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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승만 시대(12) 안창호와 이념 갈등, 암살 당할 뻔... "태평양 주보" 발간
작성일 : 2020/02/03 17:14 / 조회 : 12 / 추천 : 0
<한국교회핍박>과 <태평양주보>

다른 한편으로 이승만은 틈틈이 시간을 내어 1913년에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수난 사건인 ‘105인 사건’을 기록한 《한국교회핍박》을 펴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한국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게 된 것은 개신교를 통해 자유주의(自由主義) 혁명사상이 일본제국 전체에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개신교는 인간의 평등과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상 숭배를 거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천황 숭배를 거부하게 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일본의 군주제, 봉건제, 군국주의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 교회는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학교를 세우고 토론의 방법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주의 방식이 관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늘어나, 미국과 통상이 시작된지 30년이 못된 1912년에, 기독교인은 25만명(또는 37만명), 예배당은 500 곳, 기독교학교는 962개에 이르렀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노름, 주색잡기, 술,담배의 금지와 같은 청교도적 윤리가 강조되고 있었다. 그것은 근면성을 키워 한국인들이 언젠가는 부강한 나라를 세우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승만의 주장에 따르면, 서양에는 동양에는 없는 혁명 사상, 즉 백성에 의한 정부 전복 사상이 있었다. 그런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은 인종 때문이 아니라 종교, 즉 기독교 때문이었다. 예수는 미천한 자로 태어나 불쌍한 자와 병든 자를 대변하던 최초의 ‘혁명 주창자’였기 때문에 신약성서를 공부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혁명사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혁명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로서 이승만은 중국의 신해혁명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그대로 놓아 두면 혁명 사상이 퍼져 나가고, 동양에 처음으로 기독교 문명에 토대를 둔 기독교 국가가 탄생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나아가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합병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생각으로 동포들을 계몽하고 국내외 소식을 알리기 위해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다. 그것은 나중에 <태평양주보>로 이어졌다.


무장투쟁론이 아닌 외교독립론에 따른 독립운동

하와이에서 그는 일부 한인들과의 갈등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다. 이승만이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한인 단체로는 대한인국민회가 있었다. 그것은 주로 강원도 출신의 박용만과 평안도 출신의 안창호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학력의 이승만이 오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의 주도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하와이는 미국 전체 한인의 4분의 3이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는 데 가장 유리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더욱더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있었다.   

갈등은 독립운동 방법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박용만은 한국의 독립은 무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무장투쟁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군사학교인 ‘대조선 국민군단 병학교’를 설립하고, 하와이의 외진 숲에 청년들을 모아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와는 달리 이승만은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을 주장했다. 한국인의 독립은 우리의 무력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멸망할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미국 정부와 미국 여론의 지지를 얻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에게 무장투쟁은 한국인들을 ‘테러리스트’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었다.  설사 한국인들이 무장을 갖추어 일본인들과 싸우게 된다 할지라도,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을 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앵글로색슨족의 두 강대국은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줄 군중시위(群衆示威)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3 ·1 운동 전부터 국내의 개신교 계통의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있었다. 그것은 평안북도 선천의 미동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선교사 알프레드 샤록스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왔을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3 · 1운동 이후에는 태평양위원회, 흥업구락부에 소속된 신흥우, 유억겸 같은 개신교계 지식인들을 통해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 한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1915년 5월에 박용만이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를 통해 이승만을 연거푸 공격한 다음부터였다.  

이승만도 <스타불레틴>과 <호놀루루 애드버타이저>같은 미국 신문을 통해 반박했다. 그 후 박용만은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으나, 어느 독립운동가의 오해를 사서 살해되는 불행을 당했다.

이승만의 충실한 후원조직인 대한인동지회


출처 :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승만은 안창호(安昌浩) 지지 세력 또는 흥사단 세력과도 갈등을 겪었다. 안창호는 주로 중국에 머물면서 미주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지지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안창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영어도 잘 못했지만, 뛰어난 웅변술과 사람을 끄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한인국민회에서 강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조직인 흥사단(興士團)을 이끌고 있었다. 

이념에 있어서 두 사람은 비슷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다. 안창호는 주로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 출신들 속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와 달리 이승만의 지지자들 가운데는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한 기호 지방 출신이 많았다. 특히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녀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념적인 차이도 있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가들을 단결시키기 위해서라면 사회주의자들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좌우합작론(左右合作論)의 성격을 띤 대공(大公)주의와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기 때문에 안창호가 하와이를 방문하면서도 이승만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오해는 두 지도자보다도 추종자들 사이에서 더 심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안창호 추종자에게 암살될 뻔한 적도 있었다.

암살을 계획했던 사람은 오진국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 방에서 박용만을 권총으로 쏘아 부상을 입힌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해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탔지만, 도중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상해에 5개월간 있었을 때 그것을 더욱 더 느꼈다. 그래서 그는 1921년 하와이로 돌아 오는 즉시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를 조직했다.  김노디, 이원순, 최백렬 같은 인물들로 이루어진 동지회는 이승만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이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동지회는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도 지부를 두었다. 이승만은 그들의 후원으로 1939년까지 한글과 영어로 된 <태평양주보>를 발간할 수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17년, 미국 대통령 윌슨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14개조 원칙을 발표했다. 그 속에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이  표명되자, 강대국들의 지배 밑에 놓여 있던 피압박 민족들은 독립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

이승만은 1917년 10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약소민족대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마사리크가 이끄는 체코인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평생 후원자가 될 변호사 존 스태거즈(John Staggers)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1919년 초에 제1차대전의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교전국들이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스승이었던 윌슨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할 것이므로, 그 회의에서는 한국인의 독립 호소가 먹혀 들 것도 같았다. 

그 준비를 위해 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에 호놀루루를 떠나 본토로 갔다. 그리고 2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의논한 다음 한인대회를 열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자고 결정했다. 두 사람은 대회 초청장을 교포들에게 발송했다. 


EBS클립뱅크 캡쳐
이승만은 대학원 시절 은사였던 윌슨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을 통해 보내온 윌슨의 회답은 파리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대표가 회의장에 나타나면 일본의 항의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게 여권조차 발급해 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좌절감을 느꼈다. 게다가 몸 마저 아팠다. 그때 그의 절친한 동지인 정한경(鄭翰景)이 위임통치 청원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어차피 한국이 당장 독립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장차 완전 독립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밑에 두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우선은 어떻게 해서든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일로 보였던 것이다. 

사실 한국의 위임통치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일본은 전승국에 속했기 때문에 그 식민지를 빼앗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조차 할 수 없게 된 터였으므로, 이승만은 우선 그렇게라도 해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19년 3월 3일 이승만은 정한경과 공동명의로 백악관에 보내 미국대표단이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문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단지 이승만이 그의 비판자들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는 구실이 되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 문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지지 조차 않았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샌프랜시스코의 국민회와 친안창호계 인물들이 운영하는 <신한민보>가 그 내용을 싣고 그것을 상해에 전달함으로써 이승만을 비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정한경은 그 이후에도 계속 위임통치론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출처 : 더 자유일보(http://www.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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