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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승만 시대(11) 타이타닉 침몰..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학교와 교회를 세우다
작성일 : 2020/02/03 17:13 / 조회 : 97 / 추천 : 0


4. 독립을 찾는 길은 외교뿐이다



다시 미국으로 망명...타이타닉 침몰 뉴스를 듣다

배는 중간기착지인 일본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가마쿠라에서 한인 유학생들을 만난 후, 도쿄 YMCA에서도 한인 유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강연을 들은 청년들 가운데는 나중에 한국의 지도자로 활약할 이인, 송진우, 안재홍, 김병로, 최두선, 현상윤 등이 있었다. 

그리고는 1912년 4월 10일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 배에는 이승만처럼 미네아폴리스 세계 감리교 총회에 참석할 해리스 감독도 있었다. 해리스는 이승만에게 일본을 비난하지 말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일 것을 신신 당부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항해 도중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그 유명한 호화판 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북대서양에서 빙하와 부딪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캐나다의 빅토리아에서 배를 내려 미국의 시애틀을 거처 감리교 총회가 열리는 미네소타의 미니애폴리스로 갔다. 


회의는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교사였던 노블 박사와 한 방을 썼다. 

이승만에게도 연설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한국은 비록 나라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교회만은 일본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된 교회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미국인들을 비롯한 서양인 대표들은 반대했다.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이 교회만 독립된 채 남으면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총회는 지금까지 감리교 선교부가 해 온 대로 일본 정부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러므로 1912년 5월 말에 총회가 끝났을 때, 이승만에게 남은 것은 허탈감뿐이었다.  돌아갈 나라도, 직장도 없었다.


장로교 선교사로서 경신학교 교장인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가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의 교수 자리를 제안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승만은 신변만 보장된다면 귀국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렇지만 대학 설립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언더우드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후 6개월 동안 이승만은 할 일을 찾기 위해 시카고, 프린스턴, 봍티모어 등지를 다니며 친지들을 만났다. 교수 자리를 얻을 생각도 해보았다. 프린스턴 대학 은사인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윌슨의 둘째 딸 제시의 도움으로 1912년 6월 19일에 윌슨과 그의 가족들을 뉴저지 주 시거트의 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12년 11월 18일에는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도 했다. 그렇지만 그전과는 달리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일본을 공격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삼다

갈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멀리 하와이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왔다. 한성감옥 동지였던 박용만(朴容萬)이 하와이로 와서 한인 교육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네브라스카 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로 먼저 가서 <국민회보> 편집인 일을 맡고 있었다. 

이승만은 1913년 2월 3일 호놀루루에 도착했다. 도착한 즉시 그는 서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전보를 받았다. 

하와이에는 이승만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존 와드먼 박사가 그 지역 감리교 감리사로 있으면서 한인 학생들을 위한 한인기숙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한인기숙학교는 기숙사를 갖춘 6년제 남자학교였다. 영어와 한국어로 교육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지리, 한문도 가르치고 있었다. 

와드먼은 일본 영사관에서 주는 지원금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한인들의 반발을 샀다. 한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한 민족의 고유성을 유지시키고 싶어했던 것이다. 따라서 와드먼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때 이승만이 하와이에 온 것이다. 그래서 와드먼은 즉각 이승만에게 한인기숙학교 운영을 넘겼다.


이승만은 우선 교민들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하와이 군도의 여러 섬을 찾았다. 교민들은 파인애플 농장에서 저임금의 고된 노동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자녀 교육이었다. 한인들은 멀리 외롭게 떨어져 있는 농장들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들은 아예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이승만은 우선 급한 대로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한인 소녀들을 호놀룰루로 데리고 와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맡겼다. 그리고 나서는 교포들의 도움을 얻어 기숙사가 있는 ‘한인기독여학원’을 세웠다. 교민들은 이승만의 교육 활동에 대해 크게 만족해 했다.       

그러나 와드먼 박사가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직을 물러나고 프라이 박사가 그 후임으로 오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임 감리사는 미국 감리교 본부의 방침에 따라 인종통합주의 교육을 시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인,중국인, 일본인 학생들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 교육시킴으로써 보통의 미국 시민을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기 위한 한국어 교육과 한국 역사 교육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민족의식의 수련장인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

고민하던 이승만은 결단을 내렸다. 1916년 가을 그는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키기 위해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 손을 끊은 것이다. 그리고는 교민들의 도움을 얻어 기숙사를 갖춘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을 세웠다. 그것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제(共學制) 학교였다.


학교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한인기독교회(Korean Christian Church)을 세웠다. 그 교회는 1939년에 릴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에 서울의 광화문을 모방한 건물을 세웠다. 그 교회는 미국의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교회였다. 

그러나 한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감리교회에 남고자 하는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인기독교회의 설립으로 한인 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교회의 분열을 각오하면서도 미국의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초교파적인 교회를 세우려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인기독교회’가 미국의 어느 교파에 속한다는 것은 교단의 감독을 받아야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교민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한인교회 재산이 미국의 교단본부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가 어느 한 교파에 속한다는 것은 다른 교파의 한인들을 멀리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한인기독학원’은 1920년에 뜻밖의 위기를 맞았다. 하와이 지방 정부가 교육법을 바꾸어 공립학교 학력만을 인정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립학교인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은 정식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치러야만 했다. 


게다가 하와이 지방 정부는 공립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교육세까지 거두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사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학부모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세금만 더 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인들이 자녀들을 ‘한인기독학원’에 보내기를 꺼려했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한인기독학원’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이 됨으로써 유지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와이 교민들은 임시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 학교를 존속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출처 : 더 자유일보(http://www.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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