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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빛과 그림자
작성일 : 2019/01/05 14:39 / 조회 : 12 / 추천 : 1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승만대통령을 보는 시각은 일반적으로 두 부류로 나뉘는데 그의 부정선거 경력과 친미 성향을 들어 막연히 나쁘게만 아는 좌파가 있는 반면 임시정부,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이자 국부이며 반공노선을 선택했다는 점을 들어 막연히 과를 감추려고만 하는 우파도 있다.

  
▲ ▲1943년 4월 8일, 아메리칸대 교정에서 임정수립 24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후 이승만 전대통령과 아메리칸대 폴 더글러스 총장이 임정수립 기념으로 ‘대한부인구제회’에서 기부한 한국산 벚나무 4그루를 심었다. ⓒ

그러나 정작 이 두 부류 이외에 그의 공과 과를 정확히 알고 그를 토대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는 시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번 기사에서는 그의 대표적 공과 과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 ▲1945년 10월 20일, 미 군정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미군 환영대회’에서 나흘전 은밀하게 귀국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에 선글라스를 쓴 이는 남한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 ⓒ 뉴데일리


이 대통령은 젊은 시절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그 주필과 사장직을 맡아 활약하였고, 독립협회 산하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이러한 개혁운동을 벌이던 끝에 1898년 11월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종9품)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중추원 의원이 된 다음 일본에 망명 중에 있던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해 강력한 내각 중심제 정부를 조직하고 고종 황제를 양위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1899년 1월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그는 옥중 생활 중에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는데,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전반부, 당시 시대상황을 이승만의 눈으로 해석한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이 책은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못했으나 대중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어 필사본으로 많은 이들이 돌려봤다고 한다. 그는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누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밀사를 보내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한다.

이듬해인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써 서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달 중순 일본의 암살자에게 저격을 받으나 미수에 그친다.

1919년 4월 그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걷게 된다.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에,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에 추대되며,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대로 추대했으며 그가 각지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에 추대되자 일제는 그의 목에 30만달러의 현상금을 건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까지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인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한다.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진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이후 임시정부 내에서 각료들과 갈등을 겪지만 40년대에 임시정부 승인 운동,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 등으로 지지기반을 얻은 그는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 김구, 3위 안재홍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같은 해 8월 15일에는 정부수립을 선언한다.

그 후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적화통일 야욕을 품은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은 다시 존망의 위기를 겪게 된다.

이 혼란을 틈타 이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확실시 하고 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헌병대를 동원하여 야당의원 50여 명을 강제 연행하는 정치파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 김성수는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사표를 제출하는 지경에 이른다.

7월 4일에는 군경(軍警)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이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출석 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사건이 바로 세간에 익히 알려진 ‘발췌 개헌’ 사건이다.

1954년 9월 8일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하기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 는 제 2차 헌법 개정안을 자유당이 제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7일,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可決定足數) 136명에서 한 명이 모자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당시 국회부의장에 재직 중이던 자유당의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했으나, 이틀 후 자유당은 이정재 감찰부 차장의 동대문 사단을 국회 방청석에 투입시켰고 사사오입(四捨五入,반올림)의 원리를 내세워 이를 번복하였다. 재적의원 203명의 2/3은 135.33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하나, 자유당의 주장은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명의 자연인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절반에 못 미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해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으며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 125명만 남은 자리에서 김두한, 민관식 의원만이 반대하여 전체 125표 중 찬성표 123표로 개헌안을 통과된 것으로 결정하고 이를 정부로 이송, 결국 개헌안을 공표하였다. 이는 훗날 ’사사오입 개헌‘ 사건으로 회자된다.

이렇게 3선 제한을 철폐하고 이후 1956년에 대한민국 3대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선후보였던 조봉암의 선전으로 저항을 받게 되자 1958년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조봉암을 간첩협의로 사형시켰다. 1958년 8월 11일 제4대 총선의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과 야당의 불만이 팽배하던 시기에서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은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고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한 채 여당인 자유당 의원들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비롯, 10개 법안 27개 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건국 이념을 자유민주주의로 내걸었지만 정작 집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확연한 독재국가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부통령 후보자의 표를 개표 조작하는 일을 벌였다. 이것이 곧 3.15 부정선거이다. 이에 대한 항의로 마산 부정선거 반대시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곧이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한 낚시꾼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고 이는 시위를 확대시킨다. 이승만 대통령은 언론을 통해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조종한 폭동이라며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국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고, 이는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시키게 된다. 이에 따라 1960년 4월 24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한 이승만은 이틀 후인 4월 26일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자진 퇴임을 선언하였다. 아래는 연설 내용 전문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 하야 성명 모습 ⓒ 블로거 캡쳐 사진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단기 4293년 4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이후 이승만은 같은 해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생전에 이승만은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비행기 표를 끊고 사과 성명까지 준비했으나, 1962년 3월 17일 박정희의 특별지시로 입국 거부를 당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 고생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초대 정부 건립에 힘쓴 사실은 틀림없는 업적이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 이후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범했던 일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에는 걸맞지 못한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는 완벽한 영웅도, 완벽한 악인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공이 있고 과가 있다.

또한 이승만의 집권 후 권력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과오들이 모두 이승만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 대통령 당선 당시 이미 73세였던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그러나 측근들은 이승만이 실권하면 자신들의 권력기반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승만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배후에서 조종했다. 

이승만의 실각 후 이승만에게 하야 권유를 받았던 최측근이자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사라지자 4월 28일, 경무대에서 가족들과 함께 자살한다. 또한 이승만은 3선 개헌을 하지 않고 물러나려 했으나 “국민들은 혈서를 쓰면서까지 각하께서 대통령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는 측근들의 허위보고를 받고 무리해서 3선 개헌을 진행했다. 

이승만은 이정재와 같은 ‘정치깡패’ 들이 있었다는 것도 임기 중에는 알지 못했고, 퇴임 후에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측근들이 이승만의 정보력을 통제해 판단이 흐려진 것이다. 물론 측근을 잘 두지 못한 것도 통수권자의 책임인 것이 확실한 사실이며 결국 이것이 이승만 본인이 세운 국가에서 그 국민들의 손에 의해 쫓겨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틀림없는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시절부터 대한민국의 독립과 국가건설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가 29세에 ‘독립정신’을 저술한 이후로 73세에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평생을 대한민국에 바친 것은 만인이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본 기사는 독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재평가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출처. 블루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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