했다가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로버트슨 차관보와 노상 인터뷰를 날마다 되풀이해야 했다.
하루는 경무대를 나온 로버트슨이 "오늘은 할 얘기가 정말 없다"고 자리를 뜨려하자
"그게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자 그는 "오늘은 이 대통령이 입을 곽 다물고
선채로 창밖을 내다보며 30분동안 묵묵부답이라서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고 서 있다가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기사를 썼으니 그날 신문 제목은
`침묵회담` 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또 어느 날 외무장관 변영태는 “이대통령은 휴전후의 정치회담이 90일이내 한국 통일을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전투를 재개하는데 미국의 보장을 요구하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서 미국측은 수락할 수 없다고 버티지만 “우리들이 아직도 토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회담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잖으냐”고 웃기도 했다.
아무튼 경무대측은 “로버트슨이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란 말만 반복하였다.

공산측은 `한국측의 휴전협정 준수를 보장하라`고 클라크 장군에게 요구했다.ⓒ조선DB
▲ 공산측은 `한국측의 휴전협정 준수를 보장하라`고 클라크 장군에게 요구했다.ⓒ조선DB



공산측 "이승만의 휴전협정 준수를 보장하라" 요구

★ 공산측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북경 방송은 5일 이대통령에게 휴전을 수락하도록 설복하는 미국의 노력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동정을 표시하여 왔다는 보도가 나올 지경이었다.. 

동방송은 미국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놀랄 정도로 온건하며, 이대통령에 대해서는 극도로 신랄하게 발하였다. 북경의 업서버들이 보는바에 의하면 이것은 이대통령이 휴전수락을 거부하더라도 공산측은 한국 휴전에 조인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한다.

동방송은 “이대통령은 너무나 무리를 하고 있다. 역사의 운명은 결코 그런 자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대통령은 미국 국민에게 그의 정권을 위하여 계속 피를 흘리도록 하려고 한다.
미국 국민들은 결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의 선전방송을 계속하였다.

동시에 이 방송은 워싱턴 동경 서울의 서방언론들이 이대통령이 반대하여도 휴전을 조인할 준비를 갖추어야한다는 보도를 다량으로 보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북경방송은 한국 때문에 곤경에 빠진 미국이 정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북경방송은 이제는 이대통령을 미국의 ‘괴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날 방송은 그동안 반공북한포로 석방에 미국이 ‘공모자’라던 비난을 되풀이 하지않았다.

오히려 이대통령의 언사를 웃음꺼리로 집중비난하면서 “이것은 미국민의 독립정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보도, 중국 공산당 방송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독립정신까지 언급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또한 클라크 장군이 ”곤란한 입장에 놓여잇다“고 동정적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참 그렇다“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7월7일자)

★공산측은 8일 한국의 참여없이 휴전을 성립을 위한 최종노력을 기울이자는 지난 6월29일자  
클라크 장군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이로써 경무대의 한-미 회담에 새로운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워싱턴 당국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공산측의 압박으로 미국은 휴전성립을 위해 큰 결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승만-로버트슨 회담도 판문점 휴전회담이 재개되기 전에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의연히 지금까지 기본적인 방침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은 오직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달려있다.(동아일보) 

★ 8일에도 경무대 앞에서는 수천명의 군중들이 “통일 없는 휴전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대통령 비서 한사람이 경무대를 뛰어나와 판문점에서 공산측이 배포한 ‘휴전회담 재개 수락’ 문서를 들고 황급히 경복궁 신무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승만은 경회루 연못에 낚시줄을 던져놓고 잠든 듯 기도하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서가 문서를 건네자 한번 훑어본 이대통령은 본체 만체 다시 연못의 물만 들여다보았다.
약 3시간동안 낚시질에 전념한 이대통령은 “잉어 몇 마리를 낚았다”고 비서가 전하였다.

오늘의 경회루 연못(자료사진)
▲ 오늘의 경회루 연못(자료사진)


‘소(小) 휴전회담’? 이승만 혼자 전셰계를 상대로 싸우다

휴전 반대자와 휴전지지 국가들의 대결—열전의 진영과 휴전의 진영이 이렇게 뒤바뀔수 있는
전쟁이 언제 어디 있었던가. 휴전을 반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대통령 오직 한명인데
휴전을 찬성하는 대결세력은 미국, 유엔참전국들, 중공, 북한 등 20여개 국가들이다.
아니 중립국을 더하면 전세계가 이승만을 에워싸고 “그만 휴전하라” 욱박지르는 판국이다.

전선에선 서로 총질하며 싸우는 아이크의 미국과 마오쩌둥의 중공, 김일성의 북한이 한편이 되어 유엔과 함께 밀어붙이는 압박공세를 79세 노인 혼자 힘으로 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대통령 대(對) 세계의 휴전 전쟁, 미-영국의 언론들은 ‘소 휴전회담’이라 부르며
휴전을 재촉하는데 조그만 경무대 안에서는 ‘1인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해야 할 것이다.. 

몸이 부서져도 용납 못할 분단, 지구가 깨진다 해도 포기 못할 통일! 이 시기 이승만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그 뼈아픈 고뇌와 절절한 애국의 언어들에 읽는 이의 가슴이 더워진다. 

7월9일= 어제 경회루 연못 속에서 무엇을 건졌던가, 잉어 몇 마리가 아닌 새 전략을 낚았던가. 이승만은 밤중에 손수 타이프라이터로 작성한 비망록을 로버스튼에게 건네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라지만 로버트슨의 말을 액면그대로 믿을 순 없는 이승만이다.

한미방위조약도 “아이크의 공약이 필요하다”며 친서를 받아두었던 이승만은
날마다 로버트슨과의 대화도 문서로 작성하여 증거물로 비치하고 꼼꼼하게 대화를 진행한다.

그런 이승만이 쓴 비망록을 읽어가는 로버트슨의 심장도 떨린다.
새로운 제안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고집장이 노대통령의 큰 맘 먹은 양보였다.

“큰 장애물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로버트슨은 지긋이 쳐다보는 이승만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휴전조인 전에 중공군이 꼭 철수해야한다’는 조건을 이승만이 오랜만에 철회한 것이다. 

이승만보다 8살 아래인 로버트슨은 원래 금융전문가로 트루먼정부에 들어가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당정부의 경제문제를 도왔던 터라 ‘덜레스 뺨치는 반공주의자’로 평가받는 인물,
 그런데 무골의 장제스와 달리 양파처럼 무궁무진한 전술를 구사하는 지략가 이승만을 만나
진땀을 흘린 회담이 벌써 2주일째, 한문제가 끝나는가 하면 문서화를 요구하며
또 새로운 조건을 꺼내드는 이승만의 협상술에 끌려들어 녹초가 될 지경인데
드디어 숨통이 뚫리는가 싶어진다. 

“미국 상원의 비준 말인데...” 미국 정가를 꿰고있는 이승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7월말 회기안엔 시간상 비준이 불가능하다는 아이젠하워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 회기 안엔 조약을 반드시 비준하겠다는 아이젠하워 방침도 문서가 필요하오.

정치회담 기간 90일도 매우 짧은 시간이요. 우리의 통일노력에 유엔군이나 미군의 참여가
어렵다고 한다면 우리 국군 증강에 정신적-물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이 문서약속을
그 기간에 지킬 수 있겠소? 분명한 보장을 대통령의 결재로 갖다 주기 바라오.“

★ 같은 날 아침, 클라크 일행이 경무대를 방문하고 나왔다.
세종로 일대부터 클라크가 지나가는 연도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사나운 구호를 무섭게 외치고 있었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한미방위조약 빨리 체결하라” “단독북진 남북통일”
목발을 짚은 상이용사부대는 목발을 흔들며 소리 지르고 성조기를 흔들며 만세도 불렀다.

판문점에서는 유엔군측이 휴전협정 조인 준비태세로 본희의를 재개하여 30분쯤 회동했다. 

언론에선 ‘유엔사령부가 한국정부에 ’곧 조인하겠다‘는 정식 통고를 했다고 보도하였으며
백악관이 ’최후통첩‘을 보냈다는 설에 대하여 로버트슨이 부정하였다는 기사도 나왔다.
 이튿날 이승만 대통령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로버트슨이 기자들에게 밝혔다. 
“우리는 금명간 공동성명을 발표할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공동성명 발표 "한미방위협정 체결에 합의를 보았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동성명이 12일 아침10시 발표 되었다.

“지난 2주일간 우리는 여러번 만나서 솔직하고도 간곡한 의견교환을 하여 나아가는 사이에
현재 한미 양국간에 존재하고 있는 깊은 우의를 특히 강조하였으며 정전절차, 포로교환 및
장차개회될 정치회담 등에 관하여 일어난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상호이해에 도달하는데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그동안 회담을 통하여 우리는 3년간 공산침략이 시작된 이래
우리 양국 관계의 특징으로 되어왔던 밀접한 협조를 공동목표를 위하여
정전후에도 계속하여 더욱 강화하겟다는 우리의 결의를 공고히 하였다.

포로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는 여하한 포로도 강압을 받아서는 안되며 일정 기한이 경과한 후에는 공산치하로의 송환을 불원하는 모든 포로들을 남한에서 석방하고 반공중국인 포로에 있어서는
그들 자신이 택하는 목적지로 가게 해야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재강조하였다.

우리 양국정부는 공동방위협정 체결에 관하여 합의를 보았으며
동 협정 체결을 위한 교섭을 현재 진행중에 있다.

우리는 또한 정치 경제 및 방위 등 세 문제에 관하여 상호협조할 것을 상의하였으며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우리들 사이에 합의를 보고있는 점이 많음이 밝혀졌다.

특이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조속한 시일내에 우리들의 공동목표 즉 자유롭고 독립한 통일한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같이 노력하여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들은 그동안 회담을 순조로이 진행케 한 상호합치의 정신과 그 결과 생긴 광범한 합의에
뒤이어 서로 위해주는 마음과 서로 편의를 보아주는 정신이 계속되어 그 결과 안전하고 또 영속적인 평화라는 우리들의 광대한 목표가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조선일보 1953년 7월14일자)

한미 관계자들은 다음 세 가지를 경무대에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설하였다.

(1) 미국은 정치회담기간을 90일로 하자는 이대통령의 요구를 수락하였고, 만일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전투 재개문제는 한국과 미국이 그때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할 것.

(2)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성립후 양국간에 최단시일내 체결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

(3) 미국은 한국이 석방한 2만7천명 반공포로를 묵인하는 대신에 한국은 현재 억류중인  

   8천5백명의 포로는 석방하지 않고 휴전협정에 의하여 처리하는데 공동보조를 취한다.


“휴전을 반대하지만 방해하지는 않겠다. 딱 3개월 동안만!”

이승만 성명 “통일 목표 불변...방법 변경 있을지 모르나 목적 변경은 있을 수 없다”

[서울13일발 INS=합동] 13일 대한민국 공보처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다수의 신문기자들과 해외 친구들이 우리회담에서 나온 결론의 성질에 관한 각종질문을 나에게 보내고 있다. 모든 우리의 친구들이 한국국민과 한국정부의 입장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러한 관심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는 현시점에서 발표할 수 있는 것들만 명백히 한 것이다. 앞으로 연구를 요하는 문제가 약간 있다. 이것이 최후적으로 결정될 때까지 우리는 공동성명에 만족해야 된다. 

친구들은 내가 지금까지 전한국의 재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또 공산침략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지켜온 입장을 오늘날에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방법의 변경은 있을지 모르나 목적의 변경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7월 15일자)

이승만 대통령은 또한 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휴전을 수락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3개월간은 휴전에 방해를 하지 않기로 동의하였다.

미국은 3개월내로 한국을 통일하고 중공군을 철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로버트슨은 이승만 대통령이 ‘90일동안만 한국이 휴전을 반대하지 않겠다는데에 미국이 동의했다“고 언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수영비행장에서 로버트슨이 논평을 거부하였으나 한국인 부관에게 “미국을 곤경에 몰아넣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약속이 있었는데...”라고 입을 다물었다.

미국의 회답을 재촉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자회견.ⓒ조선DB
▲ 미국의 회답을 재촉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자회견.ⓒ조선DB



“한국을 대등한 국가로 대접하라” 덜레스에 조약문 작성 지침 강조

한미방위조약을 맺는 정지작업은 대충 끝났다.
미국을 붙잡고 일방적 휴전을 막기 위해 내걸었던 ‘중공군 사전철수’를 양보한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의 ‘한미방위조약’ 조속 비준 약속을 문서로 받아냈다.
대신 미국은 ‘단독북진’을 외치던 이승만으로부터 ‘휴전은 반대하지만 방해하진 않겠다“는
간접적 휴전 준수 약속을 천신만고 협상끝에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한미양국은 오랜 진통을 통해 ’안보동맹‘으로서 새 출발 준비에 들어서게 된다.

그래도 미식쩍은 이승만은 24일 담화를 발표하고 미국에 대하여 채찍을 휘두른다.

첫째, 한국이 양보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미국이 약속한 양보는 공식화된 것이 없다.
한미방위조약도 한국은 초안을 보냈는데 왜 아직 회답이 없느냐. 둘째, 정치회담 기한문제도
명확한 답변을 빨리 보내라. 셋째, 반공포로의 외국 송환은 절대로 안되며. 중립국 군대의 한국
상륙은 불허한다. “막연한 구두보장만으로 믿을 수 없다”고 백악관을 재촉하였다.
“미국을 믿고 중대한 양보까지 하였는데 미국은 판문점에서 공산측에게 또 양보를 할 모양이니
우리 회담은 무효란 말이냐. 나는 가만히 입을 닫치고 있지 않겠다”고 노골적인 엄포를 놓으며
휴전조인을 서두르는 미국에게 더 이상 양보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로버트슨에게 보낸 한국의 ‘조약 안’을 보며 미국의 조약안을 만들고 있을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이승만은 25일, 26일 연이틀 친서를 보내 ‘조약에 꼭 들어가야 할 항목’을 강조했다.

한미방위조약이 필리핀이나 호주 수준이 되어서는 너무나 불충분하다는 것,
왜냐하면 이 조약은 공산군만이 아니라 일본의 재침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
일본 제국주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미국이 천황제를 존속시켜 줌으로써“
침략팽창주의는 언제라도 되살아 나게 생겼으며 한국의 국가적 생존(National survival)은 여전히 보장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공산군이나 일본군의 공격시 미국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군사적 대응을 해야만 “우리는 살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다짐을 두었다.

이와 함께 이승만은 미국내 친일세력이 막강하므로 조약 체결이 지연될까 우려한다면서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더 이상 ‘하찮은 존재(cipher)’가 아니오,
각국과 동등한(equal) 자격을 가진 협력국 내지는 동맹국가로서의 대접을 마땅히 받아야한다”는 입장도 재확인 시켰다. 이것은 로버트슨에게 날마다 강조하였던 것으로 덜레스에게 대등한 입장에서 ‘대등한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 겸 경고이다.

<계속>

---------------
<고침: 아이젠하워는 프린스턴대학 총장이 아니라 컬럼비아 대학 총장을 지냈음>


출처. 뉴데일리 인보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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