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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포로 석방, 첫 번째 이야기
작성일 : 2020/05/17 14:26 / 조회 : 8 / 추천 : 0

글 최응표 한국사바로알리기미주본부 대표/ 영역 남신우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1951년 10월 11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에서 유엔군 대표 제임스 머리 대령(오른쪽 가운데)과 북한 인민군의 장춘산 대좌(왼쪽)가 비무장지대의 남북 군사분계선이 그려진 지도들을 보면서 휴전선 경계를 논의하고 있다.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휴전 회담은 2년여를 끌면서 1953년 7월 27일 끝날 때까지 숱한 난관을 거쳐야했습니다. 유엔 회원국도 아닌 한국은 미국과 유엔의 전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휴전 협상 테이블에‘ 감 놔라, 배 놔라’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휴전 협상이 한국의 입장을 무시한 채 급물결을 탄 것은 스탈린의 죽음과 아이젠하워의 등장이었습니다. 스탈린은 겉으로는 휴전 협상에 찬성하는 듯 했지만 속으로는 정치적 계산 때문에 전쟁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스탈린이 사망한 것입니다.



한편 6ㆍ25 전쟁을 빨리 그리고 명예롭게 종결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군사적이 아닌 정치적 해결에 무게를 두고 휴전 협상을 밀고 나갔습니다. 이러다보니 한국의 입장은 무시되고 있던 것이 휴전 협상이었던 것입니다.


1952년 12월 방한한 미국 제34대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경기도 광주의 수도사단을 방문해 한국군 훈련을 참관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당선자, 이승만 대통령, 수도사단장 송요찬 장군. 사진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만일 중공군이 압록강 이남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휴전한다면 우리는 국군을 유엔군에서 빼내어 단독으로 싸울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이런 경우를 한국에서는‘ 칼을 물고 뛴다’고 합니다. 죽을 각오로 끝장을 보겠다고 덤비는 태도를 말하지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클라크 유엔 사령관을 보내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수락 조건으로 몇 가지를 내세웁니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소련이 침략할 경우 미국의 즉각적인 지원 보장,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 계속과 국군의 증강 등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말도 안 되는 생떼’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연히 미국은 거절합니다. 무엇보다 휴전이 성립되기 전에는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5월 6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미국이 상호 방위 협정을 체결해주면‘ 위험을 무릅쓰고’ 휴전에 응하겠으며 미국은 침략에 대항해서 대한민국을 방위해야 하고 국군이 독자적인 능력을 보유할 때까지 미군을 주둔시키며 국군이 미국의 군사적 지원 아래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충분한 보급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 끝에 요구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한국은 고유의 자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협박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이 휴전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을 무렵 포로 송환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릅니다. 회담이 2년이나 걸린 것도 실은 포로 교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유엔군 측은 각 개인의 의사에 따라‘ 자유 송환’을 주장한 반면 공산군 측은 북한군 포로와 중공군 포로는 무조건 북한과 중공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제 송환’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공산군 측이‘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하자’는 유엔군 측의 주장에 극력 반대한 중요한 이유는 1952년 4월 10일 유엔군이 공산군 포로 17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만 명의 공산군 포로가‘ 자유 송환’을 원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생리와 국제 질서가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약소국에게는 강대국의 어떤 선언이나 약속보다 구속력 있는 확실한‘ 조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북진 통일’과‘ 휴전 반대’ 시위를 벌여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미국을 압박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7월 9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진짜 빅 카드는 이런 사소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고른 벼랑끝 전술은 반공 포로 석방이었습니다. 국가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로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2만 7천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시켜 전 세계를 경악시킵니다.

포로 송환을 놓고 협상 중인데 그 포로들을 석방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대통령인 내 명령에 의한 것이며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느 누구에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육군참모총장과 국방 장관에게도 이 ‘작전’을 비밀로 했다고 합니다.

결국 미국은 7월 12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약속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것이 앞으로 우리 민족을 편하고 잘 살게 해 줄 것”이 라는 예언 같은 말을 남깁니다.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전술로 대한민국은 미래의 튼튼한 보장책인‘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얻어냈습니다.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 이승만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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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

The Release of Anti-Communist POW’s, First Episode


The ceasefire talk started on July 10, 1951 and dragged on with many obstacles for more than two years, until it was concluded on July 27, 1953. Korea was not even a member state at the U.N., but the U.S. and the U.N. troops came to rescue Korea from the communists.

Korea was not really in a position to dictate and control what was happening at the ceasefire talk. The reason why the ceasefire talk began to move so quickly in spite of the opposition from South Korea was due to two developments: death of Joseph Stalin in the Soviet Union and the election of a new president in the U.S., Dwight Eisenhower.

Stalin pretended he supported the ceasefire talk, but he wanted the war to drag on for his own political reasons. Then Stalin died. Eisenhower became the U.S. president with the election platform that he would end the Korean War honorably as quickly as he could if he became the president.


So, Eisenhower preferred political solution to military one in the Korean War. He wanted the ceasefire talk to succeed. President Rhee sent an ultimatum to President Eisenhower. “If the U.S. proceeds and concludes the ceasefire agreement with China while the Chinese forces were still in Korea below Yalu River, ROK Army will no longer be a part of the U.N. forces, but will fight the enemy alone.”

President Eisenhower sent Gen. Clark, the Commander of the U.N. forces to President Rhee to persuade him. Rhee stakes out several conditions before he accepts the ceasefire agreement.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Guarantee of Immediate Help from the U.S. in case the Soviet Union invades South Korea. The U.S. navy and air force should continue to support S. Korea and the U.S. will help expand the S. Korean armed forces. This was ridiculous demands to somebody who came to rescue them.

The U.S. didn’t want to have anything to do with these ridiculous demands. No mutual defense treaty unless the ceasefire agreement is worked out with N. Korea. President Rhee sent another letter to President Eisenhower on May 6th. Only if the U.S. agrees to the Mutual Defense Treaty, Korea will reluctantly accept the ceasefire agreement with the enemy.

The U.S. will protect and defend S. Korea until it can defend itself on its own. The U.S. troops will remain in S. Korea and help and supply S. Korea build its forces strong enough to defend itself. At the end of the letter, President Rhee stated that, if these conditions are not met by the U.S., S. Korea will have to exercise its sovereignty and act accordingly.

These were not words coming from somebody begging for help. It was a naked blatant threat to the benefactor. One can only imagine how President Eisenhower felt reading this threat. While President Rhee was arguing with the U.S. about the ceasefire agreement, the issue of POW exchange became another major contention.

In fact, it was because of the POW issue that the ceasefire talk dragged on for two years. The U.N. delegates insisted the POW’s be allowed to choose freely on their own which country they would go. The communist side insisted all the N. Korean and the Chinese POW’s must be returned to N. Korea or China regardless of individual POW’s preference.

The reason why the communists insisted forced repatriation was due to a poll taken by the U.N. forces with the POW’s on April 10, 1952. The U.N. forces took a poll with 170,000 communist POW’s, and found out 100,000 of them wanted to go where they wanted to go, in other words, they preferred ‘free choice.’


President Rhee knew very well better than anyone else that only brutal force can move the U.S. and the international order. He knew he had to exact a treaty for a small country like Korea from a big power, the U.S., not just words of good will or declaration.

Rhee encouraged Koreans to demonstrate in the streets with slogans like ‘Unification Onward to the North!’ or ‘Dead against Ceasefire!’ all to put pressure on the U.S. However, Rhee knew this would not do. The real big card he had was the brinkmanship solution called ‘Release of the anti-Communists POW’s.’

Rhee would do whatever was necessary to save the country. On June 18, 1953, President Rhee let go of the 27,000 Releasing the POW’s while they were negotiating the terms of POW exchange at the table. Rhee declared, “I take full responsibility because it was done under my order.

Nobody else is responsible for this. President Rhee kept this secret even from the Minister of Defense and the Army Chief of Staff to keep them free of the serious responsibilities. In the end, the U.S. had to give in and promise the Mutual Defense Treaty to President Rhee on July 12th.

They had to because they did not know what else President Rhee was going to do. Rhee said at the time as if to prophesize, “This will make my people live well and secure.” Koreans secured Mutual Defense Treaty by way of POW release. It was a brinkmanship measure of genius. Dr. Syngman Rhee pulled it through for the people.

출처 : 더 자유일보(http://www.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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