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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⑭ 원조자금과 경제자립의 투쟁
작성일 : 2017/12/04 12:48 / 조회 : 11 / 추천 : 1


"내년 1월1일까지 통일 시켜라" 미국에 강펀치 [새연재: 한미동맹]

이승만이 `경제 바보`? 장면 정권도 `이승만 업적` 유엔에 제출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승만 정부가 만든 것이었다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⑭ 원조자금과 경제자립의 투쟁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포럼 대표

‘산업 부흥 5개년 계획’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를 기억하는 세대도 거의 사라졌다.

박정희 시대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귀가 아프게 들었지만 ‘산업부흥5개년’은 멀어서 생소하다.

우선 ‘부흥’이란 말이 그렇잖은가. 부흥(復興)은 ‘다시 일으켜 번창시킨다’는 말이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한 이승만이 나라경제를 다시 일으키려 만든 경제재건
플랜이 바로 ‘산업부흥5개년계획’이다. 동시에 ‘물동(物動) 5개년계획“도 함께 만들었다.

‘물동’은 요즘말로 ‘물류(物流)’-생산과 수요공급, 싱생국의 경제산업 종합계획인 셈이다.

유엔의 남북한 총선을 거부하여 분단을 고착시킨 소련은 남한에 제공하던 전력도 끊어버렸다.
철광 석탄을 비롯한 주요 지하자원과 공업지대를 소련에 빼앗긴 이승만이 산업 에너지조차
사라진 남한에서 빈약한 경공업만 가지고 “국산품을 애용하자” 소리치며 ‘산업부흥 5개년계획’을 발동한지 2년째, 소련은 6.25남침으로 그마저 송두리째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남한의 국민총생산은 4,818억, 전쟁피해는 4,105억, 그야말로 황무지만 남은 형편이다.

“다시 시작하자. 산업부흥계획을 국가재건 프로젝트로 전면 다시 짜라”

아이젠하워가 경제 특사 타스카를 보낸다고 했을 때 이승만은 정부에 명령하였다.

‘통일없는 휴전 결사반대’를 부르짖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아이크는 경제원조 당근으로
2억달러를 우선 주겠다고 손을 내민 것, 이때가 반공포로석방 2개월전의 일이다.
 `벼랑끝 투쟁`의 우여곡절 끝에 휴전이 성립되고 한미방위조약까지 조인되었으니
이제야말로 미국이 달러 주겠다고 할 때 그 돈으로 폐허복구에 전력투구할 때다.

3년전 출발했던 ‘산업부흥5개년계획“은 이리하여 ’전후재건 부흥계획‘으로 전면수정,
소요자금 10억달러 짜리 600페이지의 영문 프로젝트를 미국 특사 앞에 내놓았다.

이승만 정부의 산헙부흥5개년계획`에 따른 `물동 5개년 계획`의 2차년도 입안내용을 보도한 기사. 6.25 두달전 4.19일자.ⓒ조선DB
▲ 이승만 정부의 산헙부흥5개년계획`에 따른 `물동 5개년 계획`의 2차년도 입안내용을 보도한 기사. 6.25 두달전 4.19일자.ⓒ조선DB



이승만, ‘산업부흥개년계획’ 업그레이드...원조금 사용 원칙 결정

[조선일보 보도] 8월 14일 상오9시부터 경무대 관저에서 이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미국의 2억불 경제원조에 관하여 기획처에서 입안한 ‘원조수입 사용방도’의 세목을 상정하고
토의하는 한편, 공무원 대우개선을 위한 대폭적인 감원문제 등도 동시에 논의하였다.

백두진 국무총리는 기자회견에서 2억불 원조에 대한 수입용도 세목은 15일 각의에서 의결을 거쳐 한미합동경경제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기획처 당국자가 14일 언명한 바에 의하면 지난 10일이후 연일 각부처간 토의를 통하여
6억5천만불에 달하는 각부처의 요구액을 2억불로 감축 재조정하엿고, ‘물동 계획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금배정 원칙을 정하였다고 밝혔다.

(1) 도입될 물자는 건설자재 60%, 원자재 30% 소비자재 10%의 비율로 책정하고

(2) 도입물자의 배정은 지난 번 공표된 대통령 유시에 따라 비료공장 건설(2천만불)을 비롯,
시멘트 공장 건설, 전력개발 및 복구, 탄광개발, 항만시설 확장, 교통(철도-선박)기관 복구,
통신시설의 보수 등의 순위로 책정한다..

한편 재무부 고위층도 “한미합동경제위 미국측 위원들도 속속 입경중에 있으므로
수일내 한국정부안을 중심으로 본격적 협의로써 결말을 낼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미국의 10억달러 대한경제원조자금 사용을 위한 `특별법` 제정방침을 밝힌 이승만 대통령. ⓒ조선DB
▲ 미국의 10억달러 대한경제원조자금 사용을 위한 `특별법` 제정방침을 밝힌 이승만 대통령. ⓒ조선DB



▶ 원조사용 특별법 제정, 범법자는 사형...장관 2명 파면조치

당시 환율로 한국의 일년 예산을 넘는 2억달러 원조와 도합 10억 달러에 달할 미국 원조금 사용을 앞두고 이대통령은 국가 재건을 위해 국민분위기를 일신시키려는 조치를 연달아 내놓았다.

우선 ‘특별법’을 제정한 것과, 생계형 부정부패가 번지는 공무원 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다.

★ 이대통령은 3일 미국의 10억불 대한경제원에 있어 이를 국가민족의 번영과 복리를 가져오도록 유효적절히 사용해야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법’을 속히 제정해서
대통령 권한에 맡겨 극소액이라도 함부로 사용치 못하도록 해야될 것이라는 요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9월5일자]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이 한국원조 정책으로 특별대표 타스카씨의 계획을 통하여 
3~4년 플랜으로 10억불을 미국회에 제출, 명년 정월에 미국회가 개회할 때에 통과할 수 있도록 마련하고, 우선 그안에서 대통령의 특청으로 국회에 요청해서 2억불을 우리가 사용케 되었으므로 미대통령과 미국민들에게 깊이 감사한다....(중략).

우려되는 것은 첫째로 이 재정을 가지고 경제기본을 확립해서 생산을 증진하고 자족자급하는
나라의 만년복리 토대를 삼아야 할 것인데 성공이 못되는 날에는 우리가 우방에 대하여
할말이 없을 것이니 사리와 사욕에 이끌려 협잡이나 사기 등 폐단이 생기면 결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특별법을 정해서 대통령의 권한에 맡겨 원조금은 극소액 한푼이라도
남용하면 사형에 처하는 조건까지 만들어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고 동포를 아끼는 마음으로
위법행위는 발각되는대로 중벌에 처하도록 힐것이며 이런 각오하에 각개인이 노력할 것은, 

1. 한푼이라도 내게 돌아올 것을 희생해서 우리 동포전체를 위해 쓰자는 결심,

2. 우리가 얼마동안 굶고 다소 배가 고플지라도 참고 지내서 국가공업 생산기관을 확장해서
   공동이익을 성취해야 할 것.

3. 모든 물품을 생산할 큰 공장과 큰 기계를 놓아서 3천만 민족이 충분히 소용될만한 것을 만들어     낼 것인데 아직 우리나라에 상당한 재정가도 없으니 부득이 정부에서 해 갈 수 밖에 없으며,
   때가 오면 모두 다 민유(民有)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4. 큰 공장과 기계시설을 하루 바삐 설비해서 각종 수공업을 다 기계로 할줄 알아야 하는데
   손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수공업품으로 돈을 많이 받을 것이오, 북한을 제외한 큰 수요는
   기계로 만들어내서 대량 산출해야 국내는 물론 해외에 내어서 돈을 만들어야 이 나라가
   경향에서 생활정도를 개량하여 발전할 것이다....(후략)“

공직사회 기강해이를 엄단하기 위하여 내무-농림 두 장관을 파면하였다.ⓒ조선DB
▲ 공직사회 기강해이를 엄단하기 위하여 내무-농림 두 장관을 파면하였다.ⓒ조선DB



★ 내무- 농림 두 장관을 파면...기강 해이 엄중처단

이대통령은 7일 하오2시반, 진 내무부장관, 신 농립부장관 및 권 내무부지방국장을 즉시 파면하고 새 장관이 임명될 때까지 현차관들을 임시장관서리로 시무케 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조선일보 9월9일자]

“정부 관리가 민간에 나가서 재산이나 물자를 토색하는 것은 옛부터 다스리는 것이요,
더욱이 대한민국은 이를 엄금하는 법률을 집행해가는 중인데 근래에 어찌 정력(政令)이
해이해져서 지방에서 토색하는 것이 50~60 종류에 이른다니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이것은 첫째 경찰이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경찰중에 참가된 자도 있다는 보고가 있으니
법대로 다스릴 것이어니와, 종당 책임은 내무장관이 지지 않을 수 없으며,
농림부 장관으로서는 지방에 이런 폐단이 있는 것을 알 지경이면 국무회의에서 막을 방법을
제출해서 충분한 교정을 있게 하는 것이 국무원의 중대한 책임일진대, 사사로운 관계로 인연해서 오히려 정부가 잘못하는 것으로 신문상에 공포, 국가위신을 손실케 한 것은 또한 방임할 수 없는 것이므로 내무장관과 함께 농립부장관을 파면시키고, 또한 내무부 지방국장은 제가 처리할 책임은 행치 않고 보고만 하고 있다면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는 것이 자기 죄를 자복하는 것이니
즉시 파면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자는 다시 정부에 없이 하도록 할 것이다.“

▶ ‘수입대체 공업화’=“수출로 부국 만들자"...일본 경제에 예속화 경고

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 정부의 ‘부흥계획’은 원조자금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6.25전해 1949년 최초의 ‘산업부흥5개년계획’ ‘물동5개년계획’ 말고도 51년, 54년, 56년 등
잇달아 경제계획을 수정-증설하였으며, ‘농업증산 5개년계획’ ‘석탄증산5개년계획’등
부처별로 마련한 업종별, 제품별 부흥계획들도 추진해나갔다.
우선 공장시설 복구에 집중하면서 재원마련을 위해 중석이나 쌀 등 1차산품 수출에도 노력하였다. 53년도에 이승만은 “올해는 풍작이니 인기 좋은 쌀을 1백만석 정도 수출하자”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공산품 생산도 제대로 안되는 그때 ‘수출주도형 공업화’는 상상도 못하였고 

‘수입대체 공업화’에 목표를 두고 이승만은 연거푸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이대통령은 9일 한국 경제자립책에 관하여 “한국은 지금까지 농업으로써 경제의 근본을 

삼아왔왔으나 앞으로는 공업을 발전시켜 경제의 자존자급을 기하도록 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9월11일자 보도]

“한국은 자래(自來)로 농업에 힘써서 인민 8할이 농민으로 ‘농자는 천하의 대본’이라 하였으나

근대에 이르러 세계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토지와 재원은 증가되지 못하여 땅 파서 양식만드는 것이 가장 인력이 많이 들므로 농민생활이 더 힘드는 것이오.
영국과 일본 같은 나라는 섬 속에서 저의 소산만으로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어려우므로
공업을 발전시켜 해외 각국에 널리 수출시키므로, 각국에서 재정과 재물을 모두 사들여다가
편히 먹고 쓰고 도시의 누각이 굉장하며 세계 상권을 얻기 위해서는 전쟁도 해온 것이다.
이리하여 근대 공업과 상업이 전에 없는 발전을 이루어 동양에 와서 경제를 말리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중략).....미국은 일본을 동양의 생산국가로 만들어서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 만들기를 협의하여 각방면으로 일본의 공업 상업을 부흥시켜 노력하고 있는 중이며
일인들은 한인을 고립시키려고 미국에서 오는 원조금을 친일 미국인과 협동하여 일본이 생산한 소모품을 한국이 원조금으로 사들여 이것으로 구급책을 삼게 하며, 일본은 생산국가가 되어서
물건을 만들어 팔기만 하니 재력이 급증하고 한국은 남이 만든 물건을 사서쓰기만 하게되니 
이러다가 경제적 노예가 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 기회를 이용해서 공업의 기초를 세우지 못하면 장래 우리생활이 망할 것이니

 우리 손으로 물건을 만들어 수입물품과 경쟁해야 할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실로 오늘날 천하지대본이 되는 것이다.
 

이전에 손으로 만들던 것은 다 집어내버리고 모두 기계로 생산하도록 하여

대량생산으로 하면 값싸게 만들 수 있으며 남의 나라와 경쟁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야

우리도 우리 뒤에 오는 자손들도 살게 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 재정가들이 자기들만 생각하여 소규모로 이기주의나 하려는 그런 생각은
포기해야 할 것이며, 우리 공업건설 시기에 업자들이 각각 기계를 사들여다가 각방면에서
공업발전 시켜야 될 것인데, 민간에서 이리 될 때까지 기다리면 어느 세월에 할지 모르므로

각종 공업을 정부에서 주장해서 충분히 진행되어 이익이 발생하기 시작할 때에는 재정가들이
이를 사서 운영하게 될 것이므로, 그때까지 우선 정부에서 주관할 수 밖에 없고,
우선은 사회주의를 행한다는 비평이 날지 모르지만 무슨 방법으로든지 민간에 맡기게 될 것이다.

자본을 반이상이라도 내놓는 사람들에게 정부에서 돈을 융자해서 시작하여 융자금을 갚는대로
민간사업으로 바꿔서 불공평이라든지 사정에 얽힌 일이나 폐단이 없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공업가들은 극히 성실하고 결백한 것을 숭상하여 외국이 얄팍하게 눈가림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우리는 완벽하게 만들어내어 한국 물품이 세상의 명예를 얻도록 합시다.

국산물품이 처음엔 미비하고 비쌀지라도 전국민이 국산품을 사서 자족자급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으로. 우리 민족이 합심합력만 되면 하등 무서울 것이 없으니 이를 전국적으로 선전 실행하도록 부탁하는 바이다.“


▶ 평생 일관된 자유시장 경제론...구한말에 이미 실습 끝낸 `경제인`

이 담화 내용은 구한말부터 청년 이승만의 주장하던 ‘자립경제 세계통상 부국론’이다.
지금부터 113년전 1904년에 한성감옥에서 29세 종신죄수 이승만이 몰래몰래 쓴 옥중저서
[독립전신]에 자세히 설명한 내용을 길지만 몇줄로 줄여서 보자.

제52장 <독립정신 실천 6대강령>의 첫째가 바로 ‘우리는 세계에 개방 교류해야한다’이다.

“....2. 통상(通商)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은 이웃을 통해 얻을수 있다. 이웃이 많을수록 물품들이 좋아지고 또한 내가 만든 물품들도
이웃들이 상용하게 되어 정보와 지식도 많이 얻을 수 있게 된다. 다른 나라들과 교류함으로써 고립되지 않으며 증기선, 열차, 전보, 우편 등 각종 새기술이 발명된 것이다.....(중략)

3.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부강한 나라들이 곡식이나 물품생산만으로 부강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영국은 조그만 섬나라이지만 백성들이 일찍이 산업화에 눈을 떠서 각종 물건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수출하였다....주요시장은 영국 차지가 되었으므로 부강하게 된 것이다. 전에는 영토를 빼앗으려 전쟁을 하였지만 지금은 상권(商權)을 차지하려고 전쟁한다.

우리나라도 상업에 종사하지 않고 농업만으로 부자가 될 수 없다......좋은 토지를 개간하여 곡물을 많이 생산하고 사방에 좋은 항구도 많고 천연자원도 많으니 동방의 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 좋은 물품들을 많이 만들어 세계와 교류하며 상업을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반세기가 지났어도 자유시장경제 무역론을 똑 같은 말로 되풀이 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창간한 ‘제국신문’에 감옥에서 몰새 써보낸 수백편의 논설에도
자본주의 자유무역에 관한 ‘개혁 개방 통상’ 주장들이 일관되게 되풀이 하였으며,
투옥 전 3개의 신문들을 제작 경영 논설을 주관하면서 “국민을 위해 대형 신문사를 세우자”고
주식회사 설립계획서까지 만들어 신문에 게재하였다.
하와이 망명시절엔 잡지를 발간하고 “하와이 8도를 조선8도처럼 만들어보자”며
한국교회와 한국학교를 세워 남녀공학을 처음 실시하여 `기독교 공화국` 실험도 해보았다.

한국인 동지촌(同志村)을 개간 설립하여 생산공장 운영과 판매까지 동분서주했던 이승만은

언론경영인,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누가 그를 ‘경제 문외한’이라 하였던가?
`이숭만 죽이기`로 일관한 공산당과 국내 야당, 그리고 "말 안듣는 이승만`이 미운 미국이다.

맨왼쪽에 서 있는 종신죄수 20대청년 이승만, 이때 한성감옥에서 자유민주-시장경제-통상 부국론을 주장한 책 [독립정신]을 몰래 집필하였다. 옆에 사람들은 옥중에서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시킨 개화파 지식인들이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그리고 아버지대신 복역했던 소년.
▲ 맨왼쪽에 서 있는 종신죄수 20대청년 이승만, 이때 한성감옥에서 자유민주-시장경제-통상 부국론을 주장한 책 [독립정신]을 몰래 집필하였다. 옆에 사람들은 옥중에서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시킨 개화파 지식인들이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그리고 아버지대신 복역했던 소년.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여학생 기숙사를 짓기위해 교포유지들과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일곱번째 갈퀴를 들고있는 이승만 교장. (1916년 12뤌25일)
▲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여학생 기숙사를 짓기위해 교포유지들과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일곱번째 갈퀴를 들고있는 이승만 교장. (1916년 12뤌25일)



★ “달러 주는 대로 미국물건 사다 써라”?...미국과 경제 전쟁

미국의 원조정책이 이랬다. 달러를 현금으로 주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서 남아도는 농산물, 잉여농산물이라 했다. 옥수수, 밀가루를 실어다놓으면
그것을 팔아 현금을 만들어야했던 이승만, 그 돈도 뜻대로 쓸 수 없었던 그 시절이다.

1952년 5월에 구성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Combined Economic Board)를 통하여 

원조와 달러에 관한 모든 사항을 협의, 아니 합의를 얻어내야만 하였다.
원조 감독자의 달러 파워!

한국이 물자구입 비율 ‘시설재 7 소비재 3’을 주장한 반면, 미국은 ‘소비재 7 시설재 3’을 고수,
막강한 ‘갑의 명령’과 가난한 ‘을의 자존심’ 이승만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원조의 목적이 무엇이냐? 한국이 하루빨리 자립해야 원조정책이 성공하는 것 아니냐?”

원조자금이 많을 때 생산공장을 지어 자립기반을 닦으려는 ‘수입대체 공업화’ 정책이다.

가장 시급한 것이 비료, 원조자금 2억달러중 1억달러를 비료수입에 써야할 형편이었다.

“굶주림부터 해결하라. 비료가 필요하면 미국비료나 일본 비료 사다 써라.”

미국은 미국 비료를 현물로 가져다 국내 농민에게 판매하고 그 대금은 미국이 도로 가져갔다.

“주는 대로 받아먹을 것이지 생산공장은 무슨...” 이러는 미국과 벌인 ‘달러 전쟁’은 

대한민국의 ‘경제주권 전쟁’으로서 ‘휴전반대 통일전쟁’과 함께 이승만의 양면투쟁이었다.

그를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이때부터 7년간에 걸쳐 그의 공업화 집념은
충주 비료공장, 문경 시멘트공장, 인천 유리공장까지 세우고야 만다.
수력-화력 발전소도 지었고 탄광지대 태백산맥에 ‘석탄 철도’ 영암선도 개통하였다.
그뿐인가, 역사상 최초의 원자력연구소 문을 열고 대학에 원자력공학과를 연달아 신설하여
과학 영재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수출입국을 건설하고 원자력 선진국을 만든 것이다. 

이승만이 ‘경제 병신’이라고? 외세의 ‘여론 조작’에 놀아나는 역사가 부끄러울 뿐이다.

▶ `이승만 정권 12년의 업적`- 장면이 유엔에 제출한 한국경제 통계

장면 정권이 유엔총회에 제출한 `통한 각서(統韓覺書)`라는 보고서가 있다.

이승만의 건국약사를 시작으로 집권12년간의 업적을 각분야별 통계로써 보여준다.

교육분야에서 어린이취학율 96%는 제쳐놓고라도 경제분야의 발전상이 눈부시다.

곡물 생산량 11% 증가, 해산물 수출 28% 증가, 철광 전력응 14% 증가, 석탄 생산 55% 증가,

제조공업 생산지수 11% 증가, 주택 52만채 증가, 교실 1만개 증설, 철도등 교통 복구 증설 등,

휴전 2년만에 전전(戰前)슈쥰울 넘어 1959년에는 급성장기로 접어들었다고 되어있다.

이 보고서를 들여다보면, 장면 정권이 독재자로 매도한 이승만 정권의 업적을 마치 민주당 정부의 업적인양 정리 포장하여 `자랑꺼리`로 전세계 앞에 내놓은 것이라 할만하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분야를 제대로 연구한 책이 아직도 없다. `독재정권`이란 낙인으로 덮어 씌워

매장한 `자립경제 발전사`를 이제는 학계에서 본격 연구해야겠다.
당시 준공된 주요기간산업 공장에 대한 신문보도를 소개한다.

*당인리 화력발전소 준공

1956년 2월16일 당인리 화력발전소 준공.ⓒ조선DB
▲ 1956년 2월16일 당인리 화력발전소 준공.ⓒ조선DB


* 인천 판유리공장 준공

1957년 10월1일 인천 판유리공장 화입식.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관계자 외국인들과 화입봉을 잡고있다.ⓒ조선DB
▲ 1957년 10월1일 인천 판유리공장 화입식.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관계자 외국인들과 화입봉을 잡고있다.ⓒ조선DB



*원자력 시험 연구소 설립

1959년 원자력시험 연구소 착공의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 1956년 미국과 원자력 평화이용협정을 맺고 시험용 원자로를 들여왔다.
▲ 1959년 원자력시험 연구소 착공의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 1956년 미국과 원자력 평화이용협정을 맺고 시험용 원자로를 들여왔다.



* 문경 시멘트 공장 준공

문경 시멘트 공장 준공 후에 생산품을 돌아보는 이대통령.
▲ 문경 시멘트 공장 준공 후에 생산품을 돌아보는 이대통령.


1957년 9월26일 문경 시멘트 공장 준공 기사.ⓒ조선DB
▲ 1957년 9월26일 문경 시멘트 공장 준공 기사.ⓒ조선DB



* 충주 비료공장 준공

1961년 4월 충주 비료공장 준공식 사진.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착공한 이 비료공장은 규모가 커서 자금조달 차질로 공사가 늦어져 4.19 이듬해 봄에 준공, 민주당 정부 장면총리가 참석하였다. 그리고 다음달 5.16 쿠데타를 맞는다.
▲ 1961년 4월 충주 비료공장 준공식 사진.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착공한 이 비료공장은 규모가 커서 자금조달 차질로 공사가 늦어져 4.19 이듬해 봄에 준공, 민주당 정부 장면총리가 참석하였다. 그리고 다음달 5.16 쿠데타를 맞는다.


이승만의 자립정책중 가장 미국의 미움을 산  ‘2중환율제도’
 ‘수입 환율’은 낮추고 ‘수출 환율’은 높임으로써 원조물자 현금화의 최대화를 노린 것.
장관들의 외국출장비까지 “달러 아끼라”며 시어머니처럼 챙기던 이승만이
한 푼이라도 더 늘리려는 외화정책을 고집하자 경악한 미국은 불만이 부글부글 끓었다.
해마다 한미경협회의 주제는 환율 인하 요구였으나 이승만을 마이동풍이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안된다”며 55년 딱 한차례 올려주고는 4.19로 하야할 때까지 초지일관 환율을 고수함으로써 국가재건 외화벌이를 통하여 수입대체공업화 목표를 달성내 나갔다.

이승만의 환율전쟁에 얽힌 당시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집권말기 1959년에 월터 매카나기 미국대사가 부임할 때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정가에선 ‘한국을 뒤집으러 오는 놈이다. 저 친구 조심하라’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매카나기는 송인상 재무부장관과 신현확 부흥부장관에게 환율 인상부터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오래된 미국의 숙제, 환율을 올리면 미국에 큰 이익이요 한국은 큰 손해이므로 

‘대통령의 철측’을 잘 알고 지지하는 두 장관이 결론을 낼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정 그렇다면 내가 이대통령을 만나겠소.” 매카나기는 결국 경무대로 달려갔다.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승만은 소파에 앉은 채로 미국 대사를 빤히 쏘아보았다.

인사도 없고 앉으라는 말조차 없다. 엉거추줌 서있는 매카나기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사의 눈싸움이 몇 분쯤 지났을까, 이승만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I don’t need any penny of your money. Pack and go!”

한마디를 던진 이승만은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당신네 돈은 한 푼도 필요 없어. 짐 싸서 (미국에) 가버려!”란 호통만 들은 매카나기 대사.
그는 4.19 이듬해 1961년 돌아갔는데 “매카나기가 이승만을 골탕 먹였다”는 말이 떠돌았다. 
전국적인 4.19 데모의 조직화 배후에 미국대사관의 ‘선풍기’가 있었다는 것, 계엄령하에 감행된 ‘교수 데모’에 참여했던 누군가가 “이것도 미국 작품"이리는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4.19후 집권한 민주당 정부 장면 총리는 ‘환율 대폭 인상’부터 단행하였음은 물론이다.
‘부산정치파동’때 장면을 대통령 시키려던 미국으로서는 여러모로 반가웠을 터이다.

아무도 몰랐던 ‘에스컬레이션 클로즈’

★이승만의 줄기찬 ‘공장 건설’ 성화에 시달리던 미국은 결국 원조자금 대신에 

국제협력기구(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에서 차관을 제공 하였다.
한국은 외자 1,955만 달러와 내자 15억환을 합쳐 충주에 비료공장을 착공하게 되었다. 

당시 상공부 공업국장이던 신현확은 계약서를 들고 경무대로 결재를 받으러 갔다.

말없이 설명을 듣던 이승만은 신국장에게 서류를 내밀며 한마디 툭 던지는 것이었다.

“물가 변동에 따르는 에스컬레이션 클로즈(escalation clause)는 들어가 있겠지?”

신현확은 깜짝 놀랐다. 에스컬레이션 클로즈란 인플레나 외환시장 변동에 따라 추가되는 비용, 수출입물자나 공사대금, 임금 등 추가지출 사항을 양측이 미리 정해두는 조항이다.
당시에 이런 용어 자체를 알고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미국 자본주의 경험 40여년, 이 대통령의 세심한 경제감각은 꼼꼼한 간섭으로 유명하였다..

이승만의 `경제개발 3개년계획`...장면 정권 패스...박정희가 꽃피우다

 1959년 3월 어느날 밤, 원조자금 회의를 하던 신현확은 경무대의 호출을 받는다.

집무실에 혼자 앉아있던 이승만이 숨차게 달려온 신현확에게 밤중 홍두깨를 내민다.

"당신 부흥부 장관해야 돼. 나 방금 결정했어. 싫으면 이 방서 나가시오"

만 39세의 최연소 부흥부장관, 무상원조시대가 차관시대로 바뀌는 시점이다.

차관시절 심혈을 기울인 `산업개발위원회`를 중심으로 경제개발3개년계획을 만들었다.

발전기에 들어선 경제를 1960~1962년에 완전자립시키자는 목표는 60년 4월 15일에
국무회의에서 확정된다.
그리고 4일후 4.19 유혈사태...갓태어난 3개년계획은 서랍속에 들어가서
장면 정권 열달동안 잠자다가 5.16후 박정희 손에서 재탄생한다.

그 이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원형이 다름 아닌 이승만 정부가 만든 아이!!.

아들 신철식이 지은 아버지 `신현확의 증언` 책표지. 메디치미디어 발행, 2017.9.20
▲ 아들 신철식이 지은 아버지 `신현확의 증언` 책표지. 메디치미디어 발행, 2017.9.20


이승만이 물었다. “구두가 뭐야?”

★ 이승만을 헐뜯는 왜곡 에피소드는 또 있다.
당시 언론까지 ‘이승만은 구두가 뭔지도 모르는 딴 세상 사람’이라는 험담이 그것이었다.
가죽 가공업체 ‘대전피혁’사건 때였다. 군화를 만들어 남품하는 대전피혁은 미국 때문에
망할지경에 몰렸다. 미국이 갑자기 2차대전 때 남은 군화를 원조물자로 대량 들여오는 바람에 대전피혁 제품은 납품과 판로가 막혀버렸다.

부흥부 장관 신현확은 경무대를 방문, 대전 피혁의 회생책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대전피혁? 그게 뭐 하는 공장인데?”

“군대용 구두를 만들고 있습니다.”

“구두가 뭔데?”

“발에 신는 구두 말입니다.“

“그 구두가 뭐냐고?”

신 장관은 당황하였다. 대통령이 구두가 뭔지도 모르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양화(洋靴) 말입니다. 소가죽 신...”

“으응...양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이 된 이승만은 옆에 있는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앉으라는
시늉을 하였고, 신현확은 조심스레 대통령 옆에 앉았다.

“구두라는 것은 일본 말이야.”
싱긋이 웃는 이승만과 눈이 마주친 신 장관은 뜨끔하였다.

아...그래서 그랬구나. 몰라서 캐물은 게 아니라 일본 말임을 환기 시키려는 대통령의 뜻!

구두가 일본말 구쓰(靴)에서 나온 말임을 일제 경성제국대학 출신 신현확이 모를리 없다.

식민지배 40년(을사늑약이후) 동안 한국인 머리에 박힌 일본잔재를 장관 머릿속에서부터
씻어내려는 대통령의 깊은 뜻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신철식 지음 ‘신현확의 증언’)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여 억류된 일본어부들을 한국해군이 심문하고 있다.(자료사진)
▲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여 억류된 일본어부들을 한국해군이 심문하고 있다.(자료사진)


‘구보다 망언’에 한일회담 파탄...`평화선`이 지렛대 역할

두고두고 유명해진 한-일 갈등의 불씨 ‘구보다 망언’이 이때 터져 나왔다.

한국 휴전을 앞두고 무기연기 되었던 한일회담이 일본측 요청으로 재개된 것은 10월6일,
도쿄 일본 외무성 419호실에서 재산 청구권위원회가 열흘째 회의를 맞은 15일에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니치로(久保田貫一郞) 외무성 참사가 황당한 발언을 쏟아낸 것이었다.

요약하면 “미-일 강화조약 발효(1952.4.18) 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위반이다.
한국의 전재산 85%는 일본이 만든 일본소유이며 한국점령기간 일본은 한국민들의 복지를 위하여 많은 기여를 했다”는 등 사무라이 돌격대의 가미가제(神風)식 ‘폭탄 망언’이었다.

수석대표 김용식 주일공사 등 한국대표단은 경악과 충격에 싸여 밤새도록 대책을 논의한 결과 

“이대로 회담을 계속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그런 고약한 놈들과 마주앉아 대화할 필요 없다” 대통령은 즉각 철수령을 내렸다.

속개된 회의에서 구보다의 궤변 5개항목을 따지고 “전면 취소 사과하라”며 한국측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구보다는 팔을 붙잡고 “정말 그만두려느냐? 차라도 한잔...” 하며 만류하려 했다.
.

후폭풍은 사나웠다. 한국국회는 일본 규탄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반일데모가 휩쓸었다.

이승만은 ‘평화선 수비대’를 결성하고 해무청(海務廳)을 발족, 어족자원 보호법을 만들어
침범하는 일본 어선들을 불법어로 명목으로 가차 없이 나포하는 둥 영해확보 작전을 강화하였다.

일본 정부도 주일대표부 폐쇄, 불법입국 한국인 제포, 재일한국인 차별화를 강화하였다.

전쟁중인 1952년 2월 15일 처음 열린 한일회담은 시작부터 청구권 문제로 결렬을 거듭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이 종용하는 `한일관계 정상화`란 안중에도 없었다.
미국의 일본 편애를 규탄하며 미-일 재결합을 막느라 경레론만 펴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이 패전국 일본과 협상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도 전승국이니
참여해야한다”고 거듭 요구하였다.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권은 물론 발언권 강화가 급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미국이 선전포고 했을 때 이승만도 임정의 김구를 시켜
 대한민국 이름으로 일본 천황에게 선전포고를 해놓았기 때문에 `전승국` 자격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은 ;승인받지 못한 임시정부`를 이유로 한국 참가를 거부하였다.

이승만은 일본과 회담하면서 전쟁배상권이나 청구권 액수를 한번도 제시한 일은 없다.

“애국 선열들의 귀중한 피값을 액수로 계산할 수 없다”는 민족 자존심도 있거니와

협상기술상 그런 요구는 패착으로 보았다. 회담 대표단에게 협상기술을 코치하는 이승만은
청구권 액수를 입밖에 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얼마를 주겠다는 말은 먼저 일본놈들 입에서 나오게 해야지,
우리쪽에서 얼마를 달라는 말은 입이 쪼개지는 한이 있어도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

이승만이 내심 계산한 청구권 액수는 당시 화폐가치로 80억 달러선이었다고 한다.



평화선 선포! "독도를 넣어라" 바다의 국방 만리장성 쌓다

사실 한-일 회담에서 청구권 싸움보다 더 심각한 현실적 쟁점은 ‘평화선’이었다.

평화선의 공식명칭은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미일강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영해문제가 떠올랐다.
 “맥아더 라인이 없어지면 어찌 되느냐. 대신 우리 선을 그어놓자”는 논의가 무르익었다.
맥아더 라인은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의 극심한 불법어로 제한선으로 설정한 선,
미일조약이 발효되면 일본은 다시 독립국이 되고 맥아더 라인도 소멸한다.

1952년 1월 국무회의에 상공부가 `어로보호선`이란 대책 안을 올렸다.
독도가 빠진 것을 본 이승만이 “어업문제 만이 아니다. 독도를 넣자”고 결정했다.

1월18일, 평화선 선포의 충격파는 중국 영국 미국까지 잇따라 항의를 몰고 왔다.

경무대에 들어온 무초 대사에게 이승만이 말했다. “미국 배는 격침 안시킬 거요.”

발칵 뒤집힌 것은 일본정부, 이승만은 또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해양선을 설정한 주목적은 일본과의 평화유지에 있다.”

이래서 이 해양선은 ‘평화선’이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일본은 한사코 ‘이승만 라인’이라며
격렬한 반발을 계속하였다. 그 이유는 ‘독도 영유권’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 스스로가 1951년 두차례 발표한 정부령에서도 ‘독도는 울릉도 부속섬’으로
자인하고 있을 때다. 문제는 한국 해군이 어로중인 일본어선을 나포하기 때문이었다.
“평화선을 넘어 오면 격침도 불사한다”며 이승만은 손원일 해군제독에게 나포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각료들에게 말했다. (갈홍기 공보처장 회고)

“평화선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일본과 바다를 한두자(尺) 더 차지하겠다든지,
생선 몇 마리 더 먹고 덜 먹는 문제도 아닐세. 신라시대부터 왜구 등살에 시달리고
나중에는 임진란에다가 종내는 강도처럼 병탄까지 당하지 않았나.
지금 저놈들 망했다지만 우리보다 먼저 깨어서 또 해적질 할 것이야.
우리 착한 백성들은 낳은 대로 사는 탯덩이란 말이지. 왜놈들과 맞붙여 놓으면 경쟁이 안되잖나. 떼어놓아야 해. 세월이 지나면 우리 백성들도 경쟁할만 할거야.
우리 준비가 될 때까지는 금을 단단히 그어서 저 친구들이 넘보지 못하게 해놔야지.”
언제나 우리도 일본과 대등한 힘을 가진 나라가 될수 있을까, 

이승만은 “20년쯤 지나면...”이라고 중얼거렸다.


첫 한일회담 직전에 선포된 평화선은 지상의 청구권 싸움 말고 바다의 재산과 국권 다툼에서도
일본공격을 막아내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으며, 당시 공해 어로에 대한 국제규정이 애매하여
2백해리 설이 유행하던 시절, 여러나라가 한국을 모방하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53년부터 독도를 지키던 민간 수비대원들이 새겨놓은 `한국령` 글자.
▲ 1953년부터 독도를 지키던 민간 수비대원들이 새겨놓은 `한국령` 글자.


평화선 선포 2주년 1월엔 독도에 영토표지를 설치하였고 5월 민간수비대 20명을 파견,
8월엔 등대를 우뚝 세웠다. 일본의 침공설이 나돌자 무장화를 결정, 24시간 경비하였다.

나포에 견디지 못한 일본 업자들이 “무력으로 이승만 라인 부수자”는 결의까지 했던 것이다..
어업을 넘어 ‘국방선’으로 울타리 친 ‘평화 주권선’은 국토와 국민의 안녕을 지키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의 의무,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 

“독도는 일본침략 최초의 희생물이다. 몇 개의 바위덩이가 아니라 우리 겨레를 지키는 영예의 닻이다.” 어선 나포 사태에 속수무책이던 일본이 드디어 독도 영유권을 들고 나오자 당시 외무장관 변영태가 발표한 성명이다.

이때 중단된 한일회담은 1957년 집권한 기시 노부쓰케(岸信介: 현 수상 아베의 외조부)가 
“구보다 망언을 무조건 취소”하고 제4차회담을 열기까지 4년 넘게 평화선에서 해전(海戰)을 계속하였다. 전범(戰犯)에서 풀려난 기시의 출신지역은 대한해협 건너편 야마구치(山口縣),
이토 히로부미등 침략 원흉들의 고향이며 대대로 한반도 거래로 먹고 사는 어민들이 가장 많았고나포된 어민들도 가장 많았다. 평화선 선포이래 1965년 한일수교가 타결될 때까지 나포한
일본어선은 모두 232척, 억류 어부는 2천 784명에 달하였다.      

                                                                                    

★ 미국의 `일본 키우기`에 브레이크...요시다와 설전

6.25전쟁중 맥아더가 일본 지원병을 거론했을 때 “총뿌리를 돌려 왜군부터 쏘아버리겠다”며
펄펄 뛰던 이승만, 강경일변도의 반일사상을 누그러트려 한일관계를 재조정 해보려는 맥아더는 이승만과의 우정에 기대를 걸고 손을 썼다.
건국직후 1948년 가을과 50년 2월 두차례나 이승만을 도쿄 유엔군 사령부로 초청하였다.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맞설 반공방파제의  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미국이 반공지도자 이승만과 일본 지도층을 손잡게 하려는 시도였다. 

이승만의 두 번째 방일 때 남은 ‘호랑이 대화’는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맥아더 주선으로 이승만과 마주앉은 요시다(吉田) 일본수상은 가시 돋친 말만 듣다가
질문을 던져본다. “한국에는 지금도 호랑이가 있겠지요?”
이승만이 받았다. “임진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쳐들어와서 다 잡아가고 한 마리만 남았소.”
배석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한 마리는 이승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급조된 비공식 정상회담은 이렇게 독설 대결장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지만,
바로 이것이 이승만의 방일 목적, 비공식적으로 일본 수상에게 할 말을 다 퍼부은 것이다.

세 번째 방일은 맥아더 후임 클라크 사령관의 초청이었다.

1953년 1월5일 이승만은 손원일과 백선엽등 군수뇌와 함께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이번 나의 여행은 순전히 사교적인 것으로서 클라크 내외에 대한 우호적 방문이며
정치적 목적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기 바란다”는 언급을 강조하였다. 
클라크 숙소에 묵은 이승만은 요시다 일본 수상의 초청 만찬도 클라크의 만찬도 거절한다.

요시다를 포함한 일본정계 재계 인사들를 모은 클라트의 칵텔파티에서 이승만은 

한일관계의 모든것, 평화선과 어업문제등에 관하여 설명하였는데 클라크는 조마조마하였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귀국한 이승만은 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말했다.

“이게 한일관계요. 일본인들이 양국회담에 대해 연구할 자료가 많아졌을 게요.”

미국과 일본의 내막을 꿰뚫는 이승만은 무엇보다 또다시 일본편에서 일본을 소련 방패로 쓰려는 미국이 50년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 한국을 “또 팔아넘길지 모른다”는
미국 불신론과 함께, 일본의 재침 우려를 한시도 잊지않고 끊임없이 담화와 성명을 통하여
일본 경계론을 펼치곤 하였던 것이다. 이에 변영태 외무, 양유찬 대사 등이 앞장섰다.

``"평화선`
▲ "평화선 침범 일본 어선 격침을 불사" 경향신문 보도.(자료사진)



변영태 “미국은 한국 경제를 희생시키며 일본 부흥시키나” 비난

[워싱턴2일발INS=합동] 대한민국 외무장관 변영태 씨는 2일 한국을 부흥시키기 위한 미국의
원조가 자급자족적인 한국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일본의 산업을 증진시키는데 이용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한국 원조라는 미명하에 일본 경제의 증진이 기획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원조금이 한국경제를 위해 사용된다면 장래 한국에 자급자족 경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하나 “그것은 말뿐”이며 워싱턴에서는 일본을 주요 생산국으로 증진시키고 “한국 등 기타 모든 국가는 소비국이 되어야한다"는 견해가 보급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변 장관은 “만일 미국이 한국정부에게 원조금 지출에 있어서 보다 발언권을 허락해준다면 한국은 공업, 어업 및 기타 산업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일본제품 없이도 해나갈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고의적으로 한국의 자립경제가 저해되어 우리로 하여금 일본의 기성 상품을 구매케 하고 있다“고 주장한 그는 이어서 ”우리는 한국 국민의 복리에 중대한 관계를 갖는 이 문제에 있어서 충분한 발언권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여야한다“고 강조하였다.

변장관은 자기는 한국 재건을 위한 물자 중 일부는 일본 것을 구매해야한다는 점도 이해하고는
있으나 “한국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일본을 부흥시키는 데는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이 미국의 원조금을 독점하고 한국을 뒤로 밀어내려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변장관은 “그렇다”고 답하고 한국은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여왔으나 일본의 역사적인 확장주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한국 국민의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의혹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혹은 일본의 태도변경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바,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러한 실례를 전혀 보지 못하였을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국국민의 공산주의자와의 투쟁의 배후에서 한국을 ‘위협’하여 왔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끝으로 변장관은 그 실증의 하나로서 일본 어선은 한국영해에서 지금도 ‘밀렵’을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일보 9월5일자)



▶ “새해 1월1일까지 통일시켜라” 이승만, 정치회담에 강펀치

휴전협정이 조인된지 3개월째, 제60조에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한다’고 얼버무려 휴전을 강행했던 그 3개월 ‘종료일’ 10월26일에서야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미국이 진땀을 흘리며 유엔과 공산권을 뛰어다닌 결과다.

이승만은 13일 이브닝 스타의 서울 특파원과 회견에서 말했다.

“만약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구체적 조치가 1954년 1월1일까지 취해지지 않는다면

나는 행동의 자유를 회복한 것으로 인정하겠다.“ 이승만은 이럴 경우 미국과 유엔 제국에게
평화적통일이 아닌 다른 통일방안을 제시하겠노라고 기자에게 재확인 해주었다.

여기서 ‘행동의 자유’란 휴전반대 투쟁에서 누누이 다짐했던 ‘단독 북진’을 말하며
 ‘다른 통일방안’이란 미국 동의를 받았다는 ‘무력 통일전쟁 재개’임을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애초부터 이승만이 보기에 이런 류의 정치회담은 통일은커녕 공산권이 휴전을 고착시키고
재무장하려는 핑계이며 열려봤자 정치선전장이 되어 허송세월로 끝날 것이 뻔히 보이는 짓이다.

미국은 그러나 이승만을 달래고 체면세우는 방안이 이것뿐이기에 서둘러 유엔 특별총회를 열어 회담 개막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서둘렀다. 왜냐하면 휴전협정엔 ‘정치회담을 연다’는 말뿐, 구성이나 절차에 관한 규정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도 참가하라’ 양보하자 소련은 ‘인도를 꼭 깨워달라’고 요구했다.

미국과 한국이 반대하자 인도는 스스로 자퇴하면서 네루는 이승만을 비난하였다.



“한국은 180일동안만 휴전을 참겠다” 변영태 외무 또 중대발언

[조선일보 보도] 변 외무장관은 24일 휴전협정조인후 180일동안만 국토의 분단상태를 참고
휴전에 순응할 것이며 그때도 통일방안이 서지 않는 경우에는 자주적 행동으로 나오겠다는
한국정부의 기정방침에는 아무런 변경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 26일로 예정되어있는 판문점 예비교섭에 언급하여 정치회담의 개최일자와 장소만을 절충하게 되는 동 회담자체는 중요한 것이 못 되나 “공산측이 대한민국 정부의 존재가 예비회담부터 무시되었다고 악선전하는 재료를 주지않기 위하여” 관계각국과 충분히 연락하였으며 한국대표도 참석시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정치회담에는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가장 많은 인원을 바치고 가장 많은 물자를 동원한 미국과 한국만이 우리 편을 대표한다는 것이 “누가 보나 의당한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판문점에서 본사특파원 최병우 발] 한국정부 대표도 옵서버로서 참석한 가운데 26일 판문점에서 막을 연 정치회의 예비회담은 예기한바와 같이 개회벽두부터 쌍방의 주장이 대립되어 정치회담
자체의 개최는커녕 그것을 마련하기 위한 예비회담의 타협조차 의문시 되며 만2년을 끌었던 휴전회담에 지지않는 파란곡절을 예상케 하였다. 즉 아측은 정치회의 개최의 시일 장소들을 협의하자고 제안한데 대하여 공산측은 구성국 문제의 토의가 이에 앞서 있어야할 것을 제안하고 나아가서 아시아 중립국의 참가까지 주장하였다. 

그런데 아측은 구성국문제의 재론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것을 재차 역설하여왔던 것이다.

휴전협정대로 한다면 지금쯤은 정치회담 자체가 진행중이어야할 것인데 협정조인후 만 90일째인 이제야 비로소 예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것이 지난하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다. (10월28일자)

정치 예비회담이 제2주로 접어들어도 원점에서 맴돌뿐 교착상태를 타개할 징조는 안보인다.조정환 외무차관은 3일 8차 예비회담에서 “세월을 허송하는 것은 자유세계가 취할바 양책이 아니다”라며 “과거 휴전회담이 2년여의 세월을 소비하였다”고 지적하고 “공산측은 아직도 무리한 구성국 문제를 되풀이, 오직 선전하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이 냉혹한 현실을 자유세계는 또 한번 주시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판문점 DMZ 선상의 건물에서 열린 정치회담 예비교섭은 2주가 지나도 제자리걸음이다. ⓒ조선DB
▲ 판문점 DMZ 선상의 건물에서 열린 정치회담 예비교섭은 2주가 지나도 제자리걸음이다. ⓒ조선DB



“회담 못열면 즉시 북진 개시“ 예비회담 교착에 경고

[서울4일발AP=본사특약] 이대통령은 4일 만일 앞으로 개최되는 정치회담에서 한국통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혹은 동회담이 개최되지 못한다면 한국전쟁을 재개하여 공산군을 북한으로부터
구축하기로 한 한국의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이대통령은 판문점에서 정치예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이 때 수주일전 AP가 제출한 질문서에 이와같이 회답하였다.

이대통령은 서면으로 된 동회답에서 “어떤 문제라도 앞으로 개최될 정치회의에서 평화리에 해결되리라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말했다. 

이대통령은 “정치회의가 실패하거나 혹은 개최되지 않는 경우 한국은 한국통일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어 “종국에 우리 전국토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사상을 북한에 부식하고 있는 중공을 북한에서 구축(驅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대통령은 동 회답에서 “우리의 결의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미국 및 유엔 제국의 지지를
환영한다. 그러나 우리 한국만을 위하여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지지를 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3년전 전쟁 시초에 생각한바와 같이 한국을 위한 전쟁은 곧 자기자진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지금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한국에서 더 이상 전쟁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겠다”로 답변함으로써 불굴의 결의를 재확인하였다.(조선일보)

<계속>


출처. 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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